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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강화도 탐방기(강화나들길 제6구간 화남생가 가는길18.8k 강화버스터미널~광성보)

김영도 2014. 9. 17. 12:57

1.위치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남산리 222 와 불은면 덕성리 833 일대

 

2.교통

(갈때)부평역정류장에서 90번 버스로 강화버스터미널에서 하차한다

(올때)광성보정류장에서 2번 버스로 초지진정류장 도착후 60-2번 버스로 환승후 솔터마을입구에서 다시 90번 버스로 환승후 부평역정류장에서 하차한다             

 

3.코스

 

 

 

4.상세설명

<선원사지>

사적 제259호. 지정면적 11.541㎡. 1976년 동국대학교 강화도학술조사단에 의하여 처음으로 조사되어 1977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선원사는 고려시대 때 몽고에 항쟁하기 위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직후인 1245년(고종 32), 최고통치자인 최우(崔瑀)가 대몽항쟁의 정신적 지주로 심혈을 다해 세웠던 사찰로서, 당시 송광사와 더불어 2대 선찰(禪刹)로 꼽혔으나 조선 초기에 폐허가 되었다.

절터는 강화읍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데, ≪동국여지승람≫의 “선원사의 옛터는 강화읍의 남쪽 8리에 있는데 지금은 장원서(掌苑署)의 과수원으로 되어 있다.”고 한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이곳 마을은 도감(都監)마을로 불리며 마을 전체가 절터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마을이 있는 산기슭에 3단의 축대가 조성되어 있어, 이곳이 절의 중심지역으로 추정된다.

1977년의 조사 때 절에서 보상화문전(寶相花文塼), 글자가 새겨진 암·수막새기와, 치미(鴟尾 : 용마루 끝에 있는 날짐승 꼬리모양의 장식기와)와 원숭이상 등 고려시대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 중 보상화문전은 중앙에 연꽃과 보상화문양이 섬세하고 화려하게 새겨져 있으며, 암·수막새 기와에는 ‘옴마니반메훔’이라는 범자(梵字)가 새겨져 있다. 또, 원숭이상은 지붕 위에 얹던 잡상(雜像)의 하나로 생각된다.

이 유물들 외에도 지정원년명(至正元年銘, 1314) 옥등(玉燈,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과 은입사동발(銀入絲銅鉢, 일본 소장), 노영(魯英)의 흑칠금니소병(黑漆金泥小屛, 130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 뛰어난 고려시대의 유품들이 전하고 있다.

현재 합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은 처음 이곳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을 조선시대에 흥천사(興天寺)로 옮겼다가 세조 때 다시 해인사로 옮긴 것이다.

<광성보>

강화 12진보 가운데 하나이다. 사적 제227호. 지정면적 6,102㎡. 1658년(효종 9)에 강화유수 서원이(徐元履)가 설치하였는데, 1679년(숙종 5)에 축조된 오두(鰲頭)·화도(花島)·광성 등 세 돈대(墩臺)와 1874년에 축조된 오두정포대를 관할하였다.

이곳은 1871년(고종 8)의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해에 통상을 요구하며 침입한 미국함대가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는 것을 광성·초지(草芝)·덕진(德津)·덕포(德浦) 포대에서 일제사격을 가하여 물리쳤으나, 4월 23일에 450명의 미국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하여 진을 점령하였다.

이튿날 미군이 북상하여 덕진진을 함락시키고 이어서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광성보를 지키던 중군(中軍) 어재연(魚在淵) 이하 전장병은 열세한 무기로 분전하다가 중상으로 기동이 어려운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다. 이때 성첩과 문루가 파괴된 것을 1976년에 복원하는 동시에 당시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과 어재연의 쌍충비각(雙忠碑閣)을 보수, 정비하였다.

 

5.탐방일자

2014.09.15(월)

 

6.글쓴이

김영도(010-8121-8041)

 

7.생생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