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홍익한의 시

김영도 2020. 8. 13. 22:36

홍익한(洪翼漢, 1586-1637)은 인조 때의 문신으로 3학사의 한 사람이다. <인조실록>과 <연려실기술>, <국조인물고> 등에 의하면, 자는 백승(伯升)이고 호는 화포(花浦)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이정귀(李廷龜)의 문인이다. 30살에 생원을 거쳐 39살(1624, 인조2)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 감찰, 사서를 지냈고, 외직으로 고산찰방, 고령․부안 현감 등을 역임했다. 50살에 정언이 되어 정묘년에 청군을 이끌고 들어온 강홍립의 죄를 논해 죽이자고 했다. 다음해 장령이 되어, 청나라가 사신을 보내 형제맹약을 버리고 천자로 받들라고 하자, 사신을 죽여 명분을 세울 것을 주장했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명길의 화의론을 극력 반대했다. 그의 처자도 강화가 함락되자 저항하다가 자결했다. 이듬해 평양부 서윤으로 나갔으나 결국 윤집․오달제와 함께 청나라에 잡혀가서 존명(尊明)의 의리를 지키다가 죽었다.

 

 수양산(首陽山) 내린 물이 이제(夷齊)의 원루(寃淚)되어

 주야불식(晝夜不息)하고 여흘여흘 우는 뜻은

 지금에 위국충성(爲國忠誠)을 못내 슬퍼하노라.

 

 주욕신사(主辱臣死)라 하니 내 먼저 죽어져서

 혼귀고국(魂歸故國)함이 나의 원(願)이러니

 어즈버 호진(胡塵)이 폐일(蔽日)함을 차마 어이 보리오.

 

그는 광해군 때의 난정을 보고 과거에 나가지 않고 있다가 인조반정 후에 공주 행재소에서 치른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에 나갔다. 사간원 정언이 되어 청군의 앞잡이 노릇을 한 강홍립을 죽이라고 주장했고, 사헌부 장령이 되어 형제맹약을 깨고 천자로 받들라는 청나라 사신을 죽이라고 했으며, 최명길 등이 주장하는 화의론을 강력히 반대했다. 그래서 화의를 반대한 대표적 인물로 잡혀가게 된 것이다. 그러한 그의 강의(剛毅)한 면모가 시조에 잘 나타나 있다. 첫수의 초장은 은나라의 유신(遺臣)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주군의 나라를 치려는 주나라 무왕을 말리다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었다는 고사를 끌어와서 수양산에 흐르는 물이 백이숙제의 눈물이라고 했다. 중장에서는 명분에 목숨을 바친 그들의 눈물이 밤낮을 쉬지 않고 흐른다고 하여 유구히 이어오는 명분론에 자신이 서 있음을 함축하였다. 종장에서 자신은 지금 나라의 체면을 세우고 존명의리를 밝히지 못해 슬프다고 하여 명분론에 죽은 백이숙제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둘째 수는 청나라에 잡혀가서 지은 것이다. 그는 청나라에서도 존명의리를 굽히지 않았다. 그런 심정을 표현하여, 초장에서는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면서 자신이 먼저 죽겠다고 했다. 중장에서 혼이라도 고국에 돌아가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고, 종장에서 오랑캐의 세력이 날로 강성해져서 마치 오랑캐 먼지가 해를 가리듯이 명나라와 조선을 휩쓰는 것을 어찌 보겠느냐고 했다. 청나라가 날로 강성해 지는 것이 보기 싫어서 혼이라도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은 강렬한 저항적 자세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지만 오랑캐 나라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올곧은 고집이요,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지식인들이 한결같이 지녔던 존명배청(尊明排淸)의 정신 자세와 일치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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