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권섭의 시

김영도 2019. 1. 9. 20:59

권섭(權燮, 1671-1759)은 숙종경종영조 때의 문인이다. <숙종실록><옥소집(玉所集)>에 의하면, 그의 자는 조원(調元)이고 호는 옥소(玉所)이며 본관은 안동으로 서울 출신이다. 14세에 부친을 잃고 백부인 권상하(權尙夏)의 훈도를 받으며 외숙인 이의현(李宜顯), 처남인 이태좌(李台佐) 등과 함께 공부했다. 16살에 이세필(李世弼)의 딸과 혼인하여 장인에게서 경사백가(經史百家)를 배웠다. 외조부 이세백(李世伯)의 임지인 평양, 경주와 장인의 임지인 삭녕(朔寧) 등지를 여행했다. 19(1689, 숙종15)에 기사환국이 일어나 송시열이 사사(賜死)되자 소두(疏頭)가 되어 상소를 올렸으나, 이 일로 어려움을 겪고 정치현실에 환멸을 느꼈다. 24살에 과거공부를 다시 시작했으나 혼탁한 조정에 나가 조상에 부끄럽지 않을 절개를 세우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벼슬에 나갈 것을 단념했다. 30살 이후 장인과 계부(季父), 외숙 등의 임지를 찾아 동해와 삼남 일대를 유람했다. 44살에 모친상을 마치고 청풍(淸風)으로 이사했다가 3년 후 강경(江景), 52살에 전라도 고산(高山)으로 이사했다. 이듬해 신임사화(1722, 경종2)가 일어나 노론이 축출되자 충격을 받았고, 장남이 옥새 위조 사건으로 사사되었다. 54살에 백부가 사는 충청도 제천 한수면 황강리(黃江里)로 이주했다. 이후 제천, 청풍 일대와 부실(副室)이 있던 문경 화지동(花枝洞)를 근거지로 생활했다. 그는 일생 동안 전국을 유람했고, 가사 2, 시조 75, 한시 2천 여수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벗님네 남산(南山)에 가세 좋은 기약(期約) 잊지 마오.

익은 술 점점 쉬고 지진 꽃전 세어가니

자네네 아니곳 가면 내 혼잔들 어떠리.




저 사람 믿을 세 없다 우리끼리 놀아보자.

복건[幅巾] 망혜(芒鞋)로 실컷 다니다가

돌아와 승유편(勝遊篇) 지어 후세(後世) 유전(遺傳)하리라.


벗이야 있고 없고 남들이 웃으나 마나

양신미경(良辰美景)을 남 때문에 아니 보랴.

평생에 이 좋은 회포(懷抱)를 실컷 펴고 오리라.




태백(太白) 청량산(淸凉山) 므니 밟은 막대 낙연(落淵) 도산(陶山) 휙 돌아와

귀래정(歸來亭) 쌍단도(雙短棹)로 일성장적(一聲長笛) 늦이 불며

석양의 못 슬민 기약이 영호루(映湖樓)인가 하노라.




아마도 이리 좋은 마음을 남의 말 듣고 고칠쏜가.

패랭이 기울여 쓰고 오락가락 청산녹수간(靑山綠水間)

세상의 호화(豪華)히 지내시는 분네는 웃지마오 이 광생(狂生).




청암정(靑岩亭)에서 백운동(白雲洞)으로 부석사(浮石寺)에 올라다라

산운(山雲)을 빨리 쓸고 취원루(聚遠樓)에 앉으니

선사(禪師)네 점점(點點) 청산이 아무덴 줄 몰라라.




그는 본디 탐승을 좋아하여 서울 주변은 물론, 전국을 두루 유람했다. 16살에 평양감사인 외조부를 찾아가 관서 일대를 둘러보았다. 18살에 외조부의 임지인 경주와 장인의 임지인 삭녕에 가서 두루 탐승했다. 30살에는 장인의 임지인 상주와 영남 우도(右道)를 여행하고, 화양동과 속리산 일대를 유람했다. 33살에는 도봉산을 비롯한 서울 주위의 산들을 탐승했고, 계부(季父)의 임지인 수원 일대를 둘러보았다. 34살에 장인의 임지인 삼척에 가서 동해와 태백산 일대, 영남좌도와 소백산 일대를 기행하고 가사 영삼별곡(寧三別曲)’을 지었다. 35살에 계부의 임지인 전주와 호남좌도 일대, 서해 일대를 둘러보고, 영월을 탐승했다. 39살에 영동팔경과 동해 백리를 거쳐 두타산, 금강산, 청평산 등을 기행했다. 40살에 외숙의 임지인 이천(伊川) 주변을 둘러보고, 계부의 임지인 송도를 찾아 천마산, 성거산, 송악산을 구경했다. 42살에 외숙의 임지인 영남감영을 찾아 낙동강 일대와 통영, 진주, 밀양 등지를 유람했다. 그리고 청풍, 강경, 고산, 문경 등지에 옮겨 살았다. 그는 5살에 외조부의 임지인 홍천에 간 것에서부터 87살에 함흥, 원산 일대를 탐승한 것까지 일생의 많은 부분을 여행으로 보냈다.

