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김광욱의 시

김영도 2020. 8. 13. 22:40

김광욱(金光煜, 1580-1656)은 선조․광해․인조․효종 때의 문신이다. 실록과 <국조인물고> 등에 의하면, 그의 자는 이회(而晦)이고 호는 죽소(竹所)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27살(1606, 선조39)에 진사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고 검열이 되었다. 32살에 부수찬, 정언이 되어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배향을 반대하는 정인홍(鄭仁弘)을 탄핵했다. 이듬해 병조좌랑이 되었으나 부친 김상준(金尙寯)이 계축옥사에 고문을 못 이겨 허위자백하고 삭출되었고 그도 연루되었다. 곧 모친상을 당했고, 36살에 폐모론에 불참하여 삭직되고 행주(幸州)에 10년간 은거했다. 인조반정 후 부친이 길주로 유배되자 고산찰방을 구해 나갔다가 고원군수로 옮겼다. 부친이 아산으로 이배되자 그도 따라 돌아왔으며, 50살에 직강이 되고, 이듬해 홍주목사가 되었다. 54살에 양서(兩西) 관향사(管餉使)로 군량확보에 노력했다. 56살에 부친이 병들어 유배에서 풀렸으나 곧 죽었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동부승지, 우부승지, 나주목사가 되었고, 62살에 황해감사를 거쳐 병조참의, 좌승지, 세자빈객이 되어 청나라에 가 소현세자를 맞아왔다. 67살에 도승지, 병조참판, 예문관 제학이 되고, 70살에 형조판서, 한성판윤이 되었다. 효종 즉위 후에 지춘추관사를 거쳐 경기감사가 되었고, 수원부사 변사기(邊士紀)의 역모를 고발했다. 2년 후 한성판윤을 거쳐 개성유수가 되었고, 75살에 동지사로 북경에 다녀왔다. 지돈령부사, 형조판서, 우참찬이 되었고, 이듬해 좌참찬이 되었다.

 

 도연명(陶淵明) 죽은 후에 또 연명이 나단 말이.

 밤마을 옛 이름이 맞추어 같을시고.

 돌아와 수졸전원(守拙田園)이야 긔오 내오 다르랴.

 

 공명(功名)도 잊었노라 부귀(富貴)도 잊었노라.

 세상 번우(煩憂)한 일 다 주워 잊었노라.

 내 몸을 내마저 잊으니 남이 아니 잊으랴.

 

 뒷집에 술쌀을 꾸니 거친 보리 말 못 찬다.

 젖은 것 마구 찧어 쥐빚어 괴어내니

 여러 날 주렸던 입이니 다나 쓰나 어이리.

 

 강산 한아(閑雅)한 풍경 다 주워 맡아 있어

 내 혼자 임자거니 뉘라서 다툴쏘냐.

 남이야 심궂이 여긴들 나눠 볼 줄 있으랴.

 

 질가마 좋이 씻고 바위 아래 샘물 길어

 팥죽 달게 쑤고 절이 김치 끄어내니

 세상에 이 두 맛이야 남이 알까 하노라.

 

 어화 저 백구(白鷗)야 무슨 수고 하나슨다.

 갈 숲을 바장이며 고기 엿기 하는구나.

 나같이 군마음 없이 잠만 들면 어떠리.

 

