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김천택의 시

김영도 2018. 4. 5. 20:18

 

김천택(金天澤)은 숙종경종영조 때의 시조작가 겸 가인(歌人)으로 생몰연대가 자세하지 않다. <청구영언><해동가요>, 그리고 <한국시가사강> 등에 의하면, 그의 자는 백함(伯涵) 또는 이숙(履叔)이고 호는 남파(南坡). 숙종 때 포교를 지냈다. 창곡과 음률에 뛰어났고, 시조도 잘 지어 평시조 71수가 전한다. 1727(영조3)에 시가집 <청구영언(靑丘永言)>을 편찬하였다. 정래교는 <청구영언> 서문에서 그를 평하여, “노래를 잘 불러서 나라에 이름이 났고, 성률(聲律)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문예에도 밝다고 했다. 마악노초(磨嶽老樵)도 발문(跋文)에서, “사람됨이 총명하고 유식하며 능히 <시경>을 알고 외어 한갓 가객이 아니었다.”고 하였다. 김수장(金壽長)<해동가요>에서 그의 시조를 취사선택하여, 그의 작품이 많지만 진실하고 순후하며 청렴하고 효충(孝忠)한 것은 취하고, 가볍고 맥락이 끊어지는 것은 버린다고 했다. 주의식, 김유기, 김성기, 김중려 등과 교유했으며,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을 조직하여 후배인 김수장과 함께 후진을 양성하고 시조의 정리와 발전에 공헌했다.




가을밤 채 긴 적에 님 생각이 더욱 깊다.

머귀 성긴 비에 남은 간장(肝腸) 다 썩노라.

아마도 박명(薄命)한 인생은 내 혼잔가 하노라.




요일월(堯日月) 순건곤(舜乾坤)은 예대로 있건마는

세상 인사는 어이 저리 달랐는고.

이 몸이 늦어 난 줄을 못내 슬퍼하노라.


천지번복(天地翻覆)하니 일월(日月)이 무광(無光)이로다.

황극전(皇極殿) 높은 집에 노선우(老單于) 앉단 말가.

어즈버 일부춘추(一部春秋)를 읽을 곳이 없어라.




섶 실은 천리마(千里馬)를 알아볼 이 뉘 있으리.

십년역상(十年櫪上)에 속절없이 다 늙거다.

어디서 살진 쇠양마는 외용지용하느니.


서검(書劍)을 못 이루고 쓸데없는 몸이 되어

오십춘광(五十春光)을 해옴 없이 지내언저

두어라 어느 곳 청산(靑山)이야 날 끨 줄이 있으랴.




  그의 시조를 현실에 대한 의식을 표출한 것과 자연이나 강호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 것으로 나누어서 감상해 보자. 먼저 현실에 대한 번민을 보여주는 작품 5수를 골랐다. 첫 수는 님 생각에 가슴 끓이는 것이고, 둘째 수는 평등했던 요순시절을 생각하며 지금의 처지를 슬퍼하는 것이다. 셋째 수는 오랑캐가 청나라를 일으켜 중국 한족의 정통성이 훼손된 데 대한 반감을 표현한 것이며, 넷째 수와 다섯째 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강개(慷慨)한 느낌을 드러낸 것이다.

  첫 수의 초장에서 가을밤이 아주 길어서 님 생각이 난다고 하고, 중장에서 오동나무 잎이 가을비에 지듯이 좌절감에 휩싸인다고 했다. 그리하여 종장에서는 기다리던 님이 올 수 없다는 절망으로 인해 외로운 운명을 탄식했다. 이 시를 개인적 정감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가 몹시 바라던 소망을 님으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바라던 바를 이룰 수 없었을 때의 절망감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둘째 수에서는 요순시절의 일월과 천지는 그대로인데 세상 사람의 일은 달라졌다고 하고, 자신이 늦게 난 것을 탄식하였다. 생각건대 평민으로 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 것으로 보인다. 요순시절에야 신분차별이 없었지만 자신의 시대에는 양반이 아니면 입신할 수 없는 신분적 장벽이 엄연했으니 말이다. 셋째 수의 초장은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한 것을 두고 천지가 뒤집히고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고 대유로 표현한 것이다. 중장에서 비유한 내용을 직서했는데, 황제의 대궐에 늙은 여진족의 추장이 좌정했다고 하였다. 종장에서 중국 한족의 역사인 춘추(春秋)를 이제는 들먹일 수 없게 되었다면서 청나라에 대한 폄하의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생각은 당시 사대부들이 지녔던 정신적 자세였는데, 그도 존명배청(尊明排淸)의 의식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수는 자신의 재능에 대한 자부와 불우한 처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것이다. 초장에서 자신을 땔나무를 실은 천리마에 비유하여 능력은 뛰어난데 포교로 다녔던 자신의 처지를 말하고, 중장에서 십년동안 마구간에 갇혀있듯이 하찮은 일에 매달려 청춘을 보냈다고 했다. 종장에서 재능도 없으면서 우줄거리는 양반들을 살찌고 둔한 말이라 하여 자신의 불만을 표출했다. 사람을 짐승에 비유한 우화적 수법이다. 마지막 수의 초장은 신세한탄의 직접토로다. 서검(書劍)은 문반과 무반의 대유다. 책을 읽거나 무술을 단련해서 입신할 수 없는 평민의 처지이니 쉰 살이 넘도록 이룬 게 없다고 탄식하고, 청산은 자신을 꺼리지 않을 것이라면서 자연 속에 은둔할 뜻을 비치고 있다. 이렇게 그는 현실의 부조리를 불만에 찬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다

