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효관(朴孝寬, 1800-1882?)은 헌종․철종․고종 때의 가객(歌客)이다. <한국시가사강>, <한국전통음악의 연구>, <금옥총부(金玉叢部)>등에 의하면, 그의 자는 경화(景華)이고 호는 운애(雲崖)이다. 가곡(歌曲)의 명인 장우벽(張友璧)의 법통을 오동래(吳東萊)를 통하여 계승받은 명인으로서, 일생을 가무연락(歌舞宴樂)에 종사하였다. 1876년(고종13)에 16살 연하의 제자 안민영(安玟英)과 함께 3대 가집의 하나인 <가곡원류(歌曲源流)>를 편찬하여 그때까지의 가곡을 총 정리하였고 가론(歌論)을 확립하였으며, 가곡 창(唱)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시하였다. 남달리 대원군의 총애를 받아 운애라는 호를 하사받았고 이재면(李載冕)의 두호를 받았다. 풍류남녀들의 우대를 받고 그를 중심으로 승평계(昇平契)와 노인계를 만들었다. 68살(1867,고종4)되던 봄에 안민영이 스승을 모시고 친구들과 기생을 데리고 남한산성과 한강에서 사흘 동안 놀았다. 71살(1870,고종7) 겨울에 안민영과 기생들이 모시고 산방에서 노닐 때, 매화가 반개하여 안민영이 매화사 8수를 지었다. 77살 7월에 필운대(弼雲坮) 산방에서 안민영의 ‘주옹만영(周翁漫詠)’에 서문을 써주었다. 81살 가을에 남녀 풍류객을 산정에 모아 단풍과 국화를 완상하는 잔치를 열었다. 그는 고상한 취미와 원만한 성품으로 평생 동안 시주가금(詩酒歌琴)을 벗 삼아 태평하게 살았다. 시조 14수가 <가곡원류>에 전한다.
공산(空山)에 우는 접동 너는 어이 우짖는다.
너도 날과 같이 무슨 이별하였느냐.
아무리 피나게 운들 대답이나 하더냐.
꿈에 왔던 님이 깨어보니 간 데 없네.
탐탐(耽耽)히 괴던 사랑 날 버리고 어디 간데.
꿈속이 허사(虛事)라망정 자로 뵈게 하여라.
님 그린 상사몽(相思夢)이 실솔(蟋蟀)의 넋이 되어
추야장(秋夜長) 깊은 밤에 님의 방에 들었다가
날 잊고 깊이 든 잠을 깨워 볼까 하노라.
님이 가오실 적에 날은 어이 두고 간고.
양연(良緣)이 유수(有數)하여 두고 갈 법(法)은 하거니와
옥황(玉皇)께 소지원정(所志原情)하여 다시 오게 하시소.
어와 내 일이여 나도 내 일을 모를노라.
우리 님 가오실 제 가지 못하게 못할런가.
보내고 길고 긴 세월에 살뜬 생각 어이료.
남녀의 사랑과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것을 모았다. 첫 수는 이별의 정한을 접동새의 울음에 객관화시킨 것이다. 접동새는 전설상 촉(蜀)나라 망제(望帝) 두우(杜宇)의 화신이라고 전하는 두견새다. 왕위를 잃고 애타게 우는 망제의 혼이 두견새에 씌었다는데, 망제가 왕위를 잃은 것이나 시인이 님을 이별한 것이나 모두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을 호소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이렇게 피나게 울어도 그 사정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더욱 섧다고 했다. 남녀이별을 과장해서 드러낸 것이다. 둘째 수는 꿈속에서 만난 님을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꿈에서 만났던 님이 꿈을 깨니 간 곳이 없다. 꿈이 허사이긴 하지만 꿈에서라도 자주 님을 만나고 싶다는 그리움의 토로이다. 셋째 수는 님을 그리워하는 정을 귀뚜라미에 투영하였다. 상사몽(相思夢)이 귀뚜라미의 넋으로 변하여 길고긴 가을밤에 님의 방에 들어가 구슬피 울어서 그리는 정을 하소연해 보겠다는 것이다. 님을 그리는 애달픈 연정이다. 넷째 수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님을 다시 돌아오라고 애원하는 내용이다. 님이 떠날 때에 자신은 왜 두고 갔느냐고 원망하고, 좋은 인연이 적어서 두고 갔다고 한다면 옥황상제에게 마음먹은 바를 하소연하여 다시 돌아오라고 간청하였다. 마지막 수는 님을 보내고 자탄하는 것이다. 님이 자신을 버리고 떠나갈 때 못 가게 막아야 했는데, 보내고 나서 그리워하는 애타는 심정을 어찌하겠느냐고 탄식하고 있다. 그는 창곡(唱曲)으로 많은 잔치에서 기생들과 사귀었을 것이므로 정든 기생과 이별하는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주수구방(周雖舊邦)이나 기명(其命)이 유신(維新)이라.
