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권구의 시

김영도 2018. 12. 17. 16:45

권구(權榘, 1672-1749)는 숙종경종영조 때의 학자이다. <영조실록><영남인물고>에 의하면, 자는 방숙(方叔)이고 호는 병곡(屛谷)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이현일(李玄逸)의 문인으로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여, 천문, 복서(卜筮), 병가(兵家) 등에 통달했다. 향리에 사창(社倉)을 열어 빈민을 구제하고 향약을 실시하여 교도했다. 57(1728, 영조4)에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영남에 파견된 안무사 박사수(朴師洙)가 그를 적당에 가담할 우려가 있고 반군 토벌을 의논하는 자리에 늦게 나왔다고 서울로 압송했으나 임금이 석방했다.




부귀(富貴)라 구()치 말고 빈천(貧賤)이라 염()치 마라.

인생백년(人生百年)이 한가(閑暇)할사 사니 이내 것이

백구(白鷗)야 날지 마라 너와 망기(忘機) 하오리라.




천심절벽(千尋絶壁) 섰는 아래 일대장강(一帶長江) 흘러간다.

백구(白鷗)로 벗을 삼아 어조생애(漁釣生涯) 늙어가니

두어라 세간소식(世間消息) 나는 몰라 하노라.




보리밥 파 생채(生菜)를 양 맞춰 먹은 후에

모재(茅齋)를 다시 쓸고 북창하(北窓下)에 누웠으니

눈앞에 태공부운(太空浮雲)이 오락가락 하놋다.




공산리(空山裡)에 저 가는 달에 혼자 우는 저 두견(杜鵑).

낙화광풍(落花狂風)에 어느 가지 의지하리.

백조(百鳥)야 한()하지 마라 내곳 설워하노라.


저 까마귀 짖지 마라 이 까마귀 쫓지 마라.

야림한연(野林寒烟)에 날은조차 저물거늘

어여쁠사 편편고봉(翩翩孤鳳)이 갈 바 없어 하놋다.




서산(西山)에 해 져 간다 고기배 떴단 말가.

죽간(竹竿)을 둘러 메고 십리장사(十里長沙) 내려가니

연화수삼어촌(烟花數三漁村)이 무릉(武陵)인가 하노라.


이 작품은 병산육곡(屛山六曲)’ 여섯 수로 전원생활의 즐거움과 자신의 심중을 담은 것이다. 처음 세 수는 자연 속에 동화되어 사는 즐거움을 읊은 것이고, 넷째와 다섯째 수는 자신의 괴롭고 외로운 심사를 표현한 것이다. 마지막 수는 다시 강호에 사는 즐거움을 읊었다.

병산육곡의 첫 수는 부귀와 빈천에 대한 생각, 곧 세속적 가치를 버리고 한가하게 전원에 살면서 흰 갈매기와 더불어 기심(機心) 즉 기회를 엿보는 마음을 버린 상태를 표현하였다. 자연과 하나가 된 경지를 읊은 것이다. 둘째 수는 절벽과 긴 강물을 배경으로 흰 갈매기를 벗삼아 늙어가는 어부의 생활이 바로 자신의 일상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가어옹(假漁翁)의 세계다. 어부는 아니지만 어부인 체 자연을 즐기면서 살아가는 문인의 이상적 세계다. 그러니 세속에서 벌어지는 번거로운 소식은 듣고 싶지 않은 것이다. 셋째 수는 가난하지만 욕심 없이 사는 시골 생활을 읊은 것으로, 거친 음식을 먹고 누추한 집에 살지만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 같은 헛된 욕망을 버린 담백한 심성과 소박한 생활을 그려내었다.

넷째 수에서는 달밤에 산 속에서 혼자 우는 두견새를 불러서 바람 속에 의지할 곳 없는 신세를 자신이 서러워해 준다고 하였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안무사 박사수가 그를 이인좌와 내통했을 것이라 의심하여 한양으로 압송했다가, 이인좌가 그를 찾아와 복서(卜筮)를 배우겠다는 것을 말려 돌려보낸 일 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고, 영조가 그를 풀어주었던 사건을 두고 말함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두견은 자신의 투영이다. 미친 바람에 휘말려 의지할 데 없이 시달렸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 것이다. 뭇 새들도 이런 두견의 처지를 한탄한다 했으니 자신을 동정했던 많은 선비들의 우의를 생각한 말이리라. 다섯째 수는 그 사건에 대하여 여러 사람들이 말들이 많았음을 드러낸다. 봉황같이 고고하게 살아온 자신을 이 까마귀 저 까마귀가 춥고 저문 날에 짖어대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그런 말들에 대꾸하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까마귀를 쫓지 말라고 했다. 그렇지만 이런 사건에 연루된 자신은 외로운 봉황새처럼 처신하기가 어렵다고 하여 황망한 처지를 드러내었다.

마지막 수는 다시 마음을 추슬러서 전원생활의 평화로움으로 돌아왔음을 보여준다. 서산에 해가 뉘엿뉘엿할 때 고기배를 타고서 긴 모래강변을 따라 흘러내려 가면서 낚시를 드리우고 연변의 안개 서린 어촌을 감상하는 가어옹으로 돌아간 것이다. 세속의 시비로부터 해방된 자연몰입의 세계가 그에게는 이상적 전원생활을 즐기는 무릉(武陵)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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