앞의 세 수는 혼자 놀러가며 다섯 수를 짓다.(獨自往遊戱有五詠)’의 제1, 3, 5 수를 뽑았다. 첫 수는 서울의 남산에 놀러가자는 내용이다. 친구와 남산에 올라가 화전 부치며 술 마시자는 약속을 한 모양이다. 술은 쉬고 꽃은 세어 가는데, 친구들이 가지 않는다면 혼자서라도 가겠다고 했다. 그에게는 친구와의 동행도 좋지만 그보다는 탐승 자체가 더 좋다는 성향을 보여준다. 둘째 수는 과거공부 때문에 못 가겠다는 친구를 믿을 수 없다며 다른 친구에게 간편한 차림새로 우리끼리 가자고 꾄다. 그가 이렇게 놀러가자는 것은 방탕한 유흥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유람한 흥취를 적어서 후세에 남기려는 뜻이 있어서다. 사실 그는 유람한 것을 시조, 가사, 한시로 읊어서 승유편(勝遊篇)을 지어 남겼던 것이다. 이렇게 친구들을 함께 가자고 권유했으나 동행하지 않자 자기 혼자 유람을 결심한다. 셋째 수는 이러한 결심의 표현이다. 벗들이 동행하든 안 하든, 남들이 유람만 다닌다고 웃거나 말거나 좋은 시절 아름다운 경치를 놓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회포를 실컷 풀고 오겠다고 하였다. 그가 그렇게 여행에 몰두한 것은 아름다운 경치로 심중의 울분, 곧 현실에 대한 불만을 풀고자 함이었다. 뒤의 세 수는 34살에 태백산 일대와 영남 좌도, 소백산을 둘러보고 지은 작품이다. 넷째 수는 태백산과 청량산을 막대 짚고 답파하여 낙연, 도산을 돌아서 귀래정에 노 저어 갔다가 피리를 불면서 석양이 되어서야 아쉬운 마음으로 안동 영호루에 닿았다는 노정과 감회를 읊은 것이다. 긴 노정을 나열하느라 음조가 길어지기도 했다. ‘영호루(映湖樓)’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다섯째 수에서는 유람하는 자신의 취향이 남들과 다른 특성임을 자인한다. 지나치게 탐승에 몰두하지 않느냐는 남의 말을 듣고 자신의 기쁨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이다. 패랭이 쓰고 청산녹수 사이를 오가는 것이 남에겐 미친 짓 같이 보일지라도 부귀에 취한 사람은 이런 즐거움을 알지 못할 것이라고 도치법으로 강조했다. 그가 어려서부터 여행을 했다지만 정치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과거공부를 그만 둔 이후인 30대부터 빈번하게 유람을 한 것으로 보아 정치현실을 잊어버리고 자연과 경치에 몰입하고자 탐승을 계속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에는 멋대로 이는 흥취(漫興)’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여섯째 수는 안동 부근 내성(奈城)의 청암정, 풍기의 백운동을 거쳐 영주 부석사에 올랐다가 취원루에 앉아 청산과 구름을 완상했다는 것이다. ‘부석사(浮石寺)’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기행시인 만큼 지명이나 처소의 이름을 나열하고 느낌을 부쳤다.




하늘이 뫼를 열어 지계(地界)도 밝을시고

천추(千秋) 수월(水月)이 분() 밖에 맑았어라.

아마도 석담파곡(石潭巴谷)을 다시 볼 듯하여라.




일곡(一曲)은 어드메오 화암(花巖)이 기이(奇異)할샤

선원(仙源)의 깊은 물이 십리(十里)에 장호(長湖)로다.

어떻다 일진범풍(一陣帆風)이 갈 데 알아 가느니.




이곡(二曲)은 어드메오 화암(花巖)도 좋을시고

천봉(千峰)이 합답(合沓)한데 한()없는 연화(烟花)로다.

어디서 견폐계명(犬吠鷄鳴)이 골골이 들리나다.




삼곡(三曲)은 어드메오 황강(黃江)이 여기로다.

양양(洋洋) 현송(絃誦)이 구재(舊齋)를 이었으니

지금의 추월(秋月) 정강(亭江)이 어제런 듯하여라.




사곡(四曲)은 어드메오 이름도 혼란(混亂)할샤.

탄성(灘聲)과 악색(岳色)이 일학(一壑)을 흔드는데

그 아래 깊이 자는 용()이 도가성(櫂歌聲)에 깨거다.




그가 54살에 백부가 사는 충청도 제천 한수면 황강리(黃江里)로 이주했는데, 그 때 황강의 경치를 열 수로 표현한 것이다. 첫 수는 서문에 해당되고 이후는 황강 굽이의 차례대로 늘어놓았다. 이이(李珥)고산구곡가의 구조와 어법을 이어받았다고 하겠다. 그러나 고산구곡가처럼 정연한 구조라기보다 황강의 굽이굽이를 따라 펼쳐지는 경치를 사실적으로 서술하고 자신의 흥취를 부쳤다. 첫 수에서 자신이 터 잡은 곳이 하늘이 열어준 명당이라 오랜 세월에 갈고 닦인 경치가 자신의 분수에 넘친다고 감격했다. 그는 이 곳에 이주하기 전에 서너 곳을 옮겨 다닌 터라 이 곳이 그 어느 곳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율곡이 머물렀던 해주 석담(石潭)이나 파곡(巴谷)을 떠올릴 만하다고 했다. 둘째 수는 화암과 장호(長湖)를 읊은 것이다. 화암은 기이하게 생겼고, 장호는 십리나 뻗어있다. 여기에 배라도 띄우면 한 줄기 바람이 배를 몰아 갈 것이라고 했다. 셋째 수도 화암의 경치다. 주위는 천봉이 모인 것 같은데 골마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개 짖고 닭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심산유곡이 아니고 사람이 사는 전원이요 강호의 자연 풍경이다. 넷째 수는 황강이 제목이다. 넘실넘실 흘러가는 물이 옛터 앞을 흐르니 지금 이 경치가 옛날 조상이 즐기던 경치와 한가지라는 것이다. 마지막 수는 황공탄(皇恐灘)을 읊은 것이다. 여울 이름이 황공탄이라 황공(惶恐)하다는 것인지 혼란스럽다면서 여울물 소리와 산빛이 골짜기를 흔들어서 강물 속에 자는 용이 노 젓는 노래 소리에 깨겠다고 하였다. 소리와 빛이 용과 조응하는 세계를 그린 것이다.



