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백수회의 시

김영도 2020. 8. 13. 22:42

백수회(白受繪, 1574-1642)는 선조․광해․인조 때의 문신이다. <현종실록>과 <전고대방(典故大方)>, <매산집(梅山集)> 등에 의하면, 자는 여빈(汝彬)이고 호는 송담(松潭)이며 본관은 부여로 양산(梁山) 사람이다. 19살에 임진왜란을 만나 적에게 함몰 당하자 “차라리 이씨의 귀신이 될지언정 야만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寧爲李氏鬼 不作犬羊臣]”라는 구절을 등에 써 붙였다. 왜적들이 항복시키려고 가마솥에 삶겠다고 협박하였으나 끝내 두려워하지 않자, 왜인이 의롭게 여겨 석방하여 돌려보냈는데, 9년 만에 절개를 지켜 고국에 돌아왔다. 광해군의 난정에 여러 번 상소하여 맹렬히 비판했다. 인조반정 후에 예빈시(禮賓寺) 참봉, 자여도(自如道) 찰방 등을 지냈다. 현종 때 경상감사 민시중(閔蓍重)이 임란과 광해군 때의 절개를 상소해서 예조에서 정문(旌門)을 세워주고 호조참의를 추증했다.

 

 해운대(海雲臺) 여읜 날에 대마도(對馬島) 돌아들어

 눈물 베서고 좌우를 돌아보니 창파만리(滄波萬里)를 이 어디라 할 게이고.

 두어라 천심조순(天心助順)하면 사반고국(使返故國) 하리라.

 

 어와 하도할샤 이내 분별(分別) 하도할샤.

 남 모르는 근심을 못내 하여 설운지고.

 언제나 하늘이 이 뜻 알으셔 사반고국(使返故國) 하려니고.

 

 한등객창(寒燈客窓)에 벗 없이 혼자 앉자

 님 생각하면서 좌우를 돌아보니 북해(北海)인가 연옥(燕獄)인가 이 어디라 할 게이고.

 청풍(淸風)과 명월(明月)을 벗 삼은 몸이 위국단심(爲國丹心)을 못내 슬퍼하노라.

 

첫 수는 대마도에 도착하여 지은 ‘도대마도가(到對馬島歌)’이다. 해운대를 떠나 대마도에 도착한 행정(行程)을 보여주고 눈물을 훔치며 만경창파를 넘어 잡혀가는 포로의 신세를 토로했는데 중장의 넋두리가 길어져 엇시조가 되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하늘이 도와서 고국에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소망뿐인 것이다. 둘째 수는 일본에 머물 때 지은 것으로,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어떻게 하면 고국에 돌아갈 수 있을까를 궁리하였기 때문에 ‘분별도 하도할샤’ 라고 했다. 그리하여 그것은 근심이 되고 설움이 되었다. 포로생활이 오래되면 거기에 정착할 마음도 생겼으련만 그는 조국으로 돌아갈 생각뿐이었고, 그래서 하늘이 자신의 뜻을 알아서 제발 고국에 보내주기를 애타게 바랐던 것이다. 그는 “차라리 이씨의 귀신이 될지언정 야만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고 하였고 가마솥에 삶겠다고 협박했으나 끝내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고 했던 만큼 신라의 박제상(朴堤上)처럼 죽어도 일본의 신하가 되기는 싫었던 것이다. 셋째 수도 엇시조인데, 경도(京都)에서 안인수(安仁壽)라는 사람을 만나 지은 ‘화경도인 안인수가(和京都人安仁壽歌)’다. 포로생활도 오래 되어서 얼마간 자유롭게 되었던 모양이다. 일본인에게 자신의 깊은 속을 토로했을 리는 없고 함께 잡혀온 안인수라는 사람과 시조를 주고받으며 설운 마음을 달래었다. 초장에는 차가운 등불 아래서 느끼는 객지의 고적감을 표현하였고, 중장에는 조국을 잊지 못하고 돌아갈 생각뿐이니 머무는 곳이 북풍한설(北風寒雪) 몰아치는 북해(北海)인지 불길이 휩싸는 연옥(煉獄)인지 도무지 괴로움에 차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종장에서 그곳 생활이 설령 청풍명월을 벗 삼을 만큼 한가하다고 해도 오직 조국으로 돌아갈 마음뿐이라고 거듭해서 변함없는 절개를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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