             



고금(古今)에 어질기야 공부자(孔夫子)만 할까마는

철환천하(轍環天下)하여 목탁(木鐸)이 되었으니

나 같은 썩은 선비야 일러 무엇하리요.


알인욕(遏人慾) 존천리(存天理)는 추천(秋天)에 기상(氣象)이요

지언(知言) 양기(養氣)는 고금(古今)에 긔 뉘런고.

아마도 확전성소미발(擴前聖所未發)은 맹가(孟軻)신가 하노라.




혼음불성(昏飮不省)키는 양성(養性)함이 아니거니

중인(衆人)이 취()하여도 내 어이 혼자 깨리.

아마도 여세추이(與世推移)함이 긔 옳은가 하노라.




잘 가노라 닫지 말며 못 가노라 쉬지 말라.

부디 긏지 말고 촌음(寸陰)을 아껴스라.

가다가 중지(中止)곳 하면 아니 감만 못하니라.




  위에 인용한 작품들은 성현의 가르침을 본받아 심성수양을 하려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첫 수는 공자의 덕을 말한 것이고, 둘째 수는 맹자의 가르침을 정리한 것이다. 셋째 수에는 성현의 가르침과 시세의 흐름 속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넷째 수는 자신의 가치관을 확실한 어조로 교시하고 있다.

  그는 현실이 불만스러워도 유교적 가르침을 긍정하고 거기에 따르려고 노력한다. 첫 수는 공자를 찬양하고 그 가르침을 따르려는 자세를 읊은 것이다. 공자가 수레를 타고 여러 제후국을 돌아다니면서 난세에 처한 백성들을 가르쳤는데 자신은 보잘것없는 선비니 당연히 그 가르침을 따르리라는 말이다. 둘째 수는 유교의 중심사상을 맹자의 업적을 들어 말한 것이다. 초장에서 사람의 욕심을 억제하고 하늘의 이치를 보존하는 것이 유교의 기본 윤리로 그것은 마치 가을 하늘과 같은 맑은 기상이라고 했다. 중장에서 남의 말을 듣고 도리를 헤아리며 떳떳이 행하는 호연지기를 기르는 사람이 고금에 누구냐고 묻는다. 그리하여 종장에서 앞에 난 성인이 미처 다하지 못한 바를 확충한 사람이 맹자라고 규정했다. 이로보아 그가 유교의 가르침을 익히고 따르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수에는 그가 유교적 가르침을 배웠지만 세상의 추이를 무시할 수 없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초장에서 술을 많이 마셔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선한 본성을 기르는 길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중장에서 여러 사람이 취할 때 혼자 깨어 있을 수도 없다고 모순 되지만 고민스런 말을 했다. 유교적 원칙은 알지만 세상 형편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종장에서 세상의 변화에 따라 함께 가는 것이 옳다고 하여 자신의 행동 방향을 밝혔다. 점점 경직되어 가는 조선 후기 사대부의 관념 윤리에 따르기 보다는 생활의 다양한 활력을 찾아 변해가는 서민의 행동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고민과 자각이 담겨있다고 하겠다. 마지막 수에서 스스로의 고뇌와 깨우침에서 훌륭한 교훈시를 보여주는데, 중용을 지키면서 부지런히 자아수련에 임할 것을 말하고 있다. 잘 간다고 뛰지 말고 못 간다고 쉬지 말라는 것은 무엇을 하건 중용을 지키라는 뜻이며, 그치지 말고 짧은 시간도 아끼라고 해서 쉼 없이 노력하라고 했다. 하다가 중간에서 말면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 못하다고 하여 초지일관으로 자아수양에 나아갈 것을 말했다. 평이하지만 함축 있는 교훈시라 하겠다

   



어화 왕소군(王昭君)이여 생각건대 가련할사.

