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장붕익의 시

김영도 2018. 12. 17. 16:47

장붕익(張鵬翼, 1674-1735)은 숙종경종영조 때의 무신이다. 실록과 <국조인물고>에 의하면, 자는 운거(雲擧)이고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26(1699, 숙종25)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선천부사, 충청수사를 지내고, 43(1716, 숙종42)에 경상좌도병사가 되었다. 여주목사를 거쳐 46살에 춘천부사가 되었고, 경기수사, 포도대장이 되었으나, 50(1723, 경종3)에 신임사화의 여파로 종성에 유배되었다. 52(1725, 영조1)에 풀려나와 군기시 제조, 어영대장, 훈련대장, 동지의금부사, 형조참판 등을 지내고, 55살에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총관으로 왕을 호위했다. 포도대장, 한성부좌윤을 거쳐 진어대장이 되어 북한산성의 방어를 맡았다. 총융사가 되어 수원에 출동하여 도망하는 반란군 장수 이배(李培)를 잡아 난을 평정했다. 이듬해 한성판윤을 거쳐 57살에 훈련대장, 지의금부사가 되고, 다음해 공조판서, 훈련대장이 되었다. 59(1732, 영조8)에 한성판윤을 거쳐, 61살에 다시 훈련대장이 되었는데, 사람들이 시기하여 자객을 보내 죽이려 했으나 모면했다. 다시 형조판서가 되어 전선(戰船)의 개조를 헌책하는 등 국방대책에 힘썼다. 그는 거칠고 호탕했으나 호령이 엄하고 밝아서 사졸들의 마음을 얻었다.




나라가 태평(太平)이라 무신(武臣)을 버리시니

나 같은 영웅(英雄)은 북새(北塞)에 다 늙거다.

아마도 위국정충(爲國精忠)은 나뿐인가 하노라.




무신에 대한 홀대를 섭섭해 하면서도 나라에 대한 충성을 자부하는 작품이다. 젊은 날에 지은 것이거나 유배 시절에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그가 북관에 머문 것은 선천부사로 있을 때와 종성에 유배됐을 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자부심은 이인좌의 난에 세운 공적 때문은 아니고 본래 지닌 씩씩하고 호탕한 기질에서 연유하는 것이라 하겠다. 초장에서는 나라에 전란이 없어서 무신의 필요성을 잘 느끼지 못한다고 불평스런 속내를 내비쳤다. 중장에서는 자신처럼 씩씩한 무장이 북방의 변경에서 국경수비를 하느라 공적을 세우지도 못한 채 늙어간다고 한탄했다. 무장이야 전란이 나야 공적도 세우고 지위도 올라가서 부귀공명을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종장에서 그래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진정한 충신은 오직 자기뿐이라고 하여 만만치 않은 패기와 자부심을 과시하였다. 이런 패기와 자부심이 있었기에 갑자기 일어난 내란에 신속히 대응했고 반란군 장수를 붙잡는 전과를 올려 소원대로 부귀공명을 이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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