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덕붕(池德鵬, 1804-1872)은 순조․헌종․철종․고종 때의 문인으로, 자는 군거(君擧)이고 호는 상산(商山)이며, 그의 문집인 상산집(商山集)에 시조 13수가 전한다.
사람이 생겨나서 배우지 않으면은
어두운 밤길을 걷는 같다 하였으니
어화 저 소년들아 배우기에 힘쓸지라.
까마귀 검다 한들 속까지 검을쏘냐.
자오반포(慈烏反哺)라 하니 새 중에 효자로다.
사람이 그 안 같으면 까마귀엔들 비하리.
강가에 버들가지 천만사(千萬絲) 늘어져도
벗님 이별할 제 마침 한 가지를 꺾이더니
지금은 다 모지라져서 그를 슬퍼하노라.
빚어 둔 술을 차고 높은 재를 올라서니
상풍(霜風)이 소삽(蕭颯)한데 홍엽(紅葉)도 좋거니와
선방(仙尨)이 백운(白雲)을 짖으니 게도 은자(隱者) 있으리.
산아(山阿)에 꽃이 피니 붉은 내 끼어 있고
강안(江岸)에 유수(柳垂)하니 푸른 발 치어 있다.
이 중에 애춘광(愛春光)하는 맘은 늙을 뉘를 몰라라.
교훈을 직설적으로 말한 것과 사물에서 감흥을 일으킨 것, 그리고 자연 속에 노니는 즐거움을 노래한 것 등을 뽑았다. 첫 수는 <명심보감(明心寶鑑)> 근학편(勤學篇)에 있는 “태공이 말하기를,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아주 어두운 밤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라. (太公曰 人生不學 如冥冥夜行)”라는 말을 따와서 소년들에게 배우기를 권장하는 것이다. 둘째 수는 옛사람들이 까마귀가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어 효도한다고 생각했는데, 까마귀를 보고 효도하는 마음을 본받으라는 감흥을 일으킨 것이다. 까마귀가 겉은 검어도 속은 그렇지 않다는 것과 반포보은을 한다는 것은 많은 선배 시인들이 읊은 바 있지만, 여기서는 두 가지 뜻을 종합했다. 자오(慈烏)는 까마귀이고 반포(反哺)는 먹이를 물어와 은혜를 갚는다는 뜻이다. 셋째 수에는 버드나무를 보고 이별의 슬픔이라는 감흥을 일으켰다. 버드나무는 꺾어 심어도 어디에나 잘 살므로 이별할 때 꺾어 주었고, 한시에서는 버드나무를 이별의 상관물로 자주 사용하였다. 여기서도 그러한 시적 관습을 살려 이별의 정한을 표현하였다. 넷째 수는 자연 속에 노니는 즐거움을 읊은 것이다. 술을 가지고 높은 재에 올라 싸늘한 서리 바람 속에서 단풍을 구경한다. 거기에도 자연에 묻혀 사는 은자가 있는지 삽살개가 흰 구름을 보고 짓는다고 하여 속세를 떠나 산에 오른 초탈적(超脫的) 기분을 드러내었다. 마지막 수에는 은유적 표현이 신선하다. 산언덕에 핀 꽃은 붉은 안개이고, 강가에 늘어진 버들은 푸른 발이다. 사실적이고 시각적인 이미지를 이용하여 봄의 산수를 실감나게 그려놓았다. 이런 풍경을 사랑하는 자신은 늙을 사이가 없을 만큼 즐겁다는 것이다.
산하(山下)에 여름이요 산상(山上)에 봄이로다.
사월(四月)에 꽃이 피고 접동이 낮에 우니
더욱더 복거(卜居)한 곳 깊은 줄을 알리라.
갈건(葛巾)을 젓겨 쓰고 죽리(竹裏)에 홀로 앉아
냉랭(冷冷) 칠현금(七絃琴)을 한가히 짚었으니
산새도 지음(知音)하는지 오락가락 하더라.
수목(樹木)이 참치(參差)하니 낮 아니 어두울까.
석경창태(石逕蒼苔)에는 미록(麋鹿) 자취뿐이러니
이 중에 탄금(彈琴)하는 뜻을 뉘 있어 알리오.
아이야 속객(俗客)이 있어 나를 찾아오거들랑
선생(先生)이 표연(飄然)하게 채지(採芝)하러 나갔으나
상산(商山)에 구름이 깊어 곳 모른다 하여라.
초당(草堂)에 늦잠 깨어 문외(門外)로 나가 보니
굽어 도는 청계수(淸溪水)에 낙화(落花) 가득 떠 있어라.
아이야 아마도 도원(桃源)은 예 아닌가 하나니.
시인이 살고 있는 주변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작품들을 골랐다. 첫 수는 산골에 봄이 늦게 오므로 사월에 꽃이 피고 접동새가 낮에 운다. 그래서 시인이 살고 있는 곳이 깊은 산골인 줄 안다고 하였다. 세속을 벗어나 산골에 사는 사람의 분위기요 정취다. 둘째 수는 칡으로 만든 두건을 젖혀 쓰고 대밭에 앉아서 거문고를 연주하는 야인의 모습을 그렸다. 자연에 동화된 경지이므로 산새도 거문고 가락을 음미하는 듯 주위를 맴돈다고 하였다. 역시 초속적 은사의 주위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셋째 수도 앞의 시와 유사하다. 숲이 들쭉날쭉 우거졌는데 낮에도 어둡다. 돌길의 이끼에는 사슴이 지나간 자취뿐인데, 이런 자연 속에서 거문고를 즐기는 마음을 세속의 누가 알겠느냐고 하여 자신은 세속에서 벗어나 노닐고 있음을 표현하였다. 넷째 수에는 자신이 자연 속에 살므로 만약 속객이 찾아오면 상산(商山) 깊은 곳으로 지초(芝草)를 찾아 떠났다고 하라고 하여 신선인양 자연 속에 사는 모습을 그렸다. 이 작품은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가 지은 ‘도사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다[訪道者不遇]’의 “소나무 아래에서 동자에게 물으니 스승은 약을 캐러 나갔다고 말하네. 다만 이 산 속에 있겠지만 구름이 깊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구나.(松下問童子 言師採藥去 只在此山中 雲深不知處)”라는 작품의 의취를 살린 것이다. 마지막 수는 자신이 이상향과 같은 산수자연에 동화되어 산다는 자족감을 드러낸 것이다. 잠을 깨어 문밖에 나니 맑은 계곡물에 낙화가 떠 있다. 이것은 자신의 생활과 산수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려서 주변 상황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시인은 전설 속의 이상향인 무릉도원은 아니라고 했다. 도원은 아니지만 그에 비교될 만한 선경(仙境)이라는 자족감이 언외(言外)에 함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