‘율리유곡(栗里遺曲)’ 17수 중 첫째부터 여섯째 수다. ‘율리유곡’은 그가 36살 이후 10년간 고양군 행주에 은둔해 있으면서 지은 시조로 주로 전원생활을 내용으로 읊은 작품이다. 대체로 전원으로 돌아온 심정과 전원의 소박한 생활, 한가한 흥취, 늙음과 무상(無常)에 대한 탄식, 현실풍자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첫째 수는 진나라 도연명을 본받아 전원에 돌아온 심정을 읊은 것인데 이 연작시조(連作時調)를 지은 취지를 밝힌 것이기도 하다. 자신도 도연명처럼 율리(栗里), 곧 밤마을에 돌아와 전원에 살겠다는 것이다. 둘째 수는 세속적 부귀와 공명을 추구하던 번뇌와 근심을 잊고 나아가 자신마저 잊어버리고 전원에 묻혀 산다고 했다. 광해군의 난정에 아버지와 함께 희생되어 시골로 숨어버린 자신의 심정을 거짓 없이 드러낸 것이다. 셋째 수는 가난하고 소박한 시골 생활을 읊은 것으로 이웃에서 보리를 꾸어 젖은 것을 찧어 술 담아 막걸러서 주렸던 배를 채우는 소박하지만 어려운 농촌 생활을 꾸밈없이 드러내고 있다. 넷째 수는 강호의 풍경을 혼자 즐긴다는 것으로 남들이 혼자 차지해 심술궂다고 생각해도 이 한가한 전원의 흥취를 즐기겠다는 말이다. 다섯째 수도 전원의 소박한 생활을 읊은 것으로 질그릇 가마에 맑은 샘물 길어다가 팥죽을 쑤어서 절이 김치와 함께 먹는 맛이란 남이 알까 두렵다는 것이다. 전원의 소박한 맛을 즐기는 경지다. 여섯째 수는 백구(白鷗)가 고기를 엿보는 광경을 읊은 것이기는 하지만 조정에서 벼슬에 급급한 사람들을 풍자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럴 경우, 백구는 벼슬을 엿보는 사람들이고, 갈숲은 조정이며, 고기는 벼슬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군마음 없이 잠잔다는 것은 전원에 묻혀서 벼슬에 대한 생각을 버렸다는 뜻이라고 하겠다.  

 

 모첨(茅簷) 기나긴 해에 하올 일이 아주 없어

 포단(蒲團)에 낮잠 들어 석양(夕陽)에 지자 깨니

 문밖에 그 뉘 아함하며 낚시가자 하나니.

 

 삼공(三公)이 귀(貴)타 한들 이 강산(江山)과 바꿀쏘냐.

 편주(扁舟)에 달을 싣고 낚대를 흩던질 제

 이 몸이 이 청흥(淸興) 가지고 만호후(萬戶侯)인들 부러우랴.

 

 추강(秋江) 밝은 달에 일엽주(一葉舟) 혼자 저어

 낚대를 떨쳐 드니 잠든 백구(白鷗) 다 날거다.

 어디서 일성어적(一聲漁笛)은 조차 흥을 돕나니.

 

 헛글고 섞은 문서(文書) 다 주워 후리치고

 필마(匹馬) 추풍(秋風)에 채를 쳐 돌아오니

 아무리 매인 새 놓이다 이대도록 시원하랴.

 

 대 막대 너를 보니 유신(有信)하고 반갑고야.

 나니 아이 적에 너를 타고 다니더니

 이제란 창(窓) 뒤에 섰다가 날 뒤 세고 다녀라. 

 

 세상 사람들아 다 쓸어 어리더라.

 죽을 줄 알면서 놀 줄란 모르더라.

 우리는 그런 줄 알므로 장일취(長日醉)로 노노라.

 

 ‘율리유곡’ 일곱째에서 열두째 수다. 일곱째는 한가한 전원생활을 읊은 것이다. 긴긴 해에 할 일이 없어 낮잠을 즐기다가 저녁에 친구랑 낚시 가는 한가한 생활을 보여준다. 해가 긴 때는 여름이요 농사철인데 낙향한 사대부라 한가히 지내기도 한 모양이다. 여덟째 수는 강호에서 낚시를 즐기는 맑은 흥취를 읊은 것이다. 임금 아래 최고의 벼슬이라는 삼정승이라도 이 강산의 흥취와 바꿀 수는 없다고 자연애호의 태도를 분명히 하고, 달밤에 거룻배 타고 낚시질하는 전원의 흥취는 만호를 식읍으로 거느리는 제후 벼슬이 부럽지 않다고 했다. 벼슬길의 위태로움을 멀리하고 전원에서 욕심 없이 살고자 하는 태도를 강조하는 것이라 하겠다. 아홉째 수도 전원흥취를 읊은 것이다. 가을 날 강에서 달 아래 배를 타고 흰 갈매기와 벗하여 낚시하는 즐거움, 여기에 어부의 피리소리가 더해진 추강(秋江)의 풍취를 노래했다. 열째 수에서는 번거로운 관직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온 즐거운 심정을 조롱에 갇혔다가 풀려난 새와 같다고 표현했다. 헝클어져 뒤섞인 문서를 팽개쳐 버리고 가을바람에 필마를 타고 전원으로 돌아오니 마치 매였던 새가 놓여난 것처럼 시원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열한째 수는 대 지팡이를 두고 세월이 무상(無常)함을 토로한 것이다. 대 막대더러 미덥고 반갑다고 한 다음에 아이 적에 타고 다녔던 일을 감개무량해 하였다. ‘나니’는 감탄사다. 지금은 대 막대가 나를 뒤 세우고 다닌다는 말은 내가 대 막대를 의지해 다니다는 말이다. 40대 중반까지 전원에 은둔했으니 늙기 시작한 때이기는 하지만 대나무 지팡이에 의지한다는 것은 좀 과장된 말이다. 열두째 수는 취락적(醉樂的) 사상을 드러낸 것이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어리석어서, 죽을 줄은 알면서 놀 줄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날마다 술에 취하여 논다고 하여 퇴폐적이고 취락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사람이 죽은 후에 다시 산 이 보았는가.

