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구인후의 시

김영도 2020. 8. 13. 22:37

구인후(具仁垕, 1578-1658)는 선조․광해․인조․효종 때의 무신이다. 실록과 <국조인물고>에 따르면, 그의 자는 중재(仲載)이고 호는 유포(柳浦)이며 본관은 능성(綾城)으로 인조의 외종형이다. 젊어서 김장생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고 26살(1603, 선조36)에 무과에 급제했다. 29살에 선전관이 되고 도총부 도사에 올랐다. 광해 즉위 후 고원군수, 갑산부사를 지내고 진도군수가 되었다.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靖社)공신 2등이 되고 능천군(綾川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수군통제사를 지냈으며 정묘호란에 주사(舟師)대장으로 공을 세워 전라도 병사가 되었고 포도대장을 거쳐 충청병사가 되었다. 병자호란이 나자 수원방어사로 남한산성에 들어가 막아 싸웠다. 어영대장, 한성판윤을 지내고 63살에 형조판서, 훈련대장이 되었다. 67살에 어영대장으로 심기원(沈器遠)의 모반을 적발하여 영국(寧國)공신 1등으로 능천부원군에 봉해지고 병조판서가 되었다. 판의금부사, 공조판서로 옮겼으며 71살에 모친상을 당했다. 효종이 즉위하자 병조판서를 거쳐 76살에 우의정에 올랐고,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소현세자비 강씨의 신원을 상소하다가 화를 입은 황해감사 김홍욱(金弘郁)을 변호하여 파직당했으나 곧 좌의정이 되었다.   

 

 어전(御前)에 실언(失言)하고 특명(特命)으로 내치시니

 이 몸이 갈 데 없어 서호(西湖)를 찾아가니

 밤중만 닻 드는 소리에 연군성(戀君誠)이 새로워라.

 

황해감사 김홍욱이 이미 사사(賜死)된 소현세자비 강씨와 그 어린 아들을 신원하라는 상소를 했다가, 효종이 즉위 초부터 그 문제를 언급치 말라고 했는데 다시 끄집어내었다고 격분하여 장살하려 했다. 이 때 병으로 사직하고 집에 머물고 있던 구인후가 원임대신으로 입궁하여 “김홍욱과 사사로운 인연은 없지마는 간언을 했다고 죽이는 것은 성덕에 누가 된다.”고 힘써 간하다가 삭탈관작을 당했다. 이 시는 그 때 지은 것이다. 인조를 도와 여러 어려움을 극복해온 그가 효종의 명을 어기고 바른 말하는 신하를 구하려다가 임금의 비위를 거슬렀지만 충성심은 변함없다는 자기고백을 하고 있다. 초장에서 사실을 그대로 서술했는데, 자신의 소신 있는 주장을 여기서는 실언이라고 고쳐 말했다. 소신을 꺾은 건지 임금의 비위를 더 이상 거스르기 싫어서 완곡하게 표현한 건지 알 수 없다. 소신은 있었겠지만 임금의 외척이었으니 임금의 뜻에 거슬리기는 싫었을 것이다. 중장은 임금의 노여움을 산 그는 의지할 데가 없어 서호로 갔다고 했다. 일생을 임금을 의지처로 삼았는데 왕이 노했으니 낙심했을 것이다. 여기서의 서호는 전원생활을 말하는 강호자연이 아니다. 한양 서쪽의 강가나 갯가겠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실의하여 찾아간 곳이다. 거기에서 그는 깜깜한 한밤중에 바다로 나가려는 배의 닻을 들어올리는 소리에 임금을 향한 정성을 새로이 하기로 했다고 종장에서 말했다. 배가 닻을 들어올리고 출항하듯이 자기도 깜깜한 절망의 순간에 다시 한번 임금에게 충성을 다짐하고 재기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밤중만 닻 드는 소리’에서 절망을 희망으로 전환시키는 계기를 발견한다는 시각이 매우 흥미롭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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