한궁장(漢宮粧) 호지첩(胡地妾)에 박명(薄命)함도 그지없다.

지금에 사류청총(死留靑塚)을 못내 슬퍼하노라.


악붕거(岳鵬擧)의 일생간담(一生肝膽)이 썩지 아닌 충효(忠孝)로다.

배상사자(背上四字)는 무엇이라 하였던고.

남지상(南枝上) 일편송일(一片宋日)이 경경단충(耿耿丹衷)에 비치었다.


북비하(北扉下) 저문 날에 어여쁠손 문천상(文天祥)이여.

팔년(八年) 연상(燕霜)에 검던 머리 다 희거다.

지금에 종용취사(從容就死)를 못내 슬퍼하노라.


옥하관(玉河關) 저문 날에 어여쁠손 삼학사(三學士).

충혼(忠魂) 의백(義魄)이 어드러로 간 거이고.

아마도 만고강상(萬古綱常)을 네 붙든가 하노라.




  위의 네 수는 불행한 운명이나 국가의 위기 앞에서 눈물짓거나 투쟁했던 인물들을 회고하여 비극적 운명에 대한 자신의 감회를 드러낸 것이다. 첫 수는 왕소군의 불행한 운명을 읊었고, 둘째 수와 셋째 수는 송나라의 충신인 악비와 문천상의 충성을 표현하였다. 넷째 수는 병자호란에 충절을 지키다가 죽은 삼학사를 추모하였다.

  첫 수는 한나라 원제(元帝) 때 오랑캐와 화친을 위해 공주를 시집보내게 되었는데, 왕소군이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화상을 예쁘게 그리지 않아서 공주를 대신해서 오손(烏孫)의 추장에게 시집을 갔다는 고사를 제재로 했다. 초장은 왕소군이 오랑캐에게 시집가게 된 것이 불쌍하다는 감상(感傷)이고, 중장은 그 까닭인데, 한나라 궁녀였다가 오랑캐의 첩이 되니 그 운명이 기박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종장에는 그녀의 무덤이 사막지대에서 푸른 풀이 나서 마치 고국을 그리워한 심정을 드러낸듯하니 더욱 슬프다고 했다. 둘째 수는 금나라와 싸우다가 화친을 주장하던 진회(秦檜)의 모함으로 죽은 남송의 충신 악비(岳飛)를 제재로 했다. 붕거(鵬擧)는 악비의 자(). 초장에서 악비는 어머니를 모시다가 금나라의 침략에 맞서 싸워 전공을 세웠으므로 충효의 간담이라고 감탄했다. 중장에서 임금 고종이 그의 충성을 기려서 정충악비(精忠岳飛)’라는 네 글자를 써 주었기에 그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진회의 모함으로 금나라 옥에 갇혀서 죽었으므로, 종장에서 남쪽가지 위의 한 조각 송나라 해가 그의 조국을 잊지 못한 애국심을 비추었다고 애달파하였다. 셋째 수는 남송 말에 원나라의 침입으로 송나라가 망할 때, 문천상이 8년 동안 원나라와 싸우다가 잡혀서 원나라 감옥에서 죽은 일을 소재로 하였다. 초장은 북쪽 사립문 곧 북쪽 오랑캐인 원나라 감옥에 갇힌 문천상을 불쌍타고 한 것이다. 중장은 8년 동안 싸우다 원나라에 잡혀 연경의 옥에 갇힌 일을 읊었고, 종장은 회유를 물리치고 조용히 죽음에 나아간 그의 의기를 슬퍼한 것이다. 넷째 수는 우리나라 인조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임금이 오랑캐에게 항복하자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다가 청나라 심양에 잡혀가 굴복하지 않고 죽은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홍익한(洪翼漢)의 의거를 소재로 했다. 초장에서 삼학사의 죽음을 애도했다. 옥하관(玉河館)은 북경에 있던, 조선 사신이 머무르던 곳인데, 삼학사는 심양에서 죽었으므로 이는 잘못인 듯하다. 중장은 그들의 충성과 의기로 가득 찬 얼과 넋은 어디로 갔느냐고 애통해 하였다. 종장에서 그들의 정신은 영원히 썩지 않을 윤리규범을 확고히 붙들었다고 했다. 이렇게 그는 불운과 비극 속에서도 의연히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간 사람들을 회고하여 자신도 그만한 충정이 있음을 드러내 보였다

  



주문(朱門)의 벗님네야 고차사마(高車駟馬) 좋다 마소.

