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남도진의 시

김영도 2018. 12. 17. 16:48

남도진(南道振, 1674-1735)은 숙종경종영조 때의 선비다. <조선인물호보(朝鮮人物號譜)>에 의하면, 그의 자는 중옥(仲玉)이고 호는 농환재(弄丸齋)이며 본관은 의령이다. 과거 공부를 폐하고 학문연구에 전념하였으며, 거문고와 글씨에 능했다. 봉사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가사 <낙은별곡(樂隱別曲)>과 시조 3수가 전한다.




복희(伏羲) 지은 삼십육궁(三十六宮) 문왕공자(文王孔子) 들었더니

무명공(無名公) 중창(重創)한 후 빈집만 남았어라.

우리도 이 집 수쇄(修洒)하고 들어 보려 하노라.




춘산(春山)에 비 간 후에 포기마다 꽃이로다.

일호주(一壺酒) 가지고 냇가에 앉았으니

물 위에 도화(桃花) 범범(泛泛)하니 무릉(武陵)인가 하노라.




한중(閑中)에 무사(無事)하여 무극옹(無極翁)을 찾아보랴.

천근(天根)을 돌아들어 월굴(月窟)로 내려가니

아마도 연비어약(鳶飛魚躍)하니 유흥(幽興)겨워 하노라.




그는 아마 시골에서 독서에 전념했던 선비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의 일생을 짐작하기는 어렵지만 시조 작품으로 보아 독서에 침잠하고 자연을 즐겼던 인물로 짐작된다. 그의 조부인 남노성(南老星)은 김상용의 외손자로 인조효종현종 때 개성유수와 도승지를 거쳐 예조참판에 이르렀던 사람이므로 사대부의 후예임이 분명하다. 첫 수는 서른여섯 명의 유학자의 뒤를 이어 자신도 거기에 들어보고 싶은 소망을 표현한 것이고, 둘째 수는 봄날의 전원풍경을 즐기는 흥취를 드러낸 것이다. 마지막 수는 유학의 가르침을 음미하고 사색하는 기쁨을 읊은 것이라 하겠다.

첫 수의 초장에서 삼십육궁이라는 말은 한나라 때 지은 많은 궁궐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아마도 서른여섯 유선(儒仙)을 뜻하는 것일 게다. 그래야 문맥이 통하기 때문이다. 복희로부터 시작하여 문왕과 무왕, 주공을 거쳐 공자와 맹자는 물론이고 정호, 정이, 주희와 왕양명에 이르기까지 모두 서른여섯 명의 중국의 유교적 정신문화를 이끈 사람들을 삼십육유선(三十六儒仙)이라고 하는데, 이를 궁궐에 비유하여 삼십육궁이라 한 것이다. 이 궁궐을 중국 고대 전설상의 왕인 복희씨가 처음 짓고 거기에 문왕과 공자가 들었다고 하여 유교적 문화를 집대성했음을 말했다. 문왕공자를 문선왕(文宣王)으로 추앙된 공자라고 볼 수도 있다. 중장에서 이름 없는 사람, 또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 만물의 시초라고 한 노자가 새로운 학설로 그 문화를 다시 해석한 후에 아직 빈집으로 남아있다고 했다. 종장에서 이러한 여러 이론을 자신이 다시 손질하여 보겠다고 했다. 학문적 포부라고 할까 허황한 꿈이라고 할까 아무튼 자신도 큰 학문적 성취를 해보고 싶다는 소망을 드러낸 것이라고 하겠다.

둘째 수는 봄비 그친 후의 전원풍경에 취하여 술 마시며 이상향을 꿈꾸는 흥취를 읊은 것이다. 봄날의 냇가와 도화 뜬 무릉 등은 이미 관습적으로 사용된 이미지이고 상투어의 나열이다. 마지막 수는 한가한 마음에서 우주의 근원이라는 무극을 생각했는데, 그것을 밝히려고 하늘 끝 달이 숨은 곳까지 뒤졌다는 것이다. 자신의 사색을 비유와 이미지로 제시한 점이 재미있다. 그리하여 유교에서 말하듯이 무극에서 태극이 생겨나고, 태극에서 음양이 생겨나 만물이 마치 솔개가 날고 고기가 뛰놀 듯이 자연의 이법 안에서 운행한다는 진리를 깨우쳤다는 것이다. 그로서는 오묘한 깨우침이기에 혼자 느끼는 그윽한 흥취를 누를 길 없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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