-조선시대

김육의 시

김영도 2020. 8. 13. 22:38

김육(金堉, 1580-1658)은 인조․효종 때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인조․효종실록>과 <연려실기술>, <국조인물고> 등에 따르면, 그의 자는 백후(伯厚)이고 호는 잠곡(潛谷)이며 본관은 청풍(淸風)으로 기묘명현 김식(金湜)의 후손이다. <소학>을 읽고 벼슬은 남을 구제하는 직책임을 깨우쳤다. 연이어 부모를 여위고 26살(1605, 선조38)에 진사가 되었다. 광해군 때 정인홍을 선비의 적(籍)에서 빼는 데 앞장섰다가 과거길이 막혀 가평 잠곡에 은둔했다. 45살(1624, 인조2)에 문과에 장원하여 정언, 지평을 거쳐 병조좌랑이 되었다. 직강, 교리를 거쳐 50살에 이조정랑이 되어 인사 조정 문제로 파직, 양근에 낙향했다. 3년 후 사간, 승지를 거쳐 안변부사가 되고,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병자호란 후 충청감사가 되어 대동법을 확대하자고 상소했다. 61살에 형조참의, 대사성을 거쳐 부제학, 대사간, 한성부 우윤, 도승지, 원손 보양관이 되고,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를 수행하고 돌아와 이조판서가 되었다. 수레와 관개수차 사용, 점포 설치를 건의했고, 66살에 관상감 제조로 서양역법을 받아들여 새 역법을 시행했으며, 우참찬, 대사헌을 거쳐 예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세자빈 강씨를 비호했다고 파직되었다가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송도유수가 되었다. 효종 즉위 후 예조판서, 대사헌을 거쳐 우의정이 되고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대동법 실시로 김집(金集)과 논쟁한 뒤 사직했다. 영중추부사가 되어 진향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상평통보 주조를 건의한 뒤 고령을 이유로 낙향했다. 72살(1651, 효종2)에 영의정이 되어 대동법을 실시하고 상평통보를 유통케 했다. 성리학과 여러 학문에 정통했고 특히 경제학은 유형원에 영향을 주어 실학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사람됨이 강인하고 과단성이 있으며 품행이 단정 정확하고, 나라를 위한 정성을 천성으로 타고나 일을 당하면 할말을 다하여 기휘(忌諱)를 피하지 않았다.

 

 자네 집에 술 익거든 부디 날 부르시소.

 초당(草堂)에 꽃 피거든 나도 자네 청하옵세.

 백년(百年) 덧 시름없을 일을 의논(議論)코자 하노라.

 

넉넉한 마음가짐과 풍류스러운 자세로 국가민족의 대사를 논의해 보려는 당당한 태도를 시조로 읊었다. 전원에 물러나 강호자연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한가한 날에 친구를 불러놓고 술 한 잔을 기울이면서 국가경영의 원대한 계획을 대화해 보자는 것이다. 그는 현실을 적극적으로 개선해 가려는 강인한 의지를 지녔던 인물임을 그의 삶을 통해 알 수 있었던 만큼 이 시조에서도 그의 삶의 자세가 분명하게 투영되어 있다. 초장에서는 이웃에 사는 친구에게 술이 익으면 자신을 청하라고 먼저 요청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대구로 중장에서는 자신도 초당에 꽃이 피면 친구를 답례로 청하겠다고 하였다. 여기까지는 친구끼리 오가는 정을 대구로 제시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종장에서 이들이 모여서 나누는 대화의 내용을 보면, 음풍농월이나 한가한 정취의 토로가 아니라, ‘백 년 동안 시름없을 일’ 곧 국가가 백 년 동안 걱정 없이 발전해 나갈 수 있는 방향을 화제로 삼는다고 했다. 다시 말해 앞으로 국가민족의 장래를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고 의논해 보자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벼슬하는 사람의 본분이 국가와 민족에 봉사하는 것임을 언제나 잊지 않았기에 평생토록 민생을 위한 여러 정책을 폈을 뿐만 아니라 시조 작품에도 그런 마음가짐을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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