토끼 죽은 후면 개마저 삶기느니

우리는 영욕(榮辱)을 모르니 두려운 일 없어라.




태산(泰山)에 올라앉아 천하(天下)를 두루 보니

세로(世路)가 다기(多岐)하여 어이 저리 머흔 게고.

완적(阮籍)이 이러함으로 궁도곡(窮途哭)을 하닷다.




공명(功名)이 긔 무엇고 욕()된 일 많으니라.

삼배주(三盃酒) 일곡금(一曲琴)으로 사업을 삼아두고

이 좋은 태평연월(太平烟月)에 이리저리 늙으리라.




깨면 다시 먹고 취하면 누웠으니

세상 영욕(榮辱)이 어떻든 동 내 몰라라.

평생에 취리건곤(醉裡乾坤)에 깰 날 없이 먹으리라.


장생(莊生)의 하는 일이 아마도 다사(多事)하다.

척안(斥鷃) 대붕(大鵬)을 비겨 무엇하렸던고.

두어라 물지부제(物之不齊)를 겨눌 줄이 있으랴.




  위의 다섯 수는 벼슬길의 어려움을 말하고 자신은 입신양명에 뜻을 버렸음을 밝힌 것이다. 첫 수에는 높은 벼슬아치에게 네 말이 끄는 좋은 수레를 타고 권세를 과시하지 말라고 했다. 왜냐하면 토끼사냥에 나갔던 사냥개는 사냥이 끝나면 삶기듯이 벼슬아치란 효용이 끝나면 폐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은 벼슬길에 나갈 수 없는 평민이니 영욕도 두려움도 없다는 것이다. 둘째 수는 태산에 올라가 세상을 보니 세상길이 갈래가 많고 험해서 진나라 완적이 막다른 길에서 울었다는 것이 실감난다고 했다.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어려움을 강조한 것이다. 셋째 수는 공명을 취하려 하면 거기에는 치욕스러운 일도 많으니 자신은 거기에 대한 욕망을 끊고 술 먹고 거문고 타며 편안한 마음으로 늙어가겠다는 결심을 말한 것이다. 신분의 장벽 때문에 느끼는 좌절감을 체념으로 극복하고 자신만의 즐거움을 찾겠다는 것이다. 넷째 수에서는 술에 취함으로써 신분장벽의 좌절감을 극복하려 한다. 매일 장취(長醉)로 세상의 영욕을 잊어버리겠다는 말이니 도피적 태도라 하겠다. 그리하여 마지막 수에는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서 하늘 높이 멀리 나는 대붕(大鵬)을 보고 못에 사는 작은 새가 저것은 어디 가지. 나는 이 덤불로도 충분한데.”라고 한 것을 두고, 두 처지를 비교한 것이 무익하다면서 사물은 그 처지가 같지 않다고 했다. 곧 자신이 여항에 처하여 술과 거문고로 낙을 삼는 것과 고관대작의 부귀영화를 비교함은 자신에게 있어 무익하다는 것이다. 삶은 누구에게나 한번 뿐이고 그 가치는 상대적 비교로 결정할 일이 아니라는 강한 자존심이 마음 바탕에 깔려 있다

  



기산(箕山)에 늙은 사람 귀는 어이 씻었던고.

박 소리 핑계하고 조장(操狀)이 가장 높다.

지금에 영수청파(穎水淸波)는 더러운 재 있느니.




인간(人間) 어느 일이 명() 밖에 생겼으리.

길흉화복(吉凶禍福)은 하늘에 부쳐두고

그 밖의 여남은 일으란 되는 대로 하리라.




부생(浮生)이 꿈이거늘 공명(功名)이 아랑곳가.

현우귀천(賢愚貴賤)도 죽은 후면 다 한가지라.

아마도 살아 한 잔 술이 즐거운가 하노라.




삼만육천일(三萬六千日)을 매양만 여기지 마소.

몽리(夢裡) 청춘(靑春)이 어느덧 지나느니

두어라 사시풍경(四時風景)에 취()코 놀까 하노라.