 

오곡(五曲)은 어드메오 이 어인 권소(權沼)런고.

이름이 우연(偶然)한가 화옹(化翁)이 기다린가.

이 중의 좌우촌락(左右村落)에 살아볼까 하노라.




육곡(六曲)은 어드메오 병산(屛山)이 금수(錦繡)로다.

백운명월(白雲明月)이 옥경(玉京)이 여기로다.

저 위에 태수(太守) 신선(神仙)이 네 뉘신 줄 몰라라.




칠곡(七曲)은 어드메오 부용벽(芙蓉壁)이 기절(奇絶)할샤.

백척(百尺) 천제(天梯)에 학루(鶴唳)를 듣자올 듯

석양(夕陽)의 범범고주(泛泛孤舟)로 오락가락 하나다.




팔곡(八曲)은 어드메오 능강동(陵江洞)이 맑고 깊어

금서(琴書) 사십년(四十年)에 네 어인 손이러니

아마도 일실(一室) 쌍정(雙亭)에 못내 즐겨 하노라.




구곡(九曲)은 어드메오 일각(一閣)이 그 뉘러니.

조대(釣臺) 단필(丹筆)이 고금(古今)의 풍치(風致)로다.

저기 저 별유동천(別有洞天)이 천만세(千萬世)인가 하노라.




첫 수는 다섯째 굽이에 있는 권호(權湖) 또는 권소를 읊었다. 이 소의 이름이 우연하게 권씨인 자신의 성과 일치하니 조화옹이 자신이 여기에 와 살기를 기다린 게 아닌가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 어디 가까운 좌우촌락에 살아볼까라고 했다. 둘째 수는 여섯째 굽이에 있는 금병(錦屛)을 읊었다. 비단에 수를 놓은 듯 병풍처럼 펼쳐진 산에 흰 구름 밝은 달까지 어울리니 옥황상제가 산다는 옥경과 다름없다. 게다가 신선 같은 풍모의 태수도 와 있었던 모양이지만 그는 자신을 모를 것이라고 했다. 셋째 수는 일곱째 굽이에 있는 부용벽을 읊었다. 아주 기이하게 생긴 부용벽은 백 척이나 솟아서 하늘에 오르는 사다리 같고 신선이 타는 학의 울음소리도 들을 듯하다는 것이다. 그런 경치를 구경하느라 석양에 배를 타고 오락가락하며 감상한다고 했다. 신선경 속에서 자신도 신선이 된 듯한 경지에 이른 것이다. 넷째 수는 능강(凌江)이다. 능강이 맑고 깊은데, 거기에 일실 쌍정을 지어놓고 책과 거문고를 벗삼아 사십년을 사는 이에게 손이 되어 간 것을 읊었다. 자신도 황강에 터 잡아 그와 더불어 살겠다는 말이다. 마지막 수는 구담(龜潭)이다. 그 곳에 누군가의 일각이 있고 강가 낚시터에는 붉은 글씨가 쓰여 있다. 이런 변함없는 풍치 속에 있는 동네의 유구함을 자신도 함께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렇게 황강구곡가(黃江九曲歌)’는 제천 황강 아홉 굽이의 경치를 펼쳐놓고 거기에 자신의 정감을 더하여 표현한 작품으로 그의 산수애호의 정신이 드러나 있다.




뜰 앞에 섰는 대춘(大椿) 몇 아름이 되었나니

간 밤 비 기운에 새희 소리 다시 나서

아마도 천년만년의 이울 뉘를 모른다.




북당(北堂)에 나는 훤초(萱草) 몇 포기 되었나니

간 밤 비 기운에 새 잎이 다시 나서

아마도 천년만년의 이울 뉘를 모른다.




천년을 살으소서 만년을 살으소서.

태산이 편하도록 만경창해(萬頃滄海) 다 잦도록

이 천지 다시 개벽하도록 수고무강(壽考無疆) 하소서.




요지연(瑤池宴) 남은 반도(蟠桃) 씨지어 다시 나서

꽃 피어 다시 지고 새 열매 다시 맺혀

그 씨를 또 다시 심어 또 열도록 살으소서.




이 잔 잡으시고 또 한 잔 잡으소서.

잡으신 남은 잔을 두었다가 고쳐 들어

이 해를 또 고쳐 만나 드려 볼가 하노라.




