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이세보의 시

김영도 2018. 4. 5. 20:31

 

이세보(李世輔, 1832-1895)는 철종고종 때의 문신이며 시인이다. <고종실록><승정원일기>, <이세보 시조연구> 등에 의하면, 초명은 세보이고 자는 좌보(左甫)이며 본관은 전주다. 인조의 동생 능원대군(綾原大君)8대손으로 순창군수 단화(端和)의 아들이다. 20(1851, 철종2)에 풍계군(豊溪君) ()의 후사가 되어 이름을 호()로 개명하고 경평군(慶平君)으로 봉작되었다.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냈으며, 1품 현록대부가 되어 철종의 수라상을 감선(監膳)하는 직책을 맡았다. 26(1857, 철종8)에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29살에 아우 세익(世翊)이 급제하여 한림에 제수되자 안동김씨 측에서 그의 작용이라며 반대했고, 흥분한 그가 안동김씨의 횡포를 비난했다. 이에 탄핵을 받아 강진 신지도(薪智島)에 유배되어 3년간 고초를 겪다가 고종이 즉위하자 석방되었다. 34(1865, 고종2)에 동지돈녕부사, 부총관, 한성우윤, 한성좌윤를 거쳐 이듬해 병조참판, 공조참판이 되었다. 37살에 대원군의 명으로 이름을 인응(仁應)으로 바꾸었다. 이듬해 호조참판을 거쳐 여주목사로 나갔다가 40살에 개성유수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오위도총관을 지내고, 42살에 공조판서, 한성판윤을 역임했다. 이후 공조판서 4, 형조판서 5, 판의금부사 6번을 지냈다. 64(1895, 고종32)에 민비가 시해되자 애통해 하다가 병이 나서 죽었다. <풍아(風雅)>, <시가(詩歌)> 등의 시조집에 458수의 시조를 남겼다

 

일성지내(一城之內) 관찰사(觀察使)는 가작우속(假作牛贖) 생각 말고

수령선치(守令善治) 분별(分別)하고 호방비장(戶房裨將) 조속(操束)하소.

밀부병부(密符兵符) 둘씩 차고 소관(所管)이 하사(何事)런가.

 

일시지분(一時之憤) 생각하고 혹형(酷刑)을 과()히 마소.

경죄(輕罪)는 경감(輕勘)하고 중죄(重罪)는 중감(重勘)하소.

아마도 대전통편(大典通編)이 으뜸인가.

 

나라 없는 번신(藩臣) 보며 번신 없는 나라 본가.

가련한 저 백성을 포복(匍匐)같이 사랑하면

아마도 타일선음(他日先蔭)이 자우손(子又孫).

 

우속(牛贖)을 어이 하리 가련한 저 백성이

일기백반(一器白飯) 황당(荒唐)커든 황우일척(黃牛一隻) 생의(生意)할까.

아무리 이수(移囚)한들 피부존(皮不存)의 무내하(無奈何).

 

저 백성의 거동(擧動) 보소 지고 싣고 들어와서

한 섬 쌀을 바치려면 두 섬 쌀이 부족이라.

약간 농사 지었은들 그 무엇을 먹자 하리.

 

조선 말기 삼정(田政, 軍政, 還穀)의 문란으로 인하여 백성의 고난이 빈사상태에 이르렀다. 이러한 때에 수령의 책무를 일깨우고 민중의 수탈을 고발하여 백성을 보호할 것을 독려한 시조를 골랐다. 첫 수는 관찰사의 임무를 환기하는 내용이다. 한 지역의 행정, 사법, 군사를 책임지고 있는 관찰사는 백성을 수탈하는 수단으로 터무니없는 벌금을 매겨 농사짓는 소를 바치게 하는 짓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는 각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들의 치적을 분별해야 하고, 자신이 거느린 육방(六房)의 아전 중 조세를 담당하는 호방과, 군정을 담당하는 중군비장을 잘 단속해야 한다고 각별히 주의하였다. 그리고 병란에 대비하여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비밀 신표인 병부를 차고서 국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명심하라고 격려하고 있다. 둘째 수는 수령이 형정(刑政)을 공정하고 관대하게 운용할 것을 당부한 것이다. 수령이 한 때의 분노를 참지 못해서 백성을 혹형으로 다스리지 말 것을 우선 부탁했다. 먼저 백성에 대한 사랑으로 형정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죄를 지었을망정 가벼운 죄라면 가볍게 조사해서 훈계 방면하고, 무거운 죄라면 정확히 사실을 밝혀서 응분의 벌을 받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처리하려면 수령이 임의로 처리할 것이 아니라 정조 때 만든 법령집인 <대전통편>에 따라 처리해야 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였다. 셋째 수는 지방 수령인 관찰사가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하면 자기 자손에게도 음덕이 있을 거라고 권면한 것이다. 나라가 있어야 수령이 있고, 수령이 있어야 나라가 유지된다는 말을 설의법으로 묻고, 나라의 기본을 이루는 백성을 기어 다니는 어린아이와 같이 사랑하라고 권장하였다. 임금도 중하고 수령도 중하지만 백성이야말로 나라의 근본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우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백성을 사랑으로 돌보면 수령 자신의 아들과 손자 즉, 자손에게도 쌓은 음덕이 돌아갈 것이라고 하여 공리적으로 봐서도 수령이 백성을 사랑하면 이로움이 있다고 했다. 넷째 수와 다섯째 수는 수탈당하는 백성의 실상을 고발하는 내용이다. 넷째 수에는 수령이 부과한 벌금에 농민이 농사짓는 황소를 가져다 바치는 우속(牛贖)의 부당함을 고발하고 있다. 흰쌀밥 한 그릇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가난한 백성들에게 농우를 갖다 바치라는 것이 말이나 되는 처사냐면서 그들을 감옥에 잡아 가둔들 무엇을 더 수탈하겠느냐고 하고, 가죽도 없는 사람들에게 털까지 뽑겠다는 것과 같은 막무가내의 폭정을 비판하였다. 다섯째 수는 환곡이라는 이름으로 백성을 수탈하는 실상을 고발한 것이다. 빌려주지도 않은 곡식을 갚으라는 조선 후기의 폭정을 다산 정약용 선생도 한시로 고발한 바 있지만, 여기서도 환곡을 갚느라고 이고 지고 들어와 갖가지 명목과 트집으로 관청에 곡식을 빼앗기고 정작 그들 자신의 생계는 이을 길이 없는 조선 말기의 극한적 피폐상을 분노의 목소리로 비판하였다.