  그가 자연이나 은둔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살펴보자. 첫 수는 기산(箕山)에 숨어살았던 허유(許由)에게 요임금이 천하를 맡으라고 하자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며 영수(穎水) 물에 귀를 씻었고, 마침 소를 몰고 지나가던 소부(巢父)가 그 더러운 물을 소에게 먹일 수 없다며 상류로 끌고 갔다는 고사를 들어 천하에 왕 노릇 하기를 싫어한 허유의 지조가 높다고 찬양했다. 박 소리는 허유가 맨손으로 물을 떠 마시다가 어떤 사람이 표주박을 주어 그것으로 물을 마시고 나무에 걸어 두었더니 바람이 불어 그 소리가 시끄러워서 버렸다는 고사인데, 모든 인위적 편의를 거부하고 오직 자연과 더불어 살았음을 말한다. 지금도 영수의 맑은 물결이 더러운 채로 있느냐고 물어 자신이 허유의 원시적 생활을 동경하고 있음을 드러내었다. 둘째 수는 운명에 따라 하늘의 뜻대로 살겠다는 자연 의지에 대한 귀의를 밝힌다. 인간의 모든 일은 운명에 따라 벌어지는 것이니 길흉화복을 하느님의 뜻에 맡겨두고 되는 대로 살겠다는 무의지, 자연 방임의 뜻이요, 자연에 모든 것을 맡기는 태도다. 셋째 수에서도 인생은 뜬구름 같은 것이라며 공명에 관심이 없고, 잘나고 못나고 귀하고 천한 것도 모두 죽고 나면 마찬가지라면서 세상의 가치규범을 모두 부정해 버렸다. 이런 허무주의 속에서 한 잔 술이 유일한 위안이라고 말했다. 그의 좌절감이 부른 절망상태다. 마지막 수에서 사람이 백세를 산다고 치면 삼만 육천일인데, 그것도 꿈속 같이 어느덧 허망하게 지나가 버리는 것이니, 이러한 인생의 허망함을 달래기 위해서 네 철의 풍경을 즐기며 놀겠다고 했다. 인생에 대한 좌절감과 허망함을 넘어 술과 유람에서 위안을 찾고 있다고 하겠다.

 

백구(白鷗)야 놀라지 마라 너 잡을 내 아니로다.

성상(聖上)이 버리시니 갈 곳 없어 예 왔노라.

이제는 찾을 이 없으니 너를 좇아 놀리라.




강산(江山) 좋은 경()을 힘센 이 다툴 양이면

내 힘과 내 분()으로 어이하여 얻을 소니.

진실로 금할 이 없을새 나도 두고 노니노라.

 

색거한처(索居閑處) 깊은 골에 찾아올 이 뉘 있으리.

화경(花徑)도 쓸 이 없고 봉문(蓬門)을 닫았는데

다만지 날과 유신(有信)키는 명월청풍(明月淸風) 뿐이로다.

 

세사(世事)를 다 떨치고 강호(江湖)로 들어가니

수광산색(水光山色)이 옛 낯을 다시 본 듯

어즈버 평생몽상(平生夢想)이 오라 하여 그렇닷다.

 

세상이 번우(煩憂)하니 강호(江湖)로나 가자스라.

무심(無心)한 백구(白鷗)야 오라하며 가라하랴.

아마도 다툴 이 없음은 다만 인가 하노라.




  그가 자연을 찾아 노니는 정경을 읊은 시조들이다. 이른바 강호가도(江湖歌道)의 노래다. 전대 선비들의 강호가도는 벼슬을 버리고 명철보신하고자 하는 것이었지만, 그의 강호가도는 벼슬의 길이 신분장벽으로 막혀 있어서 현실에 대한 좌절감을 잊고자 자연에 노닌다는 점에서 선비들의 그것과 차이가 난다. 첫 수는 조정에서 자신을 써주지 않아서 자연과 더불어 살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백구(白鷗)는 물론 자연의 대유다. 성상이 버린다는 것은 전대 선비들에게 해당되는 것이고 자신에게는 애당초 임금 가까이 갈 수도 없었지만 전대 선비들의 표현을 흉내 내어 관습적으로 그렇게 표현했다. 둘째 수에서는 자연의 좋은 경치가 자신과 같은 사회적 약자에게도 보장되어 있다는 점을 표현했다. 자신의 힘과 분수로도 자연의 경치는 힘센 자에게 뺏길 염려가 없으니 이를 마음껏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수는 자연 속에 은둔한 그의 한가한 즐거움을 표현한 것이다. 벗들과 떨어져 한적한 곳에 사니 찾는 사람이 없고, 꽃잎이 떨어진 길을 쓸지도 않은 채 사립문을 닫아두었다고 자신의 한가한 생활을 묘사했다. 오직 밝은 달과 맑은 바람이 잊지 않고 찾아주니 유신한 벗이라고 했다. 넷째 수는 강호경개를 만난 즐거움을 감동적으로 표현했는데, 세상사를 버리고 강호의 경치를 대하니 물과 산의 모습이 마치 구면을 다시 보는 듯이 반갑다고 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자신이 평생 꿈에 그리던 것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마지막 수는 무한히 나에게 주어져 있는 것, 곧 자연과 벗하는 기쁨을 읊었다. 세상살이 어려우니 강호로 가자고 권유하는데, 무심한 백구, 곧 자연이 오라고 하지도 가라고 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자연은 영원무궁하게 그렇게 있을 뿐이므로 나에게 무한히 주어진 것이다. 누가 뺏을 수도 금할 수도 없다. 거기에 몰입했을 때 세상사의 번뇌는 없어지고 오직 마음의 평화가 있을 뿐이다.