위의 다섯 수는 곽도정 종조 중근일 수사 오장(郭都正從祖重巹日壽詞 五章)’이다. 곽도정의 종조이신 분의 회혼례를 축하하는 작품이다. 첫 수에서는 뜰 앞에 선 큰 참죽나무가 지난 밤 비에 새 싹이 다시 나서 천년만년 시들 줄 모르듯이 곽도정의 종조부도 오래 사시라고 축수하였다. 참죽나무는 부친의 장수를 상징하므로 이 나무에 새싹이 난다는 것으로 종조부의 정정함을 상징케 했다. 둘째 수는 북당의 훤초로 곽도정의 종조모를 상징케 했다. 북당은 모친이 계시는 곳이고, 훤초는 원추리로 모친을 상징한다. 북당의 훤초 몇 포기가 간 밤 비에 새 잎이 나서 천년만년 시들 줄을 모른다고 하여 종조모의 장수를 빌었다. 셋째 수는 두 분의 만수무강을 빈 것이다. 태산이 평평해지고 바다가 다 잦아지도록 그리하여 다시 천지개벽할 때까지 오래오래 사시라고 반복해서 빌었다. 넷째 수는 주나라 목왕이 요지에서 서왕모와 주연을 베풀었는데, 거기에서 신선이 먹는 반도(蟠桃)의 씨를 받아 다시 거기에서 열매가 맺히고 또 씨를 받아 열매가 맺히도록 살라고 했다. 신선이 먹는 반도는 삼천년에 한 번 꽃이 피고 결실한다니 오래오래 사시라는 축수의 과장된 표현이다. 마지막 수는 중근일(重巹日) 곧 회혼례 잔치를 축하하며 술잔을 들자면서 다음 중근일에 다시 이런 축하잔치를 열어 술을 들자고 했다. 점잖게 축배를 제의하며 두 분의 축수를 비는 품격을 보여준다

 



산창의 맑은 잠을 달빛에 놀라 깨어

죽장을 빗기 지고 송수(松樹) 아래 흩걷나니

어디서 일진경풍(一陣驚風)에 시흥(詩興)조차 불어내.


하늘이 이 한 몸을 초초히 내여시랴.

여귀(癘鬼) ()인들 이 날을 엇지 하리.

두어라 저 할 일 다하고 아무러나 하리라.




저기 저 멀건 것 위에 파란 것이 무엇이니

그 것은 하늘이요 멀건 것은 구름일세.

하늘이 구름만치 낮은들 사롤 일을 알겠다.




청룡검(靑龍劍) 빼어 들고 팔 뽐내며 일떠서니

백만(百萬) 호병(胡兵)이 풀 쓸리듯 하는구나.

그제야 북 둥둥 울리며 안빈(安貧) 서귀(西歸) 하자고.




이 고기 가시 많다 하고 버리기는 아깝구나.

버리지 말자하니 이 가시를 어찌하리.

이 가시 낱낱이 가리고 먹어 보자 하노라.




이바 노래 한 곡조 장진주(將進酒)로 불러스라.

앞집에 술이 익고 일촌(一村)이 도화(桃花)로다.

진실로 춘풍(春風)이 지나곳 가면 놀아볼 세() 없어라.




익은 술 걸러 내오 내 부르면 네 맞출까

풍광(風光)이 부진(不盡)하니 녹음방초(綠陰芳草) 있네마는

아마도 일춘소화(一春韶華)를 못내 보아 하노라.




그의 생활 감정을 표현한 작품들을 골랐다. 첫 수는 산길을 홀로 걷다.(山獨步)’가 제목이다. 전원에 사는 이의 풍류스런 삶이 펼쳐져 있다. 산에 있는 집의 창 아래서 잠을 자다가 달빛에 놀라 깨었다고 했다. 달빛이 경이감을 불러일으켰다. 경이의 세계란 달빛어린 전원풍경이다. 그 속을 대 막대를 비뚜름하게 잡고 소나무 숲길을 되는대로 걷는다. 그 때 한 줄기 미친바람이 시흥(詩興)을 불어낸다고 했다. 달빛 비친 풍경 속에서 시상을 떠올리는 시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둘째 수는 제목이 염병(患瘟)’인데, 병들었을 때에도 자신의 살아있는 뜻을 잊어버리지 않는 씩씩한 의지를 보여준다. 하늘이 자신을 뜻 없이 지어내지는 않았다면서 염병 귀신이 백이라 한들 자신을 죽이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다. 생에 대한 자신감이다. 질병 귀신이 자신을 괴롭힐 만큼 괴롭히고 나면 더 이상 어찌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여유로운 기상을 드러냈다. 셋째 수는 제목이 하늘을 바라봄(望天)’이고, 하늘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바른 데로 이끌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것이 구름만큼 낮다면 자신도 하느님에게 사뢸 말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현실의 여러 부조리에 대하여 할 말이 있으나 하느님은 너무 멀리 있지 않느냐는 원망도 깃들어 있다고 하겠다. 넷째 수는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을 표현한 것으로 제목은 기몽(記夢)’이다. 병자호란 후에 사대부를 비롯한 온 국민이 지녔던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생각을 드러내었다. 청룡검을 빼들고 일어나 오랑캐를 풀 베듯 쓸어버리고 개선하여 다시 백성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백성의 한사람으로서 청나라에 대한 울분을 표출한 것이다. 다섯째 수는 식다경어(食多鯁魚)’인데, 밥상에 오른 생선을 가시를 발라가며 먹어보자는 내용이다. 일상에 접하는 귀찮고 복잡한 문제라도 차근히 풀어서 순조롭게 해결해 가면서 살자는 뜻을 함축했다고 볼 수 있다. 여섯째와 일곱째 수는 주인과 손님이 주고받는 한 짝의 대화로 여섯째 수에는 객에게 말한다(謂客)’라는 제목을 붙였고, 일곱째 수에는 객이 답한다(客答)’라는 제목을 달았다. 여섯째 수에서는 앞집에 술이 익고 동네에는 복사꽃이 만발한데, 봄바람이 천지에 가득할 때 술을 권하는 장진주(將進酒)를 부르고 놀자는 것이다. 봄바람이 지나가면 놀아볼 형세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일곱째 수는 여기에 답하는 말로, 술을 걸러놓고 부르면 거기에 맞추어 오겠느냐면서 녹음방초가 흐드러진 봄날을 두고두고 즐기지 못해서 아쉽다는 심정을 토로했다

 



생소종경(笙簫鍾磬) 늦이 들고 백료준분(百僚駿奔)하는 적에

문무가(文武歌) 길게 불고 일무방장(佾舞方張)하였으니

아마도 재천(在天)하신 명령(明靈)이 척강양양(陟降洋洋)하실까.