 

조석(朝夕)에 뫼시던 님을 삼년(三年)을 못 뵈오니

목석간장(木石肝腸) 아니어든 침식(寢食)이 온전하랴.

지금에 벽해천리(碧海千里) 멀었으니 그를 설워.

 

사통오달(四通五達) 너른 천지(天地) 가고 오면 다 보리라.

병들어 누운 몸이 한양천리(漢陽千里) 어려워라.

지금에 신무익(身無翼)하니 춘안(春雁)을 부러.

 

천상(天上)에 오작교(烏鵲橋) 있고 지상(地上)에 무수한 다리

이 다리 저 다리 중에 귀양다리 나 죽겠다.

차라리 창랑(滄浪)에 빠져서 굴원(屈原)이나.

 

천작얼(天作孽)은 유가위(有可違)요 자작얼(自作孽)은 불가활(不可活)

불충무상(不忠無上) 이 내 몸이 호소(呼訴)할 곳이 없다.

어찌타 초옥(草屋)에 빈대 벼룩은 이다지 많아.

 

가뜩에 먼 고향을 장마 지니 어이 하리.

묘연(杳然)하다 부모 동생 소식 몰라 오죽할까.

지금의 생부득(生不得) 사부득(死不得)하니 가슴 답답.

 

여기에서는 귀양살이의 어려움과 임금에 대한 그리움을 읊은 시조를 골랐다. 앞의 두 수는 연군의 정이, 뒤의 세 수는 귀양살이의 고난과 외로움이 표현되었다. 첫 수에는 아침저녁 끼니때마다 옆에서 돌봐드리던 철종 임금을 떠나 귀양지에서 삼년을 보내게 되니 목석처럼 무감각한 마음을 지녔다고 할지라도 임금 생각 없이 먹고 자고 하겠느냐고 했다. 그리하여 강진의 신지도에 유배되어 바다 멀리 떨어져 있으니 임금을 못 보는 자신의 신세가 서럽다고 한 것이다. 종장의 끝은 아마 하노라쯤일 것인데, 시조창 때문에 생략되었다. 둘째 수에서도 자신이 만약 기러기라면 사방으로 확 트인 넓은 세상과 멀리 떨어진 한양도 오고 가고 다 볼 수 있겠지만, 귀양지에서 병들어 누웠으니 그리 할 수도 없다고 탄식했다. 게다가 몸에 날개도 없으니 봄날 임금이 계신 북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가 부럽기 그지없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종장의 끝 하노라가 생략되었다. 이렇게 임금을 그리는 정을 드러내었다. 셋째 수에는 말 재치로 귀양살이의 어려움을 강조하고 자신의 충정을 굴원에 비겨 드러내고 있다. 하늘에는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오작교가 있고, 땅위에도 많고 많은 다리가 있지만 자신이 겪는 귀양다리(귀양살이 하는 사람을 낮잡아 부르는 말) 신세는 정말 견디기 어렵다고 했다. 귀양다리라는 낱말의 접사 다리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건너는 다리와 음이 같은 것을 이용하여 말 재치를 부렸을 뿐, 특별한 의미는 없고 오직 귀양살이가 괴롭다는 말이다. 이렇게 괴로우니 차라리 자신의 충정을 간직한 채 멱라수(汨羅水)에 빠져 죽은 굴원의 뒤를 따르고 싶다고 했다. 생략된 종장의 끝은 좇으리따르리일 것이다. 넷째 수에는 불충을 저질러 유배된 것을 후회하고 귀양살이의 괴로움을 토로했다. 초장은 <서경(書經)> 태갑(太甲)에 나오고,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상에도 나오는 말로 하늘의 재앙 즉 천재(天災)는 사람이 노력해서 피할 수 있지만, 자신이 초래한 재앙은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자신이 세도가 안동김씨를 비난해서 유배를 당한 것이 한 때의 분노를 참지 못해 이런 고난을 겪게 됐다는 뒤늦은 후회를 드러낸 것이다. 그리하여 중장에서 임금 곁을 떠나 모실 수 없게 되었으니 불충을 호소할 곳조차 없게 되었다고 했다. 이렇게 일시 분노를 후회한 후에 귀양지에서 겪는 물것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았다. 인간적인 적나라한 괴로움의 토로다. 마지막 수는 귀양살이에서 장마의 답답함을 호소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천리나 먼 고향인데, 장마가 지니 고향 소식을 몰라 더욱 아득하다. 더구나 지금은 살자니 살 수도 없고 죽자니 죽을 수도 없는 신세이니 가슴만 답답하다고 하소연하였다. 처절한 귀양살이의 고난이 여실히 드러난다

 

나는 꽃 보고 말하고 꽃은 날 보고 당긋 웃네.