세상 사람들아 이 내 말 들어보소.

청춘(靑春)이 매양이며 백발이 검는 것가.

어떻다 유한(有限)한 인생이 아니 놀고 어이리.


송림(松林)에 객산(客散)하고 다정(茶鼎)에 연헐(烟歇)커늘

유선일침(游仙一枕)에 오몽(午夢)을 늦이 깨니

어즈버 희황상세(羲皇上世)를 다시 본 듯하여라.




안빈(安貧)을 슬히 여겨 손 헤다 물러가며

부귀(富貴)를 부러하여 손 치다 나아오랴.

아마도 빈이무원(貧而無怨)이 긔 옳은가 하노라.


어가(漁歌) 목적(牧笛) 소리 곡풍(谷風)에 섞어 불 제

오수(午睡)를 새로 깨어 취안(醉眼)을 열어보니

재 너머 여남은 벗이 와서 휴호관비(携壺款扉) 하더라.

 

내 부어 권하는 잔을 덜 먹으려 사양 마소.

화개앵제(花開鶯啼)하니 이 아니 좋은 땐가.

어떻다 명년간화반(明年看花伴)이 눌과 될 줄 알리오.


  다음으로 그가 지향하는 바는 자연스럽게 산다는 것이다. 인위적인 조작이나 의지를 버리고 되어가는 대로 시간의 흐름에 인생을 맡기고 그것을 즐긴다는 것이다. 첫 수는 청춘은 붙잡을 수 없는 것이니 흐르는 시간 속에 놀고 즐기자는 것이다. 둘째 수는 친구들과 야외놀이라도 나온 상황이다. 솔숲으로 손님들은 흩어지고 차 끓이던 솥에 연기도 사그라지니, 신선처럼 낮잠에서 깨어나 눈에 들어오는 정경이 마치 태곳적 복희씨의 치세가 아닌가 싶다는 것이다. 자연 속에서 아무런 격식 없이 생긴 그대로 살아가던 태곳적 삶의 모습이 그가 바라던 바였다. 셋째 수에는 가난이란 싫다고 해서 가는 것이 아니고 부귀란 바란다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면서 가난해도 사회를 원망하지는 말자고 운명적 체관(諦觀)을 드러내었다. 부귀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라는 도전적 정신이 통할 수 없었던 봉건적 폐쇄 사회에서 자기 위안에 머무른 패배주의적 관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로서는 당시의 시대상황 속에서 가난한 대로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빈이무원(貧而無怨)’<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가르침이다. 넷째 수는 어부의 노랫소리와 목동의 피리소리가 골짜기 바람에 섞어 불 때, 취하여 낮잠에서 깨어나 보니 벗들이 술병을 들고 문을 두드린다고 하여, 전원의 느긋한 생활을 읊은 것이다. 되는 대로 살아가는 서민의 무의지적이고 무기력한 생활이지만 그 속에서 자연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마지막 수는 친구와 어울려 술을 권하는 모습이다. 꽃 피고 꾀꼬리 우는 좋은 때니 사양 말고 마시라는 것이다. 더구나 내년에 꽃을 함께 구경할 친구가 누가 될 줄 모르는데 어찌 술을 사양하겠느냐는 것이다. 인생은 허망하니 취하여 즐기자는 허무적이고 취락적인 시각이 그가 자연스럽게 살고자 하는 태도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




남산(南山) 나린 골에 오곡(五穀)을 갖춰 심어

먹고 못 남아도 긏지나 아니하면

그밖에 여남은 부귀(富貴)야 바랄 줄이 있으랴.




농인(農人)이 고여춘급(告余春及)하니 서주(西疇)에 일이 많다.

막막수전(漠漠水田)을 뉘라서 독매어 주리.

아마도 궁경가색(躬耕稼穡)이 내 분()인가 하노라.

 

울밑 양지(陽地)편에 외씨를 뿌려두고

매거니 북돋우어 빗김에 다뤄내니

어즈버 동릉과지(東陵瓜地)는 예야 긘가 하노라.