단 위에서 수기(手旗)를 들어 육화팔진(六花八陣) 명제(命題)하고

() 치며 북 울리고 사오합(四五合)을 싸우더니

적은 덧 호령포(號令砲) 한 방에 만마(萬馬) 무성(茂盛)하여라.




가사장삼(袈裟長衫) 갖춰 입고 차례로 벌여 서서

탁하(卓下)에 삼배하고 천수공양(天壽供養) 도도는 양

아마도 삼대상(三代上) 위의(威儀)를 다시 본 듯하여라.


거문고 가야금 해금 피리 장구 섞어 타며

나삼(羅衫)을 반만 들어 보허사(步虛詞)로 얼러 추니

밤중만 금련(金蓮) 화촉(華燭)에 취하는 줄 몰라라.




[]잡이 비파잡이 피리잡이 셋이나

집마다 줏갑[酒價] 일고 걸냥조(乞糧調)로 불며 타며

싫도록 횰라횰라 하다가 멋만 듣고 가노매.




몽도리의 붉은 갓 쓰고 칼 들고 너펄면서

()소리 저저리고 제석군흥(帝釋軍興) ()하노매

새도록 장고 북 던던던 하며 그칠 줄을 모른다.


그는 여러 종류의 음악을 듣고 그 감상을 시조 여섯 수[六詠]로 표현하였다. 첫 수는 제목을 제악 소(祭樂 簫)’라고 했는데, 종묘제례의 광경을 묘사한 것이다. 생황, 피리, , 경쇠의 소리가 천천히 들리고 벼슬아치들은 바삐 서둔다. 그리고 문무가(文武歌)를 부르며 줄지어 추는 일무(佾舞)가 시작된다. 이러한 가운데 선왕의 영령들이 임할 것이라고 했다. 엄숙한 종묘제례악의 연주 광경을 그려놓은 것이다. 둘째 수는 군악 정(軍樂 整)’이다. 단 위에서 장수의 명령을 수기(手旗)로 전달하면, 군사들은 육화팔진을 펼치고 징소리 북소리에 따라 전투훈련을 한 다음, 대포 한 방을 신호로 기병이 등장하는 모습이 군악에 따라 정연히 행해진다고 읊었다. 셋째 수는 선악 정(禪樂 定)’으로 승무와 불교음악의 연주 광경을 읊은 것이다. 가사 장삼을 갖춰 입은 스님들이 벌여 서서 선악이 울리는 가운데, 불상을 모신 좌대 아래에 절하고 천수공양을 드리는 모습을 그렸는데, 그 모습이 마치 중국 고대 왕조인 하(), (), () 시절의 문물에서 느끼는 위엄을 보는 것 같다고 하였다. 불교의식을 보고 중국의 유교적 전통을 생각하는 것은 다소 부자연스럽다. 넷째 수는 여악 탕(女樂 蕩)’이 제목이다. 여악은 궁중에서 연회를 베풀 때에 기생이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와 춤을 곁들인 것인데, 여러 악기를 타며 보허자(步虛子) 곡에 맞추어 비단 적삼을 펄럭이며 어전에서 춤추는 광경을 보느라 연꽃 장식 금 촛대의 불빛에 술 취하는 줄 모르겠다고 했다. 여악의 흥겹고 방탕한 소리에 정신이 혼미해진다는 말이다. 다섯째 수는 용악 첩(傭樂 捷)’이다. 이것은 동네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집집마다 다니면서 풍악을 울려 주고 돈이나 곡식을 얻기 위하여 조직한 무리인 걸립패의 농악과 비슷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퉁소 피리 비파 등을 연주하면서 집집마다 다니며 술값이나 얻고 곡식 따위를 얻기 위해 연주하며 부지런히 돌아다녔지만 별 소득 없이 돌아가는 것을 읊었다. 마지막 수는 제목이 무악 음(巫樂 淫)’으로 무당이 굿하며 연주하는 음악을 묘사한 내용이다. 무당의 차림새와 칼춤, 무가(巫歌), 장구와 북 소리 등을 여실하게 그려놓았다. 이러한 시조를 통하여 소재가 확장되고, 기법이 객관적 묘사로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모첨(茅簷)에 달이 진 제 첫잠을 얼핏 깨어

반벽잔등(半壁殘燈)을 돋우어 누웠으니

일야(一夜)의 매화(梅花)가 발()하니 님이신가 하노라.




아마도 이 벗님이 풍운(風韻)이 그지없다.

옥골빙혼(玉骨氷魂)이 냉담(冷淡)도 한저이고.

풍편(風便)의 가만한 향기는 세한불개(歲寒不改) 하나다.




천기(天機)도 묘()할시고 네 먼저 춘휘(春輝)로다.

한 가지 꺾어 내어 이 소식 전()차하니

님께서 너를 보시고 반기실까 하노라.




님이 너를 보고 반기실까 아니실까.

기년화류(幾年花柳)에 취()한 잠 못 깨었는고.

두어라 다 각각 정()이니 날과 늙자 하노라.




침변(枕邊)에 심은 도화(桃花) 유정(有情)도 한저이고.

어제 못 핀 가지 오늘 마저 피었구나.

아마도 춘풍(春風)이 늦었으니 행여 질까 하노라.


꽃 지자 새 풀 나니 일원(一院)이 춘사(春事)로다.

낙화방초(落花芳草)야 긔 더욱 보기 좋아.

