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이방원의 하여가 와 정몽주의 단심가

김영도 2018. 3. 25. 20:54


태종 이방원<1367~1422 ㅣ재위 1401~1418>

나라의 기초를 튼튼하게 잘 닦은 태종

- 조선 제3대 왕
- 생존 연도 : 1367 ∼ 1422
- 재위 연도 : 1401 ∼ 1418
- 활동 분야 : 정치
- 주요 활동 : 두 차례 왕자의 난을 거쳐 왕위에 오름. 왕권 강화. 의금부 설치
- 주요 작품 :「하여가」

 

태종은 어떤 생애를 살았을까?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와 첫째 부인 신의 왕후 한 씨 사이에서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방원은 어려서부터 성격이 곧고 불같으며 매우 호탕했다고 한다.

이방원은 1383년(고려 우왕 9) 문과에 붙어 밀직사 대언이 되었다. 이후 이방원은 새로운 인재들을 모아 아버지 이성계를 도왔으며, 그의 노력 덕분에 당시 권력을 잡고 사치를 누리고 있던 낡은 세력을 몰아내는 일을 잘 추진할 수가 있었다.

1392년 이방원은 아버지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데 방해가 되었던 고려 왕조의 충신 정몽주를 없애고 반대 세력을 무찌르는 등 조선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워 정안군으로 받들어 모셔졌다.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가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에게서 태어난 방석을 세자로 삼자 큰 불만을 품게 되었다. 계속 기회만 노리다가 어느 날 태조가 병들어 누워 있는 틈을 타서 이숙번 등과 함께 자신을 반대하는 정도전, 남은 등을 죽였다. 이들이 이방원 자신을 포함하여 신의왕후 한씨가 낳은 왕자들을 모두 없애려는 나쁜 계획을 세웠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어서 이방원은 신덕왕후의 아들인 세자 방석과 방번을 죽였는데, 이것을 제1차 왕자의 난이라 한다.

이방원은 일단 둘째 형인 방과(정종)에게 세자 자리를 양보하여 그가 세자가 되도록 만들었으며, 태조 이성계가 물러난 후에는 형 방과가 왕위에 오르도록 했다. 그리고는 뒤에서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했다.

1400년 왕의 자리가 탐이 난 넷째 형 방간이 박포와 함께 난을 일으키자 이방원은 이를 잘 막아낸 뒤 세제에 올라서 훗날을 기약했다.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이다. 세제로 있던 이방원은 형 정종에게 건의하여 개인이 가지고 있던 군사들을 모두 나라에 속하게 하고 개인이 군사를 갖지 못하게 했다. 이 바람에 지배 세력의 반발을 사게 되었지만 왕권은 더욱 강해졌다.

태종 이방원은 왕위에 있으면서 불교를 억누르고 유교를 크게 받들어 모시는 정책을 펼쳤다. 그는 전국에 242개의 절만 남기고 모두 없앤 뒤, 절이 가지고 있던 토지와 노비를 거둬들였다. 스님들의 반발이 거셌지만 그는 이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자신의 힘을 계속 키워 갔다.

또 민간에 널리 퍼져 있는 미신을 몰아내려고 애썼고, 오늘날의 신분증에 해당하는 호패를 늘 갖고 다니도록 하는 호패법을 실시하여 양반 관리에서부터 농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이 이를 지니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백성들의 수를 정확하게 알아서 세금을 제대로 거둘 수 있게 되었고,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있게 되었으며 각종 부정부패를 막을 수 있게 되었다. 세금을 제대로 거두는 한편, 봄 가을에 집집마다 내던 세금을 없애 백성의 부담을 덜어 주기도 했다.

태종은 나라를 지키는 일에도 큰 관심을 갖고 군대를 보내 오랑캐들을 무찌르거나 알아듣게 달랬다. 그래서 오랑캐들이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지 못하도록 해서 국경 지역을 안정시켰다. 글자와 기록의 소중함을 깨닫고 주자소를 세워 구리로 만든 활자인 계미자를 만들었으며, 하륜 등에게 「동국사략」 「고려사」 등을 펴내도록 했다.

그 외에도 태종은 실생활에서 사용하기 편리하게 종이 화폐를 만들어 경제 활동이 잘 되도록 했으며, 억울한 사정이 있는 백성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신문고를 설치하였다.

1404년 태종은 수도를 다시 송도(개경, 오늘날의 개성)에서 한성(한양, 오늘날의 서울)으로 옮겼으며, 14년 뒤인 1418년 자신의 아들 중 가장 총명했던 셋째 아들 충녕군(훗날의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뒤에서 끝까지 잘 도와주었다.

태종이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조선이 더욱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기틀을 튼튼히 닦은 덕분에 훗날 세종이 마음껏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태종에 관한 짧은 이야기 하나
이방원은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데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계속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몽주를 없애자고 말했지만 아버지 이성계는 크게 화를 내며 반대했다. 당시 정몽주는 충신이자 훌륭한 학자로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정몽주를 잘 달래서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방원은 정몽주가 자신의 아버지 이성계의 기대를 끝까지 저버릴 것으로 믿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방원은 마지막으로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정몽주를 자기 집으로 정중히 모셨다. 술상을 앞에 놓고 두 사람은 서로 마주 앉았다.

"정 대감, 제가 시를 한 수 읊어 보겠습니다. "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백 년까지 누리리.

이방원은 이 시를 통해 정몽주에게, 고려를 섬기면 어떻고 새 나라를 섬기면 어떻겠느냐고 물어 보면서 같은 편이 되어 오랫동안 잘 살아보자는 뜻을 내비쳤다. 이방원의 시를 듣고 정몽주가 말했다.

"나도 시 한 수 읊어 보겠소. "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는 자신의 시를 통해, 백 번을 죽는다 해도 고려 왕조에 충성하는 마음은 끝까지 변함이 없다는 뜻을 강하게 알렸다.

정몽주의 시를 통해 그의 굳은 마음을 알게 된 이방원은, 정몽주를 같은 편으로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안타깝지만 후환을 없애기 위해 부하를 시켜 집으로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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