엊그제 덜 괸 술을 질동이에 가득 붓고

설데친 무나물 청국장 끼쳐내니

세상에 육식자(肉食者)들이 이 맛을 어이 알리오.




청려장(靑藜杖) 힘을 삼고 남묘(南畝)로 내려가니

도화(稻花)는 흩날리고 소천어(小川魚) 살졌는데

원근(遠近)에 즐기는 농가(農歌)는 곳곳이서 들린다.




  그가 전원생활을 즐기는 모습을 그려낸 시조를 보자. 첫 수는 오곡을 심고 가꾸어서 연명하는 가난하지만 자족하는 생활을 읊은 것이고, 둘째 수에는 도잠(陶潛)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농군이 나에게 봄이 왔다고 알린다는 말과 왕유(王維)의 시 여러 날 비가 내려 망천장에서 짓다.(積雨輞川莊作)’에 나오는 넓고 넓은 논이라는 구절을 이용하여 농사짓는 분주하고 힘든 상황을 말하고, 스스로 농사에 전념하는 것이 자신의 분수라고 하였다. 셋째 수는 진()나라의 동릉후(東陵侯)였던 소평(邵平)이 진이 망하자 동문 밖에서 외를 심어 살았다는 고사를 취하여 자신이 전원에서 외를 가꾸며 사는 것이 그 고사와 비슷하다고 하여 전원에서 사는 즐거움을 말한 것이다. 구체적인 전원생활의 묘사가 아주 정겹고 우리말의 운치를 잘 살렸다고 하겠다. 넷째 수에서는 술이 먹고 싶어 덜 괸 술을 질그릇 동이에 붓고, 급한 마음에 설데친 무나물에 청국장을 끼얹어 내놓은 술상의 맛을 벼슬이 높아 육식을 하는 사람들이 어찌 알겠느냐고 하여 전원생활의 소박한 즐거움을 표현하였다. 마지막 수는 농촌 들녘의 풍요로운 분위기를 읊은 것이다. 푸른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남쪽 논을 둘러보니 벼꽃은 피고 개울에 고기는 살쪘는데 원근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노래 소리가 넘쳐난다고 하여 머지않아 풍년을 맞을 농촌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려놓았다. 아무런 주관적 감흥을 첨가하지 않고 오로지 정경(情景)만을 그려냄으로써 뒤에 감춘 감흥이 여운으로 살아나게 하는 수법은 숙종 때 실경(實景)을 중시하는 한시의 경향에서 영향 받은 것이라 하겠다.




영욕(榮辱)이 병행(竝行)하니 부귀(富貴)도 불관(不關)터라.

제일강산(第一江山)을 내 혼자 임자 되어

석양에 낚싯대 둘러메고 오명가명 하리라.




오수(午睡)를 늦이 깨어 취안(醉眼)을 열어보니

밤비에 갓 핀 꽃이 암향(暗香)을 보내나다.

아마도 산가(山家)의 맑은 맛이 이 좋은가 하노라.

 

옷 벗어 아이 주어 술집에 볼모 하고

청천(靑天)에 우러러 달더러 물은 말이

어즈버 천고이백(千古李白)이 날과 어떠하더뇨.

 

전원(田園)에 남은 흥()을 전나귀에 모두 싣고

계산(溪山) 익은 길로 흥()치며 돌아와서

아이야 금서(琴書)를 다스려라 남은 해를 보내리라.




  전원에서 흥에 겨워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시다. 첫 수에서 비록 세속의 영욕을 의식하고는 있지만 영욕이 엇갈리는 부귀를 멀리하고 강산 풍경 속에 혼자 낚시를 즐기면서 살겠다는 것이다. 이 역시 평민의 강호가도다. 세속에서 몸부림쳐 봐도 입신출세를 못할 바엔 차라리 전원에서 마음 편히 살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의식이 충족되느냐 하는 것이지만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살겠다는 것이 시인의 태도다. 둘째 수는 낮잠에서 깨어 취한 눈을 떠 보니, 밤비에 핀 꽃이 그윽한 향기를 보낸다. 살림은 어려울지 몰라도 이러한 운치 속에 전원생활의 맛이 있다는 것이다. 물질적 풍요는 없어도 정신적 정서적 운치는 충만하다는 말이다. 셋째 수에는 돈은 없어도 옷을 벗어 술집에 잡히고 술을 먹는 풍류가 옛날 이백(李白)과 비교할만 하냐고 달에게 묻는다고 했다. 가난해도 풍류스런 멋이야 넉넉하다는 것이다. 넷째 수에서는 전원에서 느끼는 흥을 풀고자 저는 나귀에다 짐을 싣고 산과 골짜기를 찾아 흥을 푼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거문고를 연주하고 책을 읽으며 해가 다하도록 제 흥을 즐긴다는 것이다. 전원에서 생활하는 흥취를 노래와 음률과 시조에 통달한 사람답게 풀어낸 것이다.