수천지조명(受天之詔命)하사 포덕선화(布德宣化) 하오시니
다시금 아동방생령(我東方生靈)이 희호세(熙皥世)를 보리로다.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이 사교재(四敎齋)에 드리오셔
우리 님 수부귀(壽富貴)를 강녕(康寧)으로 도우셔든
우리도 덕음(德蔭)을 무르와 태평연락(太平燕樂) 하노라.
문왕자(文王子) 무왕제(武王弟)로 부귀쌍전(富貴雙全)하신 주공(周公)
악발(握髮) 토포(吐哺)하사 애하경근(愛下敬謹)하셨거든
어찌타 후세불초(後世不肖)는 교사자존(驕奢自尊)하는고.
뉘라서 까마귀를 검고 흉(凶)타 하였던고.
반포보은(反哺報恩)이 긔 아니 아름다운가.
사람이 저 새만 못함을 못내 슬퍼하노라.
송축하고 경계하는 뜻을 담은 작품을 골랐다. 그는 <가곡원류> 발문(跋文)에서 말하기를, 노래는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기상에서 나온 것으로 상하의 백성들이 짓고 노래하여 뜻을 말하고 정을 폈으니, 시경의 부비흥(賦比興)이나 풍아송(風雅頌)과 다를 바 없으며, 음악의 청탁고저(淸濁高低)는 사람을 감동케 하므로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소리도 바르지 않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가보(歌譜)를 만들어 고조장단의 표준을 마련하고 바른 소리[正音]을 세우려 한다고 했다. 시조는 백성의 소리이고 그것을 바른 마음으로 노래해야 감동을 준다는 말이다. 위의 작품들은 그런 정신으로 당대의 왕권을 송축하고 또 경계한 것이라 하겠다. 첫 수는 고종의 등극을 축도한 것으로 <시경> 대아(大雅) 문왕지십(文王之什)을 인용한 것이다. 주나라가 비록 옛 나라이나 그 천명은 새롭듯이, 이제 조선도 밝은 천명을 받아서 하늘의 덕을 받들어 널리 세상에 펴시니 우리 동방의 백성들이 화락한 세상을 볼 것이라는 뜻이다. 둘째 수는 고종의 수복강녕(壽福康寧)을 비는 내용이다. 수명을 관장하는 남극노인성이, 공자의 네 가지 가르침인 문행충신(文行忠信)을 명심하라는 편액을 건 서재에 비취어 임금의 부귀강녕을 도우고 있으므로 백성들도 이 복을 입어 태평성대를 즐길 것이라고 찬양하였다. 그는 대원군과 이재면의 총애와 비호를 받았으므로 임금에 대한 이런 송축가를 올렸을 것이고, 또한 <시경>의 바른 소리를 재현한다는 자부도 가졌을 것이다. 셋째 수는 어린 성왕(成王)을 도와 섭정한 주공의 예를 들어, 어린 고종을 도와 섭정하는 대원군에 대하여 경계(警戒)의 뜻을 담은 것이다. 문왕의 아들이고 무왕의 동생인 주공이 성왕을 도와 섭정할 때에 어진 사람이 방문하면 머리를 감다가 세 번이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나가 맞으며, 밥을 먹다가 세 번이나 밥을 뱉고 나가 맞이할 정도로 아랫사람을 공손하게 존중하고 사랑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후세의 불초한 사람들은 교만하고 사치하며 스스로를 높여서 주공의 덕을 본받지 못했으니 이를 조심하라는 뜻이다. 마지막 수는 까마귀의 효도하는 정신을 본받자는 내용이다. 까마귀가 검어서 흉하다고 하지 말고, 까마귀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가 은혜를 갚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우냐면서 사람도 이를 본받아 효도를 행하자고 권계하였다.