어즈버 이 내 풍정(風情)이 가실 적이 없어라.




춘풍(春風)이 늦으나 따나 핀 꽃이 지나 마나

잎 속의 봉오리 새로운 향기로다.

두어라 일년 소화(韶華)는 네 혼잔가 하노라.




선비들은 매화 완상하기를 즐겼다. 세한을 이기고 피어나는 매화에서 선비의 절개를 보았기 때문이다. 앞의 네 수는 조공정지매(趙公定之梅)’ 또는 매화사장(梅花四章)’이고, 뒤의 세 수는 병중영분도(病中詠盆桃) 삼장(三章)’이다. 그는 매화만 좋아한 게 아니라 도화도 좋아한 모양이다. 매화는 선비요 도화는 소인의 상징이라는 경직된 사대부의 관념화된 선입견을 무시한 것이다. 꽃은 꽃일 뿐이라는 태도다. 첫 수에서는 매화를 님의 형상화로 보았다. 초가 처마에 달이 질 때 첫잠을 깨어 일어나 등불을 돋운다. 그 때 밤에 핀 매화가 님의 형상으로 다가온다. 님은 여인이기도 하고 그리운 어떤 대상이기도 하다. 금실이 좋았던 초취부인 이씨는 25살에 죽었고, 재취부인 조씨와 부실 이씨와는 화목했다. 특히 부실 이씨는 좋은 반려였다고 했으니 이 여인을 형상화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님은 그가 그리워하는 대상이거나 지향했던 어떤 가치의 상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둘째 수에서는 매화의 운치를 말했다. 겨울에 피는 매화가 미끈하지만 냉담한 자태로 추위를 견디며 향기를 바람에 날린다고 하여 선비의 꽃이라는 전통적 시각을 이어받고 있다. 셋째 수의 매화는 다시 님의 형상이다. 계절은 아직 겨울인데 매화는 먼저 봄을 알린다. 천기의 운행을 제가 먼저 알리니 꽃가지를 꺾어서 님에게 보내고자 한다. 혹시 문경 화지동에 살고 있던 부실 이씨에게 보내고 싶지나 않았을까. 그러나 그의 연시조는 편마다 의미 맥락이 연결되어 있으므로 다음 수와 연결이 어긋난다. 차라리 그가 몹시 그리워하는 어떤 대상일 것이다. 넷째 수, 즉 연시조 조공정지매(趙公定之梅)’의 마지막 수는 님이 몇 년 동안 화류(花柳)에 빠져 자신이 보내는 매화를 반기지 않을 것 같으니 자신과 함께 늙자고 하였다. 여기에서의 님은 여러 해 화류에 취해 있는 어떤 사람이다. 님이 뜻하는 바가 아주 애매하다. 이런 애매성이 시인이 노리는 바이기도 하므로 님은 그가 그리워하는 대상을 포괄적으로 함축한 것이라고 하겠다.

다섯째 수는 봄날의 도화를 읊은 것으로 복사꽃이 새로 피어남(桃花新開)’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베갯머리에 도화분을 두고 복사꽃을 정답게 바라보며 봄바람에 꽃이 질까 염려하는 마음을 읊었다. 매화를 사랑했던 마음에 뒤지지 않게 도화도 사랑한 것이다. 여섯째 수는 복사꽃이 저버린 계절에도 자신의 정취는 여전하다며 봄풀을 반기고 있다. 제목을 복사꽃은 이미 지고 어린 풀이 새로 돋아남(桃花已落細草新生)’이라고 붙여 도화가 져도 방초는 푸르니 좋은 봄날이 아니냐는 것이다. 복사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고, 봄날의 꽃과 풀을 함께 사랑할 뿐이다. 이로 보건대 그는 매화에 대한 전통적 시각을 지니면서도, 관념으로 말미암아 꽃과 풀을 선별하지 않는 생명 사랑의 포용적 자세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마지막 수는 제목이 복사꽃은 거의 지고 새 꽃봉오리가 다시 피다.(桃花才落新蕊復開)’이다. 봄철이 늦어 피었던 꽃이 져 가지만, 거기에 개의치 않고 늦게 나온 복사꽃 봉오리가 새로운 향기를 머금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일년 중 가장 아름다운 봄꽃은 바로 너라고 찬양하고 있다. 꽃은 어떤 꽃이건 그 자체로 아름답다는 그의 탐미적인 태도가 돋보인다

  



아마도 내 인생 불쌍코 잔잉할샤.

험한 일 궂은 일 싫도록 보았구나.

두어라 잔잉한 인생 일러 속절없어라.




속절은 없다마는 하 설워 이른 말이

내 인물 내 성품을 낸들 아니 잠깐 알까.

아마도 이 설운 회포(懷抱)를 알 이 없어 설워라.




남이야 아나 마나 내 앞을 차려스라.

일 없이 노는 이들 웃으나 꾸짖으나

내 몸에 그른 일 없으면 슬퍼 무엇 하려뇨.




실컷 하지 마라 이 아니 내 탓이냐.

남에게 덧내고 왼 말이 곳 없으랴.

적으나 알아곳 도니면 궂은 일이 있을까.




이바 우습구나 웃음도 우스울사.

우습고 우스우니 웃음 겨워 못할로다.

아마도 히히 호호 하다가 하하 허허 할세라.




하하 허허 한들 내 웃음이 정 웃음가.

하 어척 없어서 느끼다가 그리 된 것

벗님네 웃지들 말구려 아귀 찢어지리라.




아귀 찢어진들 우스운 것을 어이하리.

우스운 일 실컷 하고 웃기조차 말라 하는

이 사람 저만 싫거든 우스운 일을 말구려.