 



초생(初生)에 이즌 달도 보름에는 둥글거든

영허비태(盈虛否泰)는 천도(天道) 자연(自然) 그렇거니

두어라 무왕불복(無往不復)이니 기다릴까 하노라.




춘창(春窓)에 늦게 깨어 완보(緩步)하여 나가보니

동문(洞門) 유수(流水)에 낙화(落花) 둥둥 떠 있어라.

저 꽃아 선원(仙源)을 남 알세라 떠나가지 말아라.

 

풍진(風塵)에 얽매이어 떨치고 못 갈지라도

강호일몽(江湖一夢)을 꾸언지 오래더니

성은(聖恩)을 다 갚은 후는 호연장귀(浩然長歸) 하리라.

 

하목(霞鶩)은 섞어 날고 수천(水天)이 한 빛인제

소정(小艇)을 끌러 타고 여울로 내려가니

격안(隔岸)의 삿갓 쓴 늙은이는 함께 가자 하더라.

 

흰 구름 푸른 내는 골골이 잠겼는데

추상(秋霜)에 물든 단풍(丹楓) 봄꽃도곤 더 좋아라.

천공(天公)이 나를 위하여 뫼빛을 꾸며 내도다.




  전원에 살며 자연의 이치를 깨우치고 신선경을 즐기며 자연에 몰입하는 정경을 표현한 시들을 모았다. 첫 수에서 달이 이지러졌다가 다시 둥글어지는 것을 보며 인생의 막히고 트이는 운수도 이러한 천도의 운행과 같다고 깨우치고,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것은 없다며 기다리라고 한다. 자연을 관찰하여 인생의 진리를 깨우치는 것은 선비들의 학문 탐구의 자세였는데, 그도 선비의 그런 자세를 실천하고자 한 것이다. 둘째 수에서 봄날 늦은 잠에서 깨어 천천히 들에 나가보니 동네 어귀의 시냇물에 꽃잎이 떠가더라고 했다. 그리하여 신선이 사는 도원경을 남들에게 알릴까 떠나가지 말라고 한다. 이런 시상은 이미 선배들의 시에서 여러 번 다루었지만 무릉도원 같은 이상적 세계를 그리워하는 전통의 연속이라는 점에 뜻이 있다. 셋째 수는 아직 전원으로 돌아가지 못한 젊었을 때에 작품이다. 세속적인 일에 얽매이어 떨치고 가진 못해도 강호로 돌아가려는 꿈을 오래 전부터 꾸었기에 임금의 은혜를 갚은 후에는 시원스럽게 전원으로 돌아가겠다는 소망을 말했다. 전원귀의의 꿈을 쾌활하게 표현했다. 넷째 수는 자연몰입의 정경이다. 노을 속에 오리는 날고 물과 하늘은 한 빛일 때, 작은 배를 타고 여울로 내려가는데, 마주보이는 강 언덕의 삿갓 쓴 늙은이가 함께 가기를 청한다는 것이다.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한 풍경의 묘사다. 산수의 실제적 경치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주관적 감흥을 절제함으로써 숨겨진 감흥을 함축적으로 제시하는 수법은 여기서도 최대의 효과를 드러낸다고 할 것이다. 마지막 수는 가을의 전원풍경을 그리면서, 두목(杜牧)산행시(山行詩)’에서 서리 맞은 잎이 봄날의 꽃보다 붉다.(霜葉紅於二月花)”라는 시구를 빌려와 중장을 구성했다. 흰 구름과 푸른 안개가 피어오르는 골짜기와 가을 서리에 물든 단풍, 이러한 환상적 정경은 하느님이 전원에 사는 나를 위해 꾸며낸 산빛이라는 것이다. 남의 시를 가져다가 쓴 것이 아쉽지만 한시의 수용이라는 쪽으로 시조를 변용한 예가 될 것이다.






전원에 나믄 흥을

                                                                              김천택

 

전원에 나믄 흥을 전나귀에 모도 싣고

계산 니근 길로 흥치며 도라와셔

아헤야 금서를 다스려라 나믄 해를 보내리라

 

 

 

현대어 풀이

 

전원에 남은 흥을 저는 나귀에 모두 싣고

계곡 낀 산의 익숙한 길로 흥겹게 돌아와서

아이야, 거문고와 책을 챙겨라 남은 해를 보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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