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이맹균의 칠언절구 시

김영도 2018. 3. 25. 20:23

오늘 소개하는 시는 이맹균선생의 칠언절구가 되겠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슬하에 자식이 없음을 한탄하며 이 시를 지었나 봅니다. 유교의 윤리가 엄격했던 당시로서는 집안의 대를 이어갈 후사가 없다는 것은 조상에게 큰 죄를 짓는 일이요, 남들에게는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든 시절이라서 시인의 애통해 하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겠습니다.
인간의 기원까지 거론하여 시상을 펼치며,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한 선조들을 추모하면서, 자녀가 없음을 안타까워 하는 시인의 탄식은 읽는 이의 마음을 무겁고 안타깝게 합니다. 

題 : 탄무자(嘆無子/자식이 없음을 탄식함) 

自 從 人 類 起 於 寅 (자종인류기어인)
父 子 相 傳 到 此 身 (부자상전도차신)
我 罪 伊 何 天 不 弔 (아죄이하천불조)
未 爲 人 父 鬢 絲 新 (미위인부빈사신)

옛날부터 인류는 인(寅)에서 일어나
부자(父子)가 서로 전해 이 몸에까지 왔거니
내 죄가 무엇이건대 하늘이 돌보지 않아
남의 아비 되지 못한 채 머리가 세었는가 
 
<어휘>

自從 :  옛부터 저절로
起於寅 : 하늘은 자(子)에 생기고, 땅은 축(丑)에 생기고, 사람은 인(寅)에 생겼다는 옛말을 인용함.
伊何 :  如何, 어떠하기에
不弔 : 돌보지 않음.
未爲 :  ~하지(되지)않다.
鬢絲 :  귀밑에 난 흰털 

<지은 이>
이맹균(李孟畇, 1371-1440), 자는 사원(士原), 호는 한재(漢齋), 시호는 문혜공(文惠公)으로 목은(牧隱) 이색선생의 손주이다.

1385(우왕 11년)년에 문과에 급제후 성균직학, 내서사인, 예문관직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 태종조에는 사헌부집의, 성균관대사성, 예조참의, 충청감사를 지내며 개국 초기의 나라 일에 관여하였다.
세종 즉위 후 본격적으로 고위직에 나아가는 데 특히 세종 3년, 7년, 9년에 각각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대명(對明)외교에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후 경기감사를 시작으로 공조, 형조, 병조, 이조의 수장(首長)인 판서를 두루 역임하여 세종의 치세를 보필하였고, 나아가 세자의 스승인 좌빈객(左賓客)으로 왕세자를 지도하였다.
대사헌과 대제학을 거쳐서 의정부의 우찬성과 좌찬성을 지냈으며, 公은 글씨를 잘 쓰고 시와 문장에도 능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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