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윤순의 시

김영도 2018. 12. 17. 16:41

윤순(尹淳, 1680-1741)은 숙종경종영조 때의 문신이며 서예가다. 실록과 <근역서화징>에 의하면, 그의 자는 중화(仲和)이고 호는 백하(白下), 학음(鶴陰) 등이며, 본관은 해평으로 윤두수의 5대손이다. 젊어서부터 글씨를 잘 썼으며, 33(1712, 숙종38)에 진사가 되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37살에 정언이 되었다. 42(1721, 경종1)에 교리가 되었으나 소론 김일경(金一鏡)의 배척으로 장단으로 돌아갔다. 44살에 사은사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45살에 집의, 사간이 되고, 영조 즉위 후에 승지를 거쳐 대사성, 부제학이 되었다. 48(1727, 영조3)에 대사헌, 제학을 거쳐, 이조참판으로 대제학을 겸하고, 이듬해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감호제군사(監護諸軍使)가 되었으며, 이조판서를 지낸 후,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다음해 공조판서, 형조판서, 우참찬이 되고, 51살에 예조판서, 좌참찬이 되었다. 53살에 함경감사가 되었다가, 이듬해 좌참찬을 지냈다. 56살에 원자보양관이 되었으나, 이듬해 고향 장단으로 돌아갔다. 58살에 판의금부사를 지냈으며, 이듬해 다시 좌참찬, 예조판서가 되었다. 60(1739, 영조15)에 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평안도 관찰사로 관내를 순찰하다가 벽동(碧潼)에서 죽었다. 정제두(鄭齊斗)의 문인으로 양명학을 공부하여 양심적 시정과 개혁을 주장했다. 사람됨이 깨끗하고 단아하였고, 서화로 이름이 났으며, 의술과 시문에도 능했다

  

내 집이 백학산중(白鶴山中) 날 찾을 이 뉘 있으리.

입아실자(入我室者) 청풍(淸風)이요 대아음자(對我飮者) 명월(明月)이라.

정반(庭畔)에 학배회(鶴徘徊)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이 시는 그가 잠깐 고향에 돌아갔을 때에 지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문재(文才)와 학식이 있어 여러 관직을 두루 맡았지만, 잠깐씩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 적이 있었다. 그때 이 작품을 지었을 것이다. 대제학을 두 번씩 맡았을 만큼 문장으로 이름났으므로 시조 속에도 한문구가 삽입되어 있다. 그는 성품이 청렴하여 벼슬에 연연하지 않았고 노론으로 당론을 굽히지 않아 탕평책에 참여치 않는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런 만큼 자신의 결백함을 지키려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시조에서도 고향에 돌아가 흰 학처럼 고결하게 살고 싶은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초장에서 자신의 거처가 백학산(白鶴山)에 있어 학과 더불어 사는 자신을 누가 찾겠느냐고 자신의 심중을 은근히 드러내고, 중장은 한문구이지만, 방에는 맑은 바람이요 함께 마시는 이는 밝은 달이라고 해서 한가롭고 고결한 삶을 보여준다. 그리고 종장에는 뜰에 서성거리는 학을 배치해서 자신이 학과 벗하고 있음을 표현했다. 자신의 재주와 맑은 뜻이 통하지 않으면 고향에 돌아와 한가롭고 고결하게 살겠다는 의지의 표출이다



'-조선시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권구의 시  (0) 2018.12.17
신정하의 시  (0) 2018.12.17
이정작의 시  (0) 2018.12.17
송질의 시  (0) 2018.12.17
이정소의 시  (0) 2018.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