웃고 말하는 중에 나와 꽃이 가까워라.

아마도 탐화광접(探花狂蝶)은 나뿐인가.

 

황앵(黃鶯)은 버들이요 호접(蝴蝶)은 꽃이로다.

기러기는 녹수(綠水)요 백학(白鶴)은 청송(靑松)이라.

어찌타 사람은 탁의(託依)할 곳이 적어.

 

그리고 못 보는 님 잊어 무방(無妨)하건마는

()이 병()이 되어 사르느니 간장(肝腸)이라.

지금에 이 심회(心懷) 알 양이면 무슨 시름.

 

만나서 다정(多情)턴 일 그려서 생각이요

그려서 생각던 일 만나서 다정(多情)컨만

어찌타 그린 정이 변개(變改) 쉬워.

 

밤은 삼경(三更)되고 오만 님은 아니 온다.

이 애를 알 양이면 제 정녕 오련마는

어찌타 무정가인(無情佳人)은 사정 몰라.

 

그의 시조에는 유난히 남녀애정을 노래한 작품이 많다. 그만큼 남녀애정에 관심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애정과 그리움을 읊은 작품을 보자. 첫 수는 남녀애정의 즐거움을 읊고 있다. 나는 나비이고 여인은 꽃에 비유되어 있다. 나비는 꽃을 보고 말하고 꽃은 나비를 반긴다. 웃고 말하면서 꽃과 나비는 가까워진다. 이렇게 꽃을 찾는 미친 나비는 바로 시인 자신이라고 원관념을 드러내었다. 흔한 설정이긴 하지만 대화하듯 풀어나가는 솜씨가 재미있다. 둘째 수는 대구와 생략을 이용하여 짝들을 늘어놓았다. 꾀꼬리는 버드나무에 앉고, 나비는 꽃을 찾아든다. 기러기는 푸른 물에 어울리고 흰 학은 푸른 솔에 깃들인다. 이렇게 서로 의지할 곳이 있는데, 사람은 짝을 찾아 의지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였다. 여인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둘러서 표현한 것이라고 하겠다. 셋째 수에는 님 그리는 심정을 서술하였다. 그리워하지만 만날 수 없는 님은 잊어버리는 것이 좋지마는, 그리워하는 정이 오히려 병이 되어서 자기의 간장을 사른다고 하였다. 그리워하는 님을 잊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이 심정을 님이 알아준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고 반문하여, 애타는 그리움을 표현했다. 넷째 수에서는 남녀가 만나고 그리워하는 애정이 변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담았다. 만나서 다정하게 지내던 일을 그리워하면서 생각하고, 그리워하면서 생각하던 일을 만나서 다정하게 확인하지만, 이렇게 다정한 관계도 혹시나 변할까 두렵다고 하여 남녀애정이 변하기도 쉽다는 노파심을 드러내었다. 마지막 수는 그리워하는 님이 오지 않음을 원망한 것이다. 밤은 한밤중이 되건만 오마고 하던 님은 오지 않는다. 애태우는 이 심정을 안다면 정녕 올 것이지마는 무정한 님은 이런 사정을 모른 채 오지 않는다고 탄식하였다. 다섯 수 모두 종장 끝을 생략하였다.

 

꽃 보고 좋던 마음 낙화될 줄 알았으며

촉하(燭下)에 다정(多情)한 님 이별될 줄 알았으랴.

어찌타 건곤(乾坤)은 변치 않고 인심(人心)은 달라.

 

전전반측(輾轉反側) 못 이룬 잠 사오경(四五更)에 닭이 운다.

시비(柴扉)를 열고 보니 눈이 오고 달이로다.

어찌타 유벽산촌(幽僻山村)에 개는 짖어.

 

이 몸이 꿈이 되어 님의 침상(枕上) 넌짓 가서

분명히 현몽(現夢)하면 놀라 깨어 반기려니

어찌타 수심(愁心)에 못 이룬 잠이 그도 어려워.

 

이별이 있거들랑 연분(緣分)이 없었거나

연분이 있거들랑 이별이 없고 지고.

어찌타 어려운 연분이 이별 쉬워.

 

타든 말 머무르고 손잡고 다시 앉아

다정히 이른 말이 울지 마라 내 속 탄다.

지금에 은원(恩怨) 없이 이별 되니 수이 볼까.

