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주길

의주길 제3구간 쌍미륵길(용미3리~신산5리)

김영도 2015. 8. 6. 19:17

1.위치                     

용미3리/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신산5리/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신산리


2.교통

(갈때)부개역~서울역~703번 버스로 용미3리 정류장에서 하차한다

(올때)신산5리 정류장에서 703번 버스로 서울역~부개역

 

3.코스

용미3리~용암사~광탄삼거리~신산5리 

 

 


 

4.상세설명 

<마애이불입상>

거대한 천연 암벽에 2구의 불상을 우람하게 새겼는데, 머리 위에는 돌갓을 얹어 토속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까닭에 신체 비율이 맞지 않아 굉장히 거대한 느낌이 든다. 이런 점에서 불성(佛性)보다는 세속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는 지방화된 불상이다. 왼쪽의 둥근 갓을 쓴 원립불(圓笠佛)은 목이 원통형이고 두손은 가슴앞에서 연꽃을 쥐고 있다. 오른쪽의 4각형 갓을 쓴 방립불(方笠佛)은 합장한 손모양이 다를 뿐 신체조각은 왼쪽 불상과 같다.

지방민의 구전에 의하면, 둥근 갓의 불상은 남상(男像), 모난 갓의 불상은 여상(女像)이라 한다. 고려 선종이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元信宮主)까지 맞이했지만, 여전히 왕자가 없었다. 이것을 못내 걱정하던 궁주가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두 도승(道僧)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長芝山)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 틈에 사는 사람들이다. 매우 시장하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꿈을 깬 궁주가 하도 이상하여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곧 사람을 장지산에 보내어 알아 오게 하였는데,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다고 보고하였다. 왕은 즉시 이 바위에다 두 도승을 새기게 하여 절을 짓고 불공을 드렸는데, 그 해에 왕자인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 불상들은 고려시대의 조각으로 우수한 편은 아니지만, 탄생설화가 있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예로 높이 평가된다.

 

<윤관장군묘>

사적 제323호로, 지정면적은 16,938㎡이다. 이 묘소는 1111년(예종 6)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500여 년이 지난 임진왜란 전후까지 후손들에게 그 소재가 확인되지 않다가 1764년(영조 40) 윤관의 구비파편()이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영조가 봉분을 새로 조성하고 치제()하게 함으로써 윤관의 묘소임을 공인하게 되었다.

1766년 묘 앞에 현존하는 묘비를 세워 묘소를 찾게 된 경위를 기록하였다. 묘역시설로는 여충사(, 1979년 건립)ㆍ묘비()ㆍ분수재()ㆍ교자총비(, 철종 12년 건립하였으며 윤관이 출정 때 하사된 교자를 사후에 부장한 것) 등이 있다.

이 묘소를 사적으로 지정한 것은 묘소의 고고학적인 측면보다는 윤관이 견지하고 실행하였던 북방강토 수호 및 개척의 사실을 널리 알리고, 계승함에 있다.

 

5.탐방일자 

2015.08.06(목)

 

6.글쓴이

김영도(010-8121-8041)

 

7.생생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