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2

서울특별시 한양도성길 숭례문구간(백범광장~돈의문터)

김영도 2015. 6. 11. 16:07

1.위치

백범광장/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1가

돈의문터/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2가

 

2.교통

(갈때)동대문역 7번 출구로 나와서 한양도성길을 따라간다

(올때)종각~부개역

 

3.코스

백범광장~남대문시장~숭례문~남지터~대한서울상공회의소~배재공원~정동교회~이화여자고등학교~돈의문터

 

 

 

4.상세설명 

<숭례문>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의 우진각지붕 다포()집이다. 서울 도성의 남쪽 정문이라서 통칭 남대문()이라고 불린다. 1395년(태조 4)에 짓기 시작하여 1398년(태조 7)에 완성되었고, 1447년(세종 29)에 개축하였다. 그러나 1961∼1963년에 있었던 해체, 수리에 의한 조사에서 1479년(성종 10)에도 비교적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이 문은 중앙부에 홍예문()을 낸 거대한 석축기단 위에 섰으며, 현존하는 한국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석축 윗면에는 주위에 높이 1.17m의 벽돌로 된 여장()을 돌려 동·서 양쪽에 협문()을 열었고, 건물의 외주() 바닥에는 판석()을 깔았다.
건물 내부의 아래층 바닥은 홍예 윗면인 중앙간()만을 우물마루로 하고 나머지는 흙바닥이다. 지붕은 위·아래층이 모두 겹처마로 사래 끝에는 토수()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잡상()과 용머리[], 그리고 용마루 양가에는 독수리머리를 올렸다.
이 건물은 특수한 목적을 가진 성문이기 때문에 천장을 가설할 필요가 없어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특기할 것은 이 건물의 지붕 형태가 어느 시기에 변경된 것인지 뚜렷하지 않으나 당초에는 평양 대동문 또는 개성 남대문과 같은 팔작지붕이었다는 것이 해체, 수리 때의 조사에서 드러났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현존하는 서울의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2008년 2월 10일에 발생한 화재로 2층 문루가 소실되고 1층 문루 일부가 불에 탔다. 홍예문과 석축은 남았다.
화재 이후 수습 작업 및 복구를 위한 각종 연구를 진행한 후 2010년 2월 착공식을 거행하고 복구 작업을 시작하였다. 복구 작업은 역사적 고증을 토대로 전통 방식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기존의 것에서 살릴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살리고, 그 위에 불탄 부분을 재현하였다. 전통 기와를 올리고, 일제 시대에 일본에 의해 변형된 부분들을 다시 되돌려 놓는 데 주력했다. 이로써 숭례문은 약 3년의 복구 공사를 거친 뒤 2013년 5월 4일 복구 기념식을 거행하고 시민에게 공개되었다.

 

<돈의문터>

조선시대 서쪽에 있던 대문()인 돈의문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대문 가운데 서쪽의 정문이다. 서쪽의 큰 문이라 하여 서대문(西)이라고도 한다. ‘새문’, ‘신문’이라고도 불렸다. 서울시 중구 정동의 ‘신문로’, ‘새문안길’, ‘새문안교회’등의 이름은 돈의문의 다른 이름인 ‘신문’, ‘새문’에서 따온 말이다. 태조 이성계는 한양에 8개의 문을 만들었다. 그 중 4개는 대문이고 나머지 4개는 소문이다. 여기서 돈의문은 4개의 대문 중 하나이다.
한양에서는 일정한 시간마다 모든 성문을 여닫았다. 이를 통해 문들은 수도 방위뿐만 아니라 수도의 치안을 유지하고 사회질서를 확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돈의문()은 의()를 돈독히 하는 문이라는 뜻이다. 돈의문은 태종 때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폐쇄되고 대신 돈의문 남쪽에 서전문(西)을 세웠다. 세종이 도성을 보수할 때 서전문을 헐어버리고 새로 문을 세웠는데 그 이름을 돈의문이라 했다. 돈의문은 약 410년 동안 인정()(28번의 종소리)와 파루()(33번의 종소리)에 문을 열고 닫으며 사람들의 통행을 제한했다. 돈의문은 1915년에 일제의 경성도시계발계획에 따른 전차의 복선화로 인해 강제로 헐렸다.
서울시는 2013년까지 돈의문을 원형 그대로 복원할 예정이다.

 

5.탐방일자

2015.06.10(수)

 

6.글쓴이

김영도(010-8121-8041)

 

7.생생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