 

이별을 다룬 작품을 골랐다. 물론 남녀애정의 또 다른 국면이다. 첫 수에는 떨어진 꽃과 이별한 님, 건곤과 인심을 대비하여 상실에 대한 슬픔을 부각시키는 수법을 썼다. 꽃을 보고 좋아할 적에야 낙화될 줄 생각지 않았고, 촛불 밝히고 다정하게 지낼 때야 어찌 이별을 생각했으랴만, 하늘과 땅은 그대로이나 사람의 마음은 변하는 것이라 이별이 오고 말았다는 것이다. 인심의 변하기 쉬움과 이별의 안타까움을 표현하였다. 둘째 수는 님을 이별하고 그리워하는 정경을 묘사한 것이다. 이리저리 구르며 잠 못 이루고 새벽 두 시, 네 시가 되어 닭이 운다. 사립문을 열고 보니 싸늘한 눈이 내리고 휘영청 달이 밝다. 그런데 눈과 달은 동시에 있기 어렵다. 눈 내린 뒤에 날이 개고 달이 비춰야 맞다. 님을 기다리는 애타는 심정을 싸늘한 눈과 창백하게 비추는 달빛에 객관화시키느라고 이렇게 된 것이다. 이렇게 밤을 하얗게 새운 날 외진 산골에 개가 짖어 새벽이 왔음을 알린다. 심정의 직접 서술은 피하고 경물을 객관적으로 묘사하여 별리(別離)의 애달픔을 더욱 부각시켰다고 하겠다. 셋째 수에는 이별한 님을 간절히 그리워한 나머지 꿈이 되어 님 곁에 가고 싶은 심정을 드러냈다. 스스로 꿈으로 변해서 님의 베갯머리에 가 꿈으로 나타나면 님이 놀라 반길 것인데, 수심으로 잠마저 들지 않아서 꿈으로 변하기도 어렵다고 하였다. 꿈에서 님을 만나고 싶다고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꿈이 돼서 님이 나를 꿈꾸게 하겠다는 발상을 한 점이 특이하다. 넷째 수는 만남과 헤어짐의 모순을 들어 이별을 아쉬워한 것이다. 이별을 할양이면 애초에 만날 연분이 없었거나, 연분이 있어 만나게 되었으면 이별이 없어야 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사의 모순은 연분을 만들고 다시 이별을 두어서 안타깝다는 것이다. 마지막 수는 남녀 이별의 장면을 재현한 것이다. 남자가 말을 타려다가 멈추고 여인의 손을 잡고 마주 앉아 달랜다. 중장과 종장은 달래는 말의 직접 인용이다. 자신의 속도 타고 있으니 울지 말라고 여인을 다정하게 위로한다. 지금 우리가 원망하는 마음이 없이 헤어지니 이 마음이 변치 않는다면 머지않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재회를 다짐한다. 이렇게 그의 애정 시조에는 남녀 애정의 여러 가지 국면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늙고 병 든 나를 무정히 배반하니

가기는 가려니와 나는 너를 못 잊노라.

어찌타 홍안(紅顔)이 백발(白髮)을 이다지 마다.

 

뜰 앞에 석죽화(石竹花)는 박꽃을 웃지 마라.

백발 안 될 소년 없고 소년 아닌 노인 없다.

어찌타 수유광음(須臾光陰)에 자랑 겨워.

 

미만 삼십 이 내 몸이 백발 없는 노인이라.

눈 어둡고 기운 업고 앓느니 병이로다.

아마도 청춘에 썩은 간장(肝腸) 늙기도 먼저.

 

춘산(春山)에 꽃 피거든 오작교(烏鵲橋) 찾아 가니

뛰던 나무 고목 되고 춘향(春香)은 간 데 없다.

아마도 무산(巫山)이 적막하니 승피오운(乘彼五雲)한가.

 

홍안(紅顔) 실시(失時)한 연후(然後)에 백발이라 탄식한들

다시 젊기 어려우니 추회막급(追悔莫及)할 뿐이라.

어찌타 경박(輕薄) 소년이 내사(來事)를 몰라.

 

늙음을 탄식하는 시조를 골랐다. 탄로가(歎老歌)는 고려의 우탁(禹卓, 1263-1343)의 시조에 처음 보이는 만큼 전통이 오래 되었다. 첫 수에는 대유(代喩)와 의인법(擬人法)을 써서 자신을 버리고 간 청춘을 원망한다. 홍안(붉은 얼굴)은 청춘의 대유인데, 홍안이 나를 무정히 배반했다고 의인화했다. 그러나 늙고 병든 나는 젊음을 잊지 못한다. 그리하여 홍안이 백발을 이렇게 마다하냐고 원망하는 것이다. 둘째 수에서는 붉은 패랭이꽃과 흰 박꽃으로 각각 젊음과 늙음을 상징하여 가는 세월을 아쉬워하였다. 패랭이꽃더러 박꽃을 비웃지 말라고 의인화해서 젊음에 대한 원망을 드러내고, 소년은 결국 백발에 이르고 만다면서 잠깐 사이에 흘러가는 세월인데 젊음을 너무 자랑하지 말라고 시기어린 경고를 하고 있다. 셋째 수는 자신이 당한 고난을, 몸은 젊은데 마음이 먼저 늙은 조로(早老)현상에다 빗대어 읊은 것이다. 스물아홉 살에 안동김씨와 갈등을 겪고 유배되는 고난을 당했으니 백발 없는 노인이 됐다는 말이다. 어려움을 당해 분노와 절망과 낙심으로 인하여 청춘에 애간장을 태웠다고 했다. 자신이 당한 고난을 늙음에 연결시켜 에둘러 표현한 솜씨가 돋보인다고 하겠다. 넷째 수에는 소설 속의 주인공을 소재로 그녀도 늙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하였다. 봄이 되어 꽃이 필 때 단옷날 이몽룡과 성춘향이 만났던 광한루 오작교를 찾아가니, 춘향이 그네 뛰던 나무는 고목이 되었고 젊고 아름답던 춘향이도 간 곳이 없다. 송옥(宋玉)고당부(高唐賦)’에 초왕이 고당에서 무산선녀를 만났다는 고사를 빌려와서, 무산도 적막하니 아마도 무산선녀도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을 것이고 춘향이도 그처럼 선녀가 됐으리라는 뜻을 암시했다. 아름다운 여인도 세월이 가면 늙어서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선녀가 된 것으로 미화한 것이다. 마지막 수는 자신의 늙음을 탄식하면서 소년이 늙음이 머지않아 온다는 것을 모르고 허송세월함을 안타까워한 것이다. 젊어서 노력하지 않아 때를 잃은 연후에 늙었다고 탄식해 본들 젊음이 다시 오는 게 아니니 후회해도 소용없다. 이런 이치를 모르는 경박한 소년들은 장차 늙음이 다가올 것을 모르고 세월을 허송한다고 탄식했다