아무리 말자 한들 웃음이 절로 나네.

내가 이만 할 제 자네네야 다 이를까.

싫도록 히히 하하 하다가 박장대소(拍掌大笑) 하시소.




그는 슬픔과 웃음도 시조로 표현하였다. 앞의 네 수는 슬픔을 표현한 것으로 비래호(悲來乎) 사장(四章)’으로 이름 붙였다. 첫 수에서 험한 일과 궂은일을 많이 겪어서 자신의 인생이 불쌍하다고 자기연민의 정을 드러내었다. 둘째 수에서 앞 수의 속절없다는 말을 이어받으면서 자신의 설움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더욱 서럽다고 강조했다. 명문가에 태어나 환경은 좋았으나 14살에 부친을 잃고 19살에 상소문제로 어려움을 당한 후에 결국 과거를 치르지도 못한 채 벼슬길을 단념하고 말았고, 25살에 초취부인을 사별하고 53살에 그 소생인 장남을 잃는 불행을 당했으니 여러 가지 서러운 일을 당했다고 할 것이다. 개인적 불행에 대한 솔직한 감정을 꾸밈없이 드러내었다. 셋째 수에서 남이야 알건 모르건 제 앞을 자신이 챙겨야 한다면서 할 일 없는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고 꾸짖어도 자기수양에 힘쓰면서 슬퍼하지 않겠다고 했다. 넷째 수에서 무슨 일이든 지나치게 하는 것이 제 탓이라면서 남과 말썽이 생기면 자신의 잘못이 있기 마련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 사정을 알고 조심스레 돌아다니면 궂은일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인생의 여러 가지 어려움과 슬픔을 당하고 그것을 반성하여 자아수양의 계기로 삼고자 하는 자세를 드러내었다고 할 것이다.

다섯째 수부터 여덟째 수까지는 웃음을 표현했는데, ‘소의호(笑矣乎) 사장(四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섯째 수에서 옆 사람을 불러 무언가 우습다고 그러는데, 웃음의 연유는 밝히지 않고 점층적으로 자꾸 우습다면서 끝내 웃음을 터트린다. 웃음을 못 참고 터트리는 과정을 실감나게 표현했다. 여섯째 수는 앞에서 터트린 웃음이 정말 우스워서 웃은 게 아니라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은 것이라고 말한다. 무언가 현실에 대한 불만 때문에 웃었다는 것인데, 이는 남이 저지른 일에 대하여 마땅치 않게 보고 있는 비판적 내면의식이 웃음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그렇지만 웃지 말라면서 웃음을 차단한다. 웃으면 아귀가 찢어질 것이라는 비속어까지 써 가면서 웃음을 말린다. 여기에는 우습다고 마음대로 웃을 수도 없는 삼엄한 현실에 대한 풍자가 숨어 있다. 일곱째 수에는 입이 찢어져도 웃음을 참지 못 하겠다고 했는데, 그 까닭은 우스운 일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스운 일이란 그가 보기에 어처구니없는 행위를 뜻한다. 그것은 따지고 보면 나와 남의 가치관이 다른 데서 오는 시각차가 만들어낸 웃음이다. 내가 보기에 불합리한 일을 저질러놓고 어이없어 웃는 나에게 웃지도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웃는 것이 싫거든 그런 우스운 짓을 하지 않으면 될 게 아니냐고 했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기에 무엇이 그리 불합리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그것은 그의 처지를 알아야 한다. 그는 노론이었고 기사환국에 항의하여 상소했다가 어려움을 당했다. 그런 사정을 생각할 때 웃음의 원인은 정치현실에 대한 시각의 차이에서 온 것이라 하겠다. 마지막 수에서 웃음을 참으려 해도 절로 웃음이 난다면서 옆 사람에게도 우스우면 웃으라고 적극적으로 권한다. 그리고 마침내 폭발적으로 웃음을 터트린다. 웃음을 소재로 평이한 일상어를 활용하여 자신의 내면의식을 드러내었는데, 그것은 나와 남의 시각차에서 오는 가치관의 대립을 드러내고 있고, 현실을 보는 자신의 비판적 내면의식에서 웃음이 생성되고 있다. 다시 말해 그의 웃음은 현실을 응시하는 그의 비판의식에서 분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전국을 유람하며 현실을 외면하려 했지만 현실에 대한 응시와 비판을 멈춘 것이 아니다. 이로 보아 그는 자연에 대한 즐거움을 찾으면서 현실참여에 대한 숨겨진 욕구를 감추고 있었던 대부분의 선비들과 비슷한 의식을 지녔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를 대담하고 솔직하게 시조로 형상화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구렁에 섰는 나무 언건(偃蹇)도 한저이고.

풍상(風霜)을 실컷 겪고 독야청청(獨也靑靑) 하였구나.

저근덧 버히지 말고 두면 동량재(棟樑材) 될로다.




추풍(秋風)이 요락(搖落)하여 초목이 다 이울되

만계황화(滿階黃花)는 어찌하여 피었는고.

진실로 만절한향(晩節寒香)이 가실 적이 없어라.




찬 기운 머금고 서서 눈빛을 새오는 듯

옥골빙혼(玉骨氷魂)이 봄 전()에 돌아오니

가뜩에 냉담(冷淡)한 풍운(風雲)에 암향(暗香)조차 들릴샤.


골골이 들리는 소리 좋기도 좋을시고.

암계(巖溪)를 다 지내고 구비 구비 돌아가니

무엇이 맺힌 일이 있관대 열열명(咽咽鳴)을 하는가.




