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김장생의 시

김영도 2020. 8. 19. 22:31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은 선조,광해,인조 때의 학자이고 문신이다. <선조,광해,인조실록>과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자는 희원(希元)이고 호는 사계(沙溪)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충청도 연산(連山) 사람이다. 송익필에게 예학을 배웠고, 이이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31살(1578,선조11년)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 동몽교관을 거쳐, 정산현감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조정랑으로 명나라 군사의 군량조달에 공을 세웠고, 군자감 첨정이 되었다. 50살에 단양군수, 남양부사를 역임하고, 52살에 안성군수가 되었다. 유성룡의 천거로  종친부 전부(典簿)가 되고, 청백리에 뽑혔다. 58살에 익산군수를 거쳐, 회양부사, 철원부사를 지내다가 계축옥사에 연루됐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인조반정 후 사헌부 장령이 되어 선조를 왕의 아버지, 친부를 숙부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균관 사업, 상의원정 등을 거쳐 이듬해 집의, 공조참의, 부호군을 지냈다. 다음해 동지중추부사, 행(行)호군이 되었다. 정묘호란 때에는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 군량미 조달에 힘쓰며 청나라와의 화의에 반대했다. 81살에 형조참판이 되었으나 사퇴하고 향리로 돌아가 교육에 힘썼다. 자질이 겸손 돈후하고 효도와 우애가 지극했으며 학문에 성실했는데, 예학을 깊이 연구하여 조선 예학의 태두가 되고 아들 집(集)에게 계승시켰다. 문하에 송시열, 송준길 등을 배출하여 기호학파를 이루게 했다. 

 

 대 심어 울을 삼고 솔 가꾸어 정자(亭子)로다.

 백운(白雲) 덮인 곳에 날 있는 줄 제 뉘 알리.

 정반(庭畔)에 학배회(鶴徘徊)하니 긔 벗인가 하노라.

 

 십년을 경영(經營)하여 초려삼간(草廬三間) 지어내니

 나 한간 달 한간에 청풍(淸風) 한간 맡겨 두고

 강산(江山)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그는 벼슬에 나서기보다 후학을 가르치기에 더 열심이었으므로 벼슬을 내놓고 여러 번 물러가거나 벼슬을 사양하였다. 따라서 위의 시조들은 벼슬에서 물러났을 때 지었을 것이다. 두 수 모두 전원에서 한가롭게 지내며 자연과 합일(合一)된 경지를 보여준다. 첫 수의 초장은 전원풍경의 제시다. 대로 울타리 하고 솔로 정자를 삼은 강호자연의 세계인데, 거기에 등장하는 송죽(松竹)은 군자의 덕과 절개를 상징하는 관념화된 실체다. 실제 사물이면서 동시에 관념을 드러내는 것이다. 중장은 자신이 백운이 덮인 곳에 있다고 하여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자연 속에서 초연히 산다고 하였다. 백운은 청운과 대조되는 말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자연 속에 한가로이 사는 것을 뜻한다. 종장에서 뜰에서 학이 배회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의 벗이라 하였으니 자신은 학과 더불어 노닐며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수는 송순(宋純)이 원시(原詩)를 지었다. 그러나 현전하는 이 작품은 김장생이 지은 것으로 전한다. 공간을 자유자재로 배분하는 솜씨가 아주 능란한데, 초장에서 십년을 노력해서 겨우 초가삼간을 마련했다고 하였다. 그가 실제로 이렇게 가난하지는 않았겠지만, 청백리에 뽑힐 만큼 청렴하였으므로 십년을 경영해서 초가삼간을 지었다는 말은 크게 과장은 아닐 것이다. 어쨌거나 이 시에는 허구성이 개재되어 있다고 보이므로 그 가공의 공간을 중장에서 이렇게 배분하였다. 한간은 실제적 공간으로 내가 쓰고, 나머지는 각각 달과 바람에게 한간씩 할당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적 언어로야 뜻이 성립되지 않지만, 청풍명월 곧 풍월(風月)을 즐기면서 운치 있게 사는 것의 비유적 표현이다. 종장에서 강산은 들일 데가 없어 둘러 두고 본다고 하였다. 얼마나 능란한 언어구사인가. 소동파의 <전적벽부(前赤壁賦)>에서 “강 위의 청풍과 산간의 명월은 그 소리와 빛을 보고 듣고 즐기어도 끝없이 무진장한 것이라”(惟江上之淸風 與山間之明月 耳得之而爲聲 目寓之而成色 取之無禁 用之不竭 是造物者之無盡藏也)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도 자연이 주는 그 무진장의 혜택을 초가삼간 둘레에 둘러놓고 즐기겠다는 것이다. 전원에서 자연과 하나가 되어 그것을 마음껏 즐기는 여유로운 생활을 그렸다. 그는 벼슬을 사양했음에도 불구하고 30대에서 80대까지 자주 조정에 불려나갔으니 때때로 전원으로 돌아와 이런 생활을 즐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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