  

착한 사람의 집에 악한 사람 적고

악한 사람의 집에 착한 사람 적다.

아마도 일로 좇아 삼천지교(三遷之敎)인가.

 

경박 소년들아 오유평생(娛遊平生) 그만하고

성경현전(聖經賢傳) 뜻을 두어 충효위업(忠孝爲業) 하여 보소.

아마도 청춘에 실지(失志)하면 후회 많어.

 

붕우(朋友)를 사귀거든 의심을 멀리 하고

구이상경(久而相敬)하여 시종(始終)이 같을지라.

아마도 군자지교(君子之交)는 담여수(淡如水)인가.

 

부모의 공() 반만 알면 효자 안 될 자식 없고

국은(國恩)을 중()히 알면 충신 안 될 신하 없다.

어찌타 내남없이 충효의 뜻이 적어.

 

취중(醉中)에 지낸 일이 깨고 나면 낭패(狼狽) 많고

색욕(色慾)을 안 삼가면 병들어 후회 많다.

아마도 주색(酒色) 두 자()는 사람의 평생인가.

 

유방백세(流芳百世) 못하여도 누명(陋名)은 삼가리라.

물욕(物慾)을 멀리하고 충효(忠孝)를 생각하면

아마도 사후누명(死後陋名)은 면하려니.

 

경세적(警世的)이고 도덕적인 주제를 드러낸 작품을 골랐다. 첫 수는 가풍과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착한 집안에는 교화를 받아 자손이 악할 수가 없고, 악한 사람의 자손은 부모를 보고 배워서 악해지기 쉽다는 것이다. 초장과 중장을 대조와 대구로 마주보게 하였다. 그리고 집안이나 주위에서 보고배우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맹자의 어머니는 자식의 교육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한 것이 아니냐고 했다. 둘째 수는 젊은이에게 주는 교훈이다. 경박한 소년들을 불러서 놀고 즐기는 것을 그만하라고 명령하고, 성현의 말씀이 적힌 경전에 뜻을 두어 충성과 효도를 실천하라고 권한다. 그리하여 젊은 날에 뜻을 세워 노력하지 않으면 늙어서 보잘것없는 인간으로 끝나고 만다고 다시금 경계하였다. 셋째 수는 친구를 사귀는 방법을 가르친 것이다. 오륜에 붕우유신(朋友有信)이라고 했듯이 친구를 사귐에는 먼저 의심치 말고 신의를 지녀야 한다고 말하고, 다음에는 세월이 오래되어도 서로 존중하여 처음과 끝이 한결같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군자 곧 교양 있는 사람의 사귐은 물처럼 담담해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은 이익을 앞세운 사람의 사귐은 꿀같이 달다는 말과 대조되는 것이다. 넷째 수는 충효를 권장한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들인 노력을 반만 알아도 효자가 될 것이고, 나라가 자신에게 끼친 은혜를 고맙게 생각한다면 모두들 충신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남없이 부모의 은공도 나라의 은혜도 모르는지 충효를 실천하는 사람이 적다고 한탄하여 사람들을 분발케 하였다. 다섯째 수는 주색(酒色)을 삼가라는 교훈이다. 취하여 저지른 일 중에는 깨어나 후회하는 낭패스런 일이 많고, 색욕을 삼가지 않으면 그로 인해 병들게 되어 뒤늦게 뉘우치게 된다. 그러니 사람이 평생 삼가야 할 일이 술과 여색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수는 죽은 후에 더러운 이름을 남기지 않으려면 욕심을 버리고 충효를 생각하라고 권면하는 내용이다. 먼 훗날에까지 훌륭한 이름을 남기지는 못하더라도 더러운 이름을 남기지 않으려면, 물질에 대한 욕심을 절제하고 충성과 효도를 실천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 죽은 뒤에 더러운 이름은 남기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해묵은 유교적 훈계를 늘어놓아서 애정시조를 많이 지었던 면모와는 다른 경직된 도학자적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정월에 농기(農器) 닦고 이월(二月)에 밭을 간다.

장정(壯丁)은 들에 놀고 노약(老弱)은 집에 있어

지금에 게으른 자부(子婦) 신칙(申飭)한다.

 

아침을 지낸 후에 저녁이 걱정이요

저녁을 지낸 후에 아침이 걱정이라.

어찌타 사람이 맥반일기(麥飯一器)도 때를 지나.

 

초운(初耘) 재운(再耘) 풀 밑 적에 저 농부 수고한다.