 왔노라 한 이 없고 돌아와 날 본 이 없다.

 우리는 그런 줄 알므로 살았은 제 노노라.

 

 황하수(黃河水) 맑다더니 성인(聖人)이 나시도다.

 초야군현(草野群賢)이 다 일어나단 말가.

 어즈버 강산풍월(江山風月)을 누를 주고 니거니.

 

 세(細)버들 가지 꺾어 낚은 고기 꿰어 들고

 주가(酒家)를 찾으려 단교(斷橋)로 건너가니

 그 골에 행화(杏花) 져 쌓이니 갈 길 몰라 하노라.

 

 동풍(東風)이 건듯 불어 적설(積雪)을 다 녹이니

 사면(四面) 청산(靑山)이 예 얼굴 나노매라.

 귀 밑에 해묵은 서리는 녹을 줄을 모른다.

 

 최 행수(崔行首) 쑥달임하세 조 동갑(趙同甲) 꽃달임하세.

 닭찜 개찜 오려 점심 날 시키소.

 매일에 이렁성굴면 무슨 시름 있으랴.

 

‘율리유곡’ 열셋째 수부터 열일곱째 수다. 주제가 아주 다양해서 열셋째 수는 인생무상으로 말미암은 취락적 경향을 보이고 있고, 열넷째 수는 현실에 대한 반어를 통해 자연귀의를 드러내고 있다. 열다섯째 수는 한가한 전원생활을 읊고 있고, 열여섯째 수는 자연의 순환과 유구함에 대비된 인생의 덧없음을 탄식하고 있다. 마지막 수에는 특이하게 시인이 농촌에서 백성들과 함께 어울려 일하는 즐거움을 표현하였다. 이렇게 ‘율리유곡’은 시인이 밤마을에 낙향하여 몸소 겪은 생활을 자유롭고 산만한 짜임새로 늘어놓은 것임 알 수 있다. 다시 살펴보면, 열셋째 수에는 사람이 한번 죽으면 다시 살아 돌아온 것을 보지 못 했다면서, 살았을 때 실컷 놀자고 쾌락적 사상을 드러내었다. 우리 민요에도 ‘노세 노세 젊어 노세’라는 말이 있는 만큼 민중의 보편적 생각을 반영한 것이라고 하겠다. 열넷째 수는 광해군의 폭정을 반어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백년하청(百年河淸)’이라는 말처럼 결코 맑지 않을 황하수가 맑아져서 성인(聖人)이 났다고 하고, 초야에 묻힌 많은 어진 선비들이 조정에 나갔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처지에서 보면, 선비들이 성군을 만나 조정에 나갔다는 말은 반어라고 해야 하겠다. 그리고 강산풍월을 맡길 사람이 없어 자신은 강호에 살겠다는 변명으로 앞의 말이 반어임을 확인시켜 준다. 열다섯째 수에는 한가로운 가어옹(假漁翁)의 생활이 그려져 있는데, 버들가지에 꿴 고기를 들고 술집을 찾아가는 시인의 모습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그러나 그는 전원의 가어옹 생활이 평화롭고 확신에 차 있는 자족적인 경지라고 생각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시골 길은 끊어져 있고, 살구꽃은 어지럽게 흩어져 그의 시야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현실의 정치 형세로 말미암아 행주에 은둔해 있었고, 머지않아 다시 현실의 벼슬길로 나왔다. 열여섯째 수에는 봄바람이 불어 쌓인 눈이 녹으면 청산은 옛 얼굴을 도로 찾지마는, 사람은 한번 늙어지면 다시 젊어지지 않는다는 서글픈 감정을 ‘쌓인 눈과 귀밑의 서리’라는 해묵은 비유로 표현했다. 마지막 수에는 시골 이웃들과 화전놀이를 하자면서 닭찜이나 개찜, 또는 올벼로 지은 점심 따위를 자신에게 시키라고 한다. 그의 전원생활은 몹시 궁핍했던 모양이고 시골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이런 궂은일을 맡아서 호구를 했던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기도 하다. 어쨌건 그는 시골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동화되어 들어갔고 이렇게 그럭저럭 지내면 시름이 없다고 했다. 그 시름이란 호구지책을 말하는 것인지 정치현실에 대한 걱정이나 미련인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그는 이 때 민정(民情)을 속속들이 파악했을 것이고, 그것은 병자호란(胡亂)이 일어나기 전 양서(兩西)의 관향사(管餉使)로서 공명첩을 팔아 군량을 마련하는 일에도 도움이 됐을 것이다.  

