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정진(奇正鎭, 1798-1876)은 순조․헌종․철종․고종 때의 성리학자다. <노사집(蘆沙集)>, <노백헌문집(老柏軒文集)>, <조선유학사> 등에 의하면, 그의 자는 대중(大中)이고 호는 노사(蘆沙)이며 본관은 행주(幸州)로 전북 순창 출신이다. 7살에 이미 경사(經史)에 통했고 유학에 전심하였다. 18살에 양친을 여의고 부친의 유언에 따라 장성으로 이주했다. 34살(1831, 순조31)에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이듬해 강릉(康陵)참봉, 3년 뒤 현릉참봉, 2년 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사옹원 주부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45살(1842, 헌종8)에 전설사(典設司) 별제로 임명되자 취임 6일 만에 칭병 사임하고 귀향했다. 얼마 후 평안도사, 60살(1857, 철종8)에 무장현감, 64살에 장령, 67살에 집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병인양요(1866, 고종3)가 일어나자 ‘육조소(六條疏)’를 올려 민족주체성을 확립하여 외침에 방비하자고 하였다. 그의 주장은 쇄국정책과 보조를 같이하였고 뒤에 나타난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조정에서 동부승지, 호조참의, 동지돈녕부사에 임명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다시 ‘병인소(丙寅疏)’를 올려 사대부의 청렴결백한 기풍을 확립하라는 ‘삼무사(三無私)’를 강조했다. 공조참판을 사양하고, 장성 하리 월송에 담대헌(澹對軒)을 짓고 문인과 교유했다. 그의 학문은 독자적 사색에 의해 이일분수(理一分殊)의 철학체계를 확립했다. 조선 유학을 대표하는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시조 1수가 전한다.
공명(功名)도 너 하여라 호걸(豪傑)도 나 싫어
문 닫으니 심산(深山)이요 책 펴니 사우(師友)로다.
오라는 데 없건마는 흥(興) 다하면 갈까 하노라.
이 작품에는 ‘동몽작가(冬夢作歌)’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겨울에 꿈을 꾸고 나서 지은 노래라는 뜻이다. 공명을 이루거나 세상을 호령하는 호걸을 바라지 않는다면서 산골에 묻혀 학문 연마에 일생을 바치겠다는 평생의 지향을 밝혔다. 초장에는 대화하는 어법으로 공명을 이루려고 하는 상대방에게 그리하라고 권하면서 자신은 호걸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현실에 참여하여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남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은 자신이 탐구하고자 하는 대상의 실체와 진실을 밝히는 데서 삶의 보람을 찾기에 부귀공명에 몸을 맡기거나 호협(豪俠)한 일에 정신을 팔 새가 없는 것이다. 물론 현실 참여와 학문 탐구를 함께 이룩하는 희귀한 예가 없는 바는 아니지만 그는 학문 탐구에만 전념하겠다고 했다. 중장에서 현실로부터 문을 닫으면 깊은 산에 든 것처럼 자신만의 세계가 펼쳐지고, 책을 펴면 그 속에서 성현과 사우(師友)를 만나게 된다고 했다. 즉 학문하는 자신만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종장에는 현실과 절연하였으니 오라는 데가 있을 리 없지만 자신이 혼자 취한 학문의 세계에 대한 흥이 다한다면 또 다른 세계를 찾아가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또 다른 분야의 학문인지, 자연산수를 이름인지, 아니면 이 세상을 하직하겠다는 뜻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는 벼슬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현실을 외면하지는 않았고 상소문으로 자기주장을 분명히 했으므로, 허화(虛華)로운 공명보다는 조용히 학문하는 생활을 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