사립(簑笠) 쓰고 호미 들고 상평(上坪) 하평(下坪) 분주하다.

아마도 실시(失時)하면 일년 생애(生涯) 허사(虛事)인가.

 

백로상강(白露霜降) 다닫거늘 낫 갈아 손에 들고

지게 지고 가서 보니 백곡(百穀)이 다 익었다.

지금에 실시(失時)한 농부야 일러 무삼.

 

그대 추수(秋收) 얼마 한고 내 농사지은 것은

토세(土稅) 신역(身役) 바친 후에 몇 섬이나 남을는지.

아마도 다하고 나면 과동(過冬)이 어려.

 

가련하다 창생(蒼生)들아 생애(生涯) 구간(苟艱) ()틀 마라

심경이루 지은 농사(農事) 사시공역(四時公役) 무분수(無分數)

언제나 명천(明天)이 감동하사 탐관오리(貪官汚吏).

 

농사와 관련된 작품을 골랐다. 첫 수는 농한기인 정월 이월부터 농사 준비를 하는 모습이다. 정월에 농기구를 손질하고 이월에 언 땅이 풀리면 밭을 갈아엎는다. 장정은 들에 나가 놀기도 하지만 노약자는 아직 날이 쌀쌀하니 집안에 머무른다. 그러나 이때부터 게으름을 부리는 자부를 다잡아서 단단히 타일러 놓아야 농번기에 음식을 해 나르고 집안일을 보살피는데 지장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농가는 연초부터 농사 준비에 바쁘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수는 보릿고개를 읊고 있다. 삼사월 보리가 패면 농가에선 양식이 떨어진다. 아침밥을 먹고 나면 저녁거리가 걱정이고, 저녁을 먹고 나면 다음날 아침거리가 걱정이 된다. 점심을 먹지 못하는 것은 다반사(茶飯事).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 보리밥 한 그릇도 제 때에 먹지 못하는 춘궁기(春窮期)의 어려움을 들어, 위정자의 잘못을 은근히 비판하고 있다. 셋째 수는 여름날 농부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뙤약볕 아래 초벌매기와 재벌매기를 때맞추어 해주고, 벼 밑을 매어서 뿌리와 줄기를 튼튼하게 해준다. 비가 오는 날이면 도롱이와 삿갓을 쓰고 호미 들고 위 논 아래 논의 물꼬와 도랑을 분주히 살핀다. 이렇게 자식을 돌보듯 농사를 살펴야 풍년을 이루지, 그렇지 않고 때를 놓치면 생업인 농사를 망치고 만다는 것이다. 넷째 수는 24절기 중 백로와 상강을 들어 추수기의 농촌사정을 읊은 것이다. 이렇게 월령체로 된 작품도 여럿 있다. 이른바 월령체 시조라고 하겠다. 9월 초순의 백로와 10월 하순의 상강의 절기에 이르면 농부들은 추수를 하러 낫을 갈아들고 지게 지고 들판에 나선다. 온갖 곡식이 다 익은 풍요로운 계절이다. 그러나 게을러서 철 맞추어 농사를 짓지 못한 농부는 추수할 것이 많지 않다고 하였다. 다섯째 수는 추수를 하고 세금을 바친 후의 농부의 한숨을 읊은 것이다. 풍년들어 추수를 많이 해 본들 농사지은 수확물은 거의 토지세니 군역과 부역에 해당하는 세금들로 뜯기고 나면 남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것으로는 겨울나기도 어려울지 모른다는 농부의 한숨을 표현하여 당시 농촌의 피폐상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수는 시인이 농민을 위로하고 현실의 부조리를 규탄하며 탐관오리를 징치할 것을 하늘에 기도하는 내용이다. 시인은 농민의 직분이 어렵다고 너무 한탄하지 말라고 위로하고, 정성들여 지은 농사의 수확을 갖가지 세금으로 다 뜯어간다고 벼슬아치를 규탄하였다. 그리하여 하느님이 이를 살펴서 탐관오리를 징치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조선 말기 삼정의 문란은 극도에 달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늘에 기도하는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인간의 부귀영화 철없이 원칠 마라.

굴원(屈原)의 행음택반(行吟澤畔) 부귀로 당할쏘냐.

지금에 창랑수(滄浪水) 맑았으니 탁오영(濯吾纓) 할까.

 

역발산(力拔山) 기개세(氣蓋世)는 전무후무(前無後無) 항우(項羽)로다.

그 힘을 다하여서 충의(忠義)를 알았다면

아마도 오강(烏江)의 원혼(冤魂)은 안 되려니.

 

장양(張良)의 급한 말 듣고 저 번쾌(樊噲) 충의(忠義) 쓴다.

방패를 손의 들고 맹호(猛虎) 같이 달려드니

지금의 백만병중(百萬兵中) 제일 충분(忠奮).

 

삼월(三月) 삼일(三日) 천기(天氣) ()하니 장안(長安) 여인(旅人) 다소행(多少行)

춘복(春服)을 떨쳐입고 기수(沂水)의 목욕(沐浴)하니

아마도 요순(堯舜) 기상(氣像)을 증점(曾點)인가.

