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윤유의 시

김영도 2018. 12. 17. 16:49

윤유(尹游, 1674-1737)는 숙종경종영조 때의 문신이다. <경종숙종실록>에 의하면, 그의 자는 백수(伯修) 또는 백숙(伯叔)이고 호는 만하(晩霞)이며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29(1702, 숙종28)에 생원이 되고 음보로 찰방이 된 후 진천현감 등을 역임했다. 45(1718, 숙종44)에 문과에 급제하여 49(1722, 경종2)에 수찬, 부교리를 거쳐, 이듬해 헌납, 이조좌랑 등을 지내고 동래부사가 되었다. 영조 즉위 후에 대사간, 부제학, 승지 등을 역임했다. 이듬해 노론이 득세하자 앞서 신임사화를 일으킨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서 쫓겨났다가 54(1727, 영조3)에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재집권하자 대사간에 복직, 승지를 거쳐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56살에 대사헌, 예조참판이 되고, 이듬해 병조이조호조참판을 거쳐 도승지가 되어, 동지 겸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가다가 병으로 되돌아왔다. 한성판윤을 거쳐 58살에 형조판서에 오르고, 이듬해 강화유수, 병조판서가 되었다. 60살에 지의금부사, 지경연사를 겸직했으며, 다음해 병조판서로 동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고, 62살에 여러 판서를 두루 역임했다. 64살에 예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로 있다가 죽었다. 성품이 호걸스럽고 사치하며 성색(聲色)을 좋아하였다. 명필로 이름을 떨쳤다

 



대동강(大同江) 달 밝은 밤에 벽한사(碧漢槎)를 띄워두고

연광정(練光亭) ()한 술이 부벽루(浮碧樓)에 다 깨거다.

아마도 관서가려(關西佳麗)는 예뿐인가 하노라.




청류벽(淸流壁)에 배를 매고 백은탄(白銀灘)에 그물 걸고

자 남은 고기를 눈실같이 회()쳐 놓고

아이야 잔 가득 부어라 종일취(終日醉)를 하리라.




평안감사로 있을 때거나 평양에 갔을 때 지은 작품이다. 동지사로 청나라에 갈 때 평양에서 여색에 빠졌다가 출발 기한이 임박해서 떠났다는 기록이 있고 보면, 호탕하게 유락(遊樂)하기를 즐겼던 모양이다. 시조에서도 평양 대동강에서 뱃놀이하거나 고기잡이하며 취흥을 돋우는 즐거움을 읊은 것이다.

첫 수의 초장은 상황설정이다. 대동강 달밤의 뗏목 위에서 벌인 주연이다. 중장은 뗏목 또는 배가 연광정에서 부벽루 앞으로 흘러갈 때 취한 술이 깬다고 했다. 왜 그런가? 대동강가의 연광정에서 부벽루까지의 경치가 관서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기 때문이라고 종장에서 그 까닭을 밝혔다. 둘째 수의 초장도 역시 상황설정이다. 청류벽, 백은탄은 평양 대동강 유역의 절경이다. 거기에 배를 매고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는다. 중장에서 한 자가 넘는 고기를 회를 쳤다고 했다. 이런 절경 속에서 좋은 안주를 마련했으니 취흥이 안 날 리 없다. 그래서 종장에서 종일토록 취흥을 즐기겠다고 했다. 그는 젊어서 의론을 잘하고 꾀가 있었다고 하는데, 빼어난 경치와 미각을 찾아 즐기면서 호탕하게 노닌 것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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