 

 언충신(言忠信) 행독경(行篤敬)하고 주색(酒色)을 삼가하면

 내 몸에 병 없고 남 아니 무이나니

 행(行)하고 여력(餘力)이 있거든 학문(學文)조차 하리라.

 

 장한(張翰)이 강동거(江東去)할 제 때마침 추풍(秋風)이라.

 백일(白日) 저문데 한없는 창파(滄波)로다.

 어디서 외로운 기러기는 함께 녜자 하느니.

 

 시비(柴扉)에 개 짖거늘 님만 여겨 나가보니

 님은 아니 오고 명월(明月)이 만정(滿庭)한데 일진광풍(一陣狂風)에 잎 지는 소리로다.

 저 개야 추풍낙엽(秋風落葉)을 헛되이 짖어 날 속일 줄 어찌오.

  

‘율리유곡’에 포함되지 않은 세 수를 살펴보자. 첫수는 사대부의 위의(威儀)를 드러내는 그의 겉모습이라 하겠다. 언행이 반듯하고 주색을 멀리하며 건강한 삶을 영위하고 남도 미워하지 않는 그런 바른 선비가 되고자 행동하고 학문을 연마하겠다고 했으니 사대부의 지표를 늘어놓고 자신도 그리하겠다는 다짐이다. 둘째 수는 그가 행주로 은거하려고 할 때의 심정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데, 진(晉)나라의 장한(張翰)이 가을바람이 불자 고향 강동(江東)의 순채국과 농어회가 먹고 싶어 벼슬을 던져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 것처럼, 자신도 시골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을 토로한 것이다. 중장의 상징은 깊이가 있다. 백일은 저물어가고 치솟는 푸른 파도는 고향의 풍경이 아니라 광해조의 난정을 상징한다고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낙향을 결심하자 외로운 기러기 같은 친구도 함께 가자고 한다고 하여, 자신의 결정을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끝의 수는 <해동악장(海東樂章)>에만 김광욱의 작품이라 했을 뿐이지만 달리 지은이가 밝혀져 있지 않으므로 여기서 다룬다. 비슷한 구절을 함께 가진 작품들도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작품을 참고하여 만든 작품으로 보인다. 중장과 종장의 형식을 파괴한 엇시조다. 시조가 산문화의 경향을 받아들인 것이다. 님을 기다리는 애타는 심정을 읊은 것이다. 개 짖는 소리에 님이 왔나 나가보니 달빛만 밝고 갈잎 지는 소리뿐이라는 것이다. 헛되이 짖어 자신의 님 기다리는 마음을 설레게 하는 개를 나무람으로써 서운한 감정을 달래고 있다. 굳이 그와 연결시키자면 은둔하면서도 조정에서 찾기를 은근히 기다렸던 그의 심정을 암유한 것이라고나 할까. 그의 일생으로 미루어 보건대 강호에 은둔한 것은 광해의 폭정을 피한 방편이었고 조정에서 벼슬함이 그의 지향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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