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신정하의 시

김영도 2018. 12. 17. 16:43

신정하(申靖夏, 1680-1715)는 숙종 때의 문신이다. 실록과 <국조방목>에 의하면, 그의 자는 정보(正甫)이고 호는 서암(恕菴)이며 본관은 평산으로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이다. 26(1705, 숙종31)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설서가 되었다. 32살에 정언을 거쳐, 34살에 수찬, 사서 등을 역임했다. 35(1714, 숙종40)에 헌납이 되고, 이듬해 부교리를 거쳐 다음해 다시 헌납이 되었다. 이 때 유상기(兪相基)가 조부 유계(兪棨)와 윤증이 편찬한 <가례원류>를 발간했는데, 권상하(權尙夏)와 정호(鄭澔)가 서문과 발문에서, 윤증(尹拯)이 스승 송시열을 배반했다고 비난하자, 윤증과 유계의 제자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그는 아버지 신완(申琓)이 윤증의 제자였으므로 윤증을 옹호했으나, 노론을 격렬히 비난한 이진유(李眞儒)의 상소를 받아들인 임금의 처분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되어, 임금이 송시열을 옹호하고 윤증을 비난하여 소론을 축출한 병신처분이 있기 전에 죽었다.




간사(諫死)한 박파주(朴坡州)야 죽으라 설워마라.

삼백년(三百年) 강상(綱常)을 네 혼자 붙들었다.

우리의 성군(聖君) 불원복(不遠復)이 네 죽긴가 하노라.




벼슬이 귀()타 한들 이내 몸에 비길소냐.

건려(蹇驢)를 바삐 몰아 고산(故山)으로 돌아오니

어디서 급한 비 한 줄기에 출진행장(出塵行裝) 씻었구나.

 



전산(前山) 작야우(昨夜雨)에 가득한 추기(秋氣)로다.

두화전(豆花田) 관솔불에 밤 호밋 빛이로다.

아이야 뒷내 통발에 고기 흘러 날세라.




첫 수는 박태보(朴泰輔)가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죽은 일을 읊은 것이고, 둘째 수는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온 감회를 표현한 것이다. 셋째 수는 고향에서 가을밤을 지내는 모습을 담은 것이다. 원칙을 투철하게 지키려는 열정과 고향에서 한가하게 지내려는 상반된 소망이 아울러 드러난다.

첫 수의 초장은 파주목사를 지낸 박태보가 인현왕후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하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귀양길에서 죽은 일을 상기시켰다. 중장에서 박태보의 행동은 조선이 건국된 이후 인간의 도리인 삼강오륜을 혼자 지켜냈다고 한껏 찬양했다. 종장에서 다시 한번 그 충간의 의미를 강조했는데, 숙종이 멀지 않아 마음을 돌려서 민비를 복위시킨 것은 그가 충간으로 목숨을 바쳤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서인이었으므로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고 인현왕후 민씨가 폐위되는 것을 반대한 박태보의 간쟁(諫爭)에 의미부여를 했다. 사실 그는 김창협의 문인이어서 노론과 가까웠지만 아버지가 윤증의 제자였으므로 내면적인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가례원류>로 인한 분쟁에서 그는 윤증을 옹호했으면서도 소론인 이진유의 상소를 받아들인 숙종의 처분을 비난하고 나섰던 것이다.

둘째 수에서는 초장부터 벼슬에 대한 체념이 드러난다. 중장에는 자신의 처지를 다리를 저는 나귀에 객관화시키면서 중도에서 파직된 벼슬길의 실패가 심중에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종장에서 이제는 단념해야 될 것임을 알고 한 줄기 소나기가 속세의 먼지를 씻어버리듯 자신도 벼슬에 대한 미련을 끊을 것임을 다짐한다. 마지막 수는 시골 생활의 묘사다. 초장에는 지난 밤비에 앞산에 가을빛이 완연하다고 계절감을 일깨우고, 중장에서 밤에도 관솔불을 밝히고 가을걷이에 바쁜 농민의 생활을 보여준 다음, 종장에서 살찐 고기가 통발에 걸리는 가을의 풍요를 드러내서 전원의 바쁘지만 넉넉한 가을 풍경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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