위의 네 수는 열여섯 가지 사물을 읊은 십육영(十六詠)’ 중 각각 소나무, 국화, 매화, 시내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첫 수에서 골짜기에 높이 자란 소나무가 모진 풍상에도 꿋꿋하게 자란 것을 두고 베지 말고 두면 기둥이나 대들보감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험난한 정치현실 속에서 꿋꿋이 자기 역량을 길러온 훌륭한 인재들을 사화(士禍)로 죽이지 않는다면 국가의 기둥이 될 것이라는 뜻을 함축한다. 둘째 수에는 가을바람이 불어 초목이 다 시들었는데 층계 가득히 핀 황국화는 가을날 차가운 향기를 풍긴다고 했다. 이 시도 정변을 만나 노론이 어려움을 당할 때 지조 있는 선비들은 그들의 절개를 지켰다는 뜻을 유추한 것이라 하겠다. 물론 표면적 의미 그대로 가을날의 국화를 사실적으로 그렸다고 할 수도 있다. 셋째 수는 매화를 읊은 것이다. 매화가 겨울의 찬 기운 속에서 피어나 눈빛을 시새우는 듯하다며, 옥처럼 맑고 얼음같이 찬 자태가 채 봄이 오기 전에 꽃망울을 터뜨리니 가뜩이나 바깥은 추운 겨울인데 그 한기를 뚫고 그윽한 향기를 풍긴다고 하였다. 겨울 한기 속에 피어나는 매화를 사실대로 그려내려고 하였다. 마지막 수는 시내를 읊은 것이다. 골마다 흘러내리는 시냇물 소리가 듣기 좋다면서 바위 계곡을 지나 굽이굽이 흐르며 내는 소리가 마치 가슴에 맺힌 한이 있어 울면서 흐르는 것 같다고 하였다. 시냇물 소리에다 자신의 맺힌 마음을 투사했다고 하겠다

   



물 아래 잠겼더니 솟아 뜨니 천상(天上)일세.

떼구름 거느리고 변화도 신기할샤.

적은 덧 한 줄기 따라 주면 해내(海內) 생영(生靈) 살울라.




꼬리치고 휘파람 불며 기염(氣焰)도 황홀(恍惚)할샤.

이 뫼에 들언 지 몇 해나 되었나니

진실로 네 잠깐 떠나면 호리(狐狸) 종횡(縱橫)하리라.




이 몸이 천지간(天地間)에 태창제미(太倉稊米) 같건마는

고금(古今)을 헤어보니 해온 일도 기특할샤.

두어라 쥐 같은 인간이야 일러 무엇하리.


너도 무리 있다 하고 사람마다 잡으려 한들

금린(錦鱗)이 잠깐 일면 구름 몰아 다니려든

아무리 미끼를 준들 걸릴 줄이 있으랴.




구름 밖에 학 타신 분네 한가히도 다니실샤.

주궁대궐(珠宮大闕)에 자소성(紫簫聲)이 더욱 좋아

적은 덧 하계(下界)를 보소서 우스운 일이 많아라.




여기서는 용, 호랑이, 사람, 잉어, 신선을 읊었다. 첫째 수는 용을 읊은 것인데, 물 속에 잠겼다가 하늘로 솟아오르고, 구름을 몰아 조화를 부린다고 하였다. 잠깐 한 줄기 비를 내려서 가뭄에 시달리는 세상 사람들을 살려내 주기를 바랐다. 이 말은 또한 용이 상징하는 임금에게 백성을 살리는 정치를 펴달라는 바람이기도 하다. 둘째 수는 호랑이를 읊은 것이다. 호랑이가 꼬리를 휘두르고 휘파람 소리를 내며 바람같이 출몰하여 그 기상이 대단한데, 이 산에 여러 해 동안 살고 있다. 만약 이러한 호랑이의 위세가 사라진다면 여우나 살쾡이가 설칠 것이라면서 사납고 기세등등한 호랑이지만 이 산에 머물기를 바라고 있다. 현실정치의 지배세력을 호랑이에게 빗대어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셋째 수는 사람을 읊은 것으로, 자신과 남에 대한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신을 포함한 사람이 비록 하늘과 땅 사이에 좁쌀만한 존재이긴 하지만 고금 역사를 헤아려보면 그들의 한 일이 기특하다고 했다. 자신의 경우에는 벼슬에 나가진 않았지만 문장으로 많은 성취가 있었다고 자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쥐 같은 인간이야 언급할 가치가 없다고 했다.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가. 아마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인간들을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넷째 수는 잉어를 읊은 것이다. 잉어를 사람들이 잡아먹으려 하면 이 고기가 승천하여 용이 될 수도 있는데, 사람이 미끼로 잡으려 한다고 잡히겠느냐고 하였다. 잉어를 뜻이 높고 원대한 지사(志士)에다 빗댄 것이라 생각된다. 그들도 서로 뜻이 통하는 무리가 있고, 세속적 이익이나 권세로 꾀어도 거기에 흔들리지 않으며, 그들이 역량을 펼 수 있는 날이 오면 구름을 몰아 변화를 몰고 올 것이라고 하여 자신의 숨은 뜻을 은근히 담았다고 하겠다. 마지막 수는 신선을 읊은 것인데, 구름 밖에 학을 타고 한가히 다니고, 구슬 대궐에 퉁소소리를 즐기면서 사는 신선이라도 인간세상을 한번 보라고 권했다. 거기에는 우스운 일이 많다는 것이다. 바로 자신에게 하는 말 같다. 일생을 신선처럼 전국을 유람하고 지냈지만 정치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보면 우스운 일이 많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것은 노론의 입장에서 현실정치에 대한 불만에 찬 내면의식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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