 

여기에서는 그가 경사(經史)를 읽고 얻은 지식과 느낌을 시로 표현한 것을 뽑았다. 첫 수는 굴원(屈原)어부사(漁父辭)’를 읽고 얻은 교훈을 말한 것이다. 부귀영화는 바란다고 오는 게 아니니 터무니없이 바라지 말라고 훈계하고, 그것보다는 굴원이 초나라 조정에서 쫓겨나 상강(湘江)의 택반(澤畔)을 떠돌면서 읊조린 어부사에서 말했듯이 혼탁한 무리에 섞여서 살기보다는 차라리 상강의 고기밥이 되겠다는 염결(廉潔)한 지조가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깨끗한 지조를 어떻게 부귀로 당하겠느냐고 되묻고, ‘어부사에서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는다.”고 읊었듯이, 세상이 깨끗하면 자신도 거기에 나아가 함께 참여하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따라서 이러한 말은 안동김씨의 세도가 몰락한, 고종 즉위 후에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둘째 수는 항우(項羽)의 패망을 안타까워하는 심정을 읊은 것이다. 항우는 힘이 산을 뽑고 기상이 세상을 덮을 만한 역사에 드문 영웅이었지만, 그가 만약 힘과 기상만을 믿고 횡행하지 않고 그가 세운 초나라 회왕(懷王)에게 충성과 의리를 지켰다면, 명분과 의리에서 한나라 유방에게 밀리지 않아서 결국 해하(垓下)의 싸움에서 지고 오강(烏江)을 건너지 못한 채 비참하게 죽는 비극적 결말을 맺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셋째 수는 이른바 홍문연(鴻門宴)에서 번쾌가 검무를 추고 유방을 보호한 충성을 말한 것이다. 유방이 회왕의 명을 받아 관중(關中)을 탈환하자, 항우가 하북(河北)을 평정한 후 관중으로 달려왔다. 유방과 항우가 관중의 홍문에서 만난 자리에 범증(范增)이 항장(項莊)을 시켜 검무를 추게 한다. 이에 장양이 위험을 간파하고 번쾌를 시켜 맞서서 검무를 추게 하여 유방을 보호한다. 이렇게 친목을 가장한 살벌한 잔치 자리에서 주군을 보호한 번쾌의 용감무쌍한 충성이야말로 백만 대군 속에서 가장 두드러진 일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수는 <논어>에 나오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삼월 삼짇날 날씨가 맑아 서울 장안의 사람들이 나와 다닌다는 말로 초장을 삼고, <논어>의 구절을 인용하여 중장을 삼았다. , 공자께서 제자들에게 각자 자신의 뜻을 말해보라고 하자 증점이 늦은 봄 봄옷이 만들어지면 오륙명의 어른과 육칠명의 동자와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 언덕에서 바람을 쐬고 노래하며 돌아오겠습니다.”고 하자, 선생님께서 히야감탄하시며, “나는 증점과 함께 하겠다.”고 한 것이다. 종장은 이러한 증점의 기상이 요순 임금의 정치 이상과도 어울림 직하다고 했는데, 이는 자연 속에 자유롭게 살도록 한 그들의 정치 이상과 증점의 생각이 상통한다고 본 때문이다. 이렇게 역사와 경전에서 공부한 바를 시조로 읊어내었다

 

망해정(望海亭) 올라보니 만리장성(萬里長城) 여기로다.

당초(當初)에 쌓은 뜻은 북호(北胡)를 막았건만

어찌타 무례청만(無禮淸蠻)이 이다지 편만(遍滿).

 

심양(瀋陽)을 당두(當頭)하니 동국학사(東國學士) 자취로다.

일신(一身)이 분쇄(粉碎)하니 혼령(魂靈)인들 온전할까.

아마도 만고청절(萬古淸節)은 삼충(三忠)인가.

 

뜻 마음이 요란하니 절 구경이나 가세.

합천(陜川)의 해인사(海印寺)요 영변(寧邊)의 묘향사(妙香寺).

그 중에 금강산(金剛山)이야 다 일러 무삼.

 

내장(內藏)은 추경(秋景)이요 변산(邊山)은 춘경(春景)이라

단풍도 좋거니와 채석(彩石)도 기이하다.

어찌타 광음(光陰)은 때를 찾고 사람은 몰라.

 

연광정(練光亭) 올라 앉아 강색(江色)을 굽어보니

백구(白鷗)는 편편(翩翩) 비오리 둥둥 어옹(漁翁)은 처처(處處) 한가하다.

우리도 진세(塵世)를 잊고 너를 좇아.

 