춘풍(春風) 화후(和煦) 호시절(好時節)에 범나비 몸이 되어
백화총리(百花叢裏)에 향기 젖어 노닐거니
세상에 이러한 호흥(豪興)을 그 무엇으로 비할쏘냐.
세월이 유수(流水)로다 어느덧에 또 봄일세.
구포(舊圃)에 신채(新菜) 나고 고목(古木)에 명화(名花)로다.
아이야 새 술 많이 두어스라 새 봄 놀이하리라.
동군(東君)이 돌아오니 만물(萬物)이 개자락(皆自樂)을
초목(草木) 곤충(昆虫)들은 해해마다 회생(回生)커늘
사람은 어인 연고(緣故)로 귀불귀(歸不歸)를 하는고.
폐일운(蔽日雲) 쓰러치고 희호세(熙皞世)를 보렸더니
닫는 말 서서 늙고 드는 칼도 보미 꼈다.
갈수록 백발이 재촉하니 불승강개(不勝慷慨) 하여라.
서리 치고 별 성긴 제 울며 가는 저 기럭아.
네 길이 긔 얼마나 바빠 밤길조차 예는 것가.
강남(江南)에 기약(期約)을 두었으매 늦게 갈까 두렵다.
잔치의 흥겨움과 인생의 허망함을 읊은 작품을 골랐다. 첫 수는 봄날에 기생들을 데리고 가무연락(歌舞宴樂)하는 즐거움을 읊은 것이다. 봄바람 불고 화창한 좋은 시절에 범나비처럼 온갖 꽃떨기 속에 노니니 이런 호쾌한 흥취를 어디에다 비교하겠느냐고 하여 풍류객다운 기분을 표현하였다. 둘째 수는 노년에 새 봄을 맞아 취흥으로 즐기려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세월이 물처럼 흘러 어느덧 노년이지만 또 봄이 왔다. 마치 묵은 밭에 새 나물이 돋아나고 늙은 나무에 이름난 꽃이 피어나듯 늙은 시인도 봄의 활기를 되찾는다. 그래서 아이를 불러 술을 마련하여 봄놀이를 하겠다는 것이다. 머지않아 죽음이 찾아올 노년이지만 해마다 돌아오는 봄은 새로운 힘을 주듯 반가울 것이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는 늙음에 대한 씁쓸한 절망이 도사리고 있기도 할 것이다. 셋째 수는 봄을 맞아 회생하지 못하는 노년의 절망을 읊은 것이다. 봄의 신인 동군(東君) 곧 햇볕이 돌아와 만물이 회생의 즐거움을 누리고, 초목과 곤충은 되살아나는데, 사람은 어째서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를 못하느냐고 인생의 일회성(一回性)을 애달파하였다. 넷째 수에서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이루지 못하고 늙어감을 아쉬워하였다. 해를 가리는 구름 같은 간신들을 쓸어버리고 백성이 화락한 태평성세를 만들어 보고 싶었지만 달리던 말은 선 채로 늙어지고 잘 들던 칼도 이제는 녹이 슬었다. 즉 성세를 이루기 위한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한 채 늙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울분을 참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그가 겉으로는 근심 없이 태평스럽게 지내는 무수태평옹(無愁太平翁)이었지만 속으로는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것에 대한 울분을 감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 수는 흘러가는 인생의 비애를 기러기에 부쳐 읊은 것이다. 서리 내리고 별이 성긴 가을밤에 남쪽으로 가는 기러기를 등장시켜 인생의 쓸쓸한 분위기를 설정하고, 무엇이 그리 바빠서 밤길을 가느냐고 물어서 인생길이 바삐 지나갔음을 아쉬워하였다. 그리고 기러기는 남쪽에 빨리 가야할 기약이 있으므로 서두르겠지만 노년의 자신은 서두르지 않아도 이미 종말에 이르렀음을 서글퍼했다. 인생이라는 흥겨운 잔치가 끝나고 허망한 끝자리에 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