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맹사성(孟思誠)의 칠언 절구 시

김영도 2018. 3. 25. 20:37

맹사성(孟思誠)선생의 칠언 절구를 소개합니다.

김해지방에 있던 정자 연자루(燕子樓)에 올라 가야국의 흥망을 회고하면서 느낀 감회를 표현한 내용입니다.
인생의 부침(浮沈)과 한 국가의 흥망(興亡)도  지나놓고 보면 무상하게 느껴집니다만, 당시로서는 꼭 그렇게만 보이지 않기에 인간사회에는 늘 치열한 경쟁과 갈등이 존재하는 가 봅니다.
오늘 소개하는 시는 역사의 한 현장을 찾아 아득한 옛날을 되돌아 보는 회고시(懷古詩)의 하나라 하겠습니다.
 
題 : 燕子樓 (연자루에서)

駕 洛 遺 墟 幾 見 春 (가락유허기견춘)
首 王 文 物 亦 隨 塵 (수왕문물역수진)
可 憐 燕 子 如 懷 古 (가련연자여회고)
來 傍 高 樓 喚 主 人 (래방고루환주인)

가락의 남긴 터가 몇해나 지났는가
수로왕의 문물도 티끌로 돌아갔네
가련한 저 제비는 옛날이 그리운 듯
연자루 곁에 와서 주인을 찾는구나

 
<어휘풀이>

燕子樓 : 경남 김해지방에 있던 정자
首王 : 수로왕(가락국의 시조)
駕洛 : 가락국(지금의 김해), 가야국(伽倻國)이라고도 함
文物 : 문화에 관한 사물(事物) 곧 예악(禮악), 制度 따위
  
< 지은 이>
맹사성(孟思誠, 1360-1438), 자는 自明, 호는 고불(古佛), 본관은 신창(新昌)이다.
1386년(고려 우왕 12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춘추관 검열과 사인(舍人) 그리고 우헌납(右獻納)을 지내다.
조선왕조하에서 예조의랑(禮曹議郞), 동부대언(同副代言),이조참의(吏曹參議)등을 거쳐 예문관 제학(提學)으로 명나라에 시종관(侍從官)으로 다녀 오다. 태종조에 사헌부의 수장(首長)인 대사헌(大司憲)으로 재임중  왕의 사위인 조대림에 대한 고문 관련으로 왕의 노여움을 사서 처형의 위기에 까지 몰렸으나, 당시 영의정인 성석린의 변호를 힘입어 위기를 넘기기도 하였다.
그후로는 조정에서 비교적 순탄하게 승진을 거듭하여 세종 8년에 우의정, 동 13년에는 좌의정에 올라서 저 유명한 황희 정승과의 멋진 조화를 이루며 세종조의 치세를 열어간 분이다.
공의 부인은 고려조의 명장인 최영장군의 손녀이며, 공은 성품이 어질고 소탈하여 벼슬의 고하를 막론하고 정성으로 사람을 대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의 병환을 돌보기 위해 여러차례 관직 사퇴를 왕에게 청한 일이 있었다.
생활은 청렴결백하여 주어진 녹봉만으로 살림을 꾸려 가는 것을 철칙으로 삼아 후세인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문신(文臣)이면서도 음율에 조예가 깊어 나라의 음악을 관리하는 책임자로서의 임무를 담당하였고, 손수 악기를 만들어 즐길만큼 음악을 사랑하였다고 한다.
외부에 출입시는 늘 소(牛)를 타고 다니며 백성에게  누(陋)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였고, 평소에는 성품이 온화하나 일을 처리시 과단성 있는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조정 원로로서 국사에 기여한 바가 큰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