기행과 유람을 읊은 작품을 골랐다. 첫 수와 둘째 수는 중국 기행에서 보고 느낀 것을 적은 것이다. 첫 수에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山海關)의 망해정에 올라서 만리장성을 바라보며, 당초에 이 성을 쌓은 것은 북쪽 오랑캐를 막고자 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무례한 여진족인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고 있다고 한탄하였다. 그의 중화문물에 대한 숭상을 알 수 있다. 이미 근대적 문명이 중국을 통해 들어오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사대부들의 뇌리에는 병자호란에 대한 적개심과 여진족에 대한 멸시가 뿌리 깊게 도사리고 있었다. 둘째 수에서는 만주의 심양에 도착해서 병자호란 후에 붙잡혀 가서 죽었던 삼학사(三學士)인 윤집, 오달제, 홍익한의 자취를 상기하고, 그들이 화친을 거부하고 몸이 부서지고 혼령은 흩어졌지만 만고에 그 맑은 절개는 살아남았다고 찬양했다. 다시 한번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그는 인조의 동생인 능원대군(綾原大君)의 후손인 만큼 인조의 굴욕을 잊기 어려웠을 것이다. 셋째 수에서는 뜻과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흔들릴 때는 절 구경이나 가자면서 합천 해인사와 영변 묘향사를 들고, 금강산에 있는 절이야 그 풍광을 다 일러 무엇 하느냐고 경치 좋은 곳을 잔뜩 벌여 놓았다. 넷째 수는 전라도의 내장산과 변산반도를 추천한 것이다. 가을 경치는 내장산이 좋고, 봄 경치는 변산이 좋은데, 내장산은 단풍이고, 변산은 채석강도 볼만하다고 하였다. 빛과 그늘, 곧 세월에 따라 경치가 달라지는데, 세상사에 바쁜 사람들은 그것을 몰라서 아쉽다는 것이다. 마지막 수는 연광정에 올라가 강물을 본 느낌이다. 조선 중종 때 허굉(許硡)이 평양 대동강가 덕암 위에 세운 연광정에 올라가 강물 빛을 굽어보니, 흰 갈매기는 펄펄 날고, 비오리는 둥둥 떠가며, 어부들은 여기 저기 한가히 노닌다. 그러니 우리도 세상의 티끌을 잊어버리고 자연 속에 노닐자고 하였다. 갈매기와 비오리는 자연물이고, 어부는 자연 속에 묻혀 사는 사람이니 기행과 유람을 하면서 자연과 동화되고 싶은 심정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낚대를 둘러메고 강호(江湖)로 내려가니

뛰노나니 은린(銀鱗)이요 날리느니 백구(白鷗)로다.

아마도 사무한신(事無閑身)은 나 뿐인가.

 

녹음 수양리(垂楊裏)에 낚대를 드리었으니

한가하다 저 어옹(漁翁)아 너야 무슨 일 있으랴.

아마도 만고영웅(萬古英雄)은 태공(太公)인가.

 

단풍은 난만(爛漫)하고 황국(黃菊)은 반개(半開)로다.

한 잔 먹고 또 먹으니 취안(醉眼)도 단풍이라.

동자(童子)야 저() 불어라 나도 신선(神仙).

 

뒷 뫼에 약을 캐고 문전(門前)에 치포(治圃)로다

글 읽고 죽() 먹으니 안빈낙도(安貧樂道) 되리로다.

지금에 홍진사(紅塵事)를 들리지 말라.

 

세사(世事) 알아 쓸데없어 임천(林泉)에 돌아들어

삼척금(三尺琴) 희롱(戱弄)하니 백학(白鶴) 일쌍(一雙) 뿐이로다.

아마도 무한청복(無限淸福)은 이 뿐인가.

 

강호한정을 읊은 것을 골랐다. 첫 수에는 낚싯대를 들고 강과 호수에 내려가 은빛 고기를 잡고 흰 갈매기를 벗하니, 세상사에 매이지 않고 자연 속에 자재(自在)함은 자신뿐이라고 하였다. 세상의 잡다한 일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 노닐 때 무한한 자유를 느낀다는 것이다. 둘째 수에서도 녹음 짙은 수양버들 속에서 낚싯대를 드리운 어부를 보니 한가하기 그지없다는 것인데, 종장에서 갑자기 만고영웅은 태공이라고 하여, 강태공 여상(呂尙)이 위수(渭水)가에서 낚시질하다가 주()나라 문왕(文王)을 만나 스승이 되고 무왕(武王)을 도와 은()나라 주() 임금을 멸망시켰으니 만고영웅이라는 것이다. 낚싯대를 들고 한가함을 가장(假裝)하면서 야망을 감춘 것을 찬양하는 복합적인 심리상태를 노정(露呈)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진정으로 자연과 친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 자연에 숨은 것이고, 언제라도 기회만 있으면 세상을 휘어잡을 욕망을 버리지 않았다고 하겠다. 셋째 수는 국화꽃을 감상하고 술을 즐기며 신선이 된 듯한 기분을 표현한 것이다. 가을날 단풍은 절정을 이루고 노란 국화도 반쯤 피었는데, 두어 잔 술에 취한 몽롱한 눈에는 온 세상이 단풍들어 보인다. 그리하여 동자를 불러 피리를 불라고 시키니 마치 자신도 단풍과 국화와 술과 피리소리에 취하여 신선경에 든 듯하다는 것이다. 가을에 느끼는 취흥이라 하겠다. 넷째 수는 전원에 살면서 안빈낙도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뒷산에는 약초를 재배하고 문 앞에는 채전을 가꾼다. 비록 죽을 먹고 글을 읽는 가난한 살림이라도 안빈낙도하는 생활이다. 그러니 세상의 번거로운 일들을 듣고 싶지도 않고 간여하기도 싫다. 그가 이런 생활을 한 적은 없으니 아마 귀양살이 하면서 그려본 전원생활을 읊은 게 아닌가 생각된다. 마지막 수도 자연 친화의 삶을 읊은 것이다. 세상일에 관심을 끊고 숲과 샘물, 곧 자연 속에 돌아가서 석자 거문고를 연주하니 흰 학 한 쌍이 그 소리에 어울린다. 여기에서 학은 자연의 상징이므로 자신이 학과 동무가 된 상태, 곧 자연과 동화된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의 어떠한 복보다도 맑은 복은 바로 이 자연과 동화된 무한한 복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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