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2

서울특별시 한양도성길 백악구간(창의문~혜화문)

김영도 2015. 6. 1. 11:22

1.위치

창의문/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혜화문/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2.교통

(갈때)경복궁역3번 출구로 나와서 7212번 버스로 환승하여 자하문고개에서 하차한다

(올때)동대문역~부개역

 

3.코스

창의문 - 숙정문 - 말바위 안내소 - 와룡공원 - 혜화문

 

 

 

 

4.상세설명

<창의문>

북문() 또는 자하문()으로도 불린다. 1396년(태조 5) 서울 성곽을 쌓을 때 세운 사소문()의 하나로 창건되어 창의문이란 문명()을 얻었다. 북한() ·양주() 방면으로 통하는 교통로였으나 1416년(태종 16) 풍수지리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이 곳의 통행이 왕조에 불리하다 하여 폐문()한 채 일반의 통행이 금지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다시 열어놓았다. 1623년 인조반정() 때는 능양군(:인조)을 비롯한 의군()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에 들어가 반정에 성공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문루()는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740년(영조 16) 다시 세우고 다락 안에 인조반정 공신들의 이름을 판에 새겨 걸었다. 1958년 크게 보수하였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우진각 기와지붕으로 서울 사소문 중에서 유일하게 완전히 남아 있는 문이다.

 

<숙정문>

1413년 풍수지리학자 최양선()이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린 뒤에는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이후 숙청문은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에 해당하는 까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를 위해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한다.
숙청문이 숙정문으로 바뀐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숙정문이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523년(중종 18)이다. 숙정문 외에 북정문()이란 표현도 나오는데, 숙청문과 숙정문이 혼용되다가 뒤에 자연스럽게 숙정문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1504년(연산군 10)에 연산군이 원래 있던 자리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옮기라고 명령한 기록이 보이는데, 실제로 문을 옮겼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지금의 숙정문은 1976년에 복원한 것이다.
도성 북문이지만, 서울성곽의 나머지 문과는 달리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해 실질적인 성문 기능은 하지 않았다. 1968년 1·21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다가, 2006년 4월부터 서쪽 성곽 0.5㎞, 북쪽의 진입로 0.6㎞ 구간과 함께 다시 일반에 개방하기로 하였다. 1963년 1월 21일 서울성곽에 포함되어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 2-1번지(북악산 동쪽 고갯마루)에 있다.

 

<혜화문>

동소문()이라고도 한다. 도성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이 설치되었는데, 이 문은 동문과 북문 사이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문 이름을 홍화문()이라 하였다가 1483년(성종 4)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을 홍화()라고 정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1511년(중종 6) 혜화로 고쳤다.

1684년(숙종 10) 문루()를 새로 지은 후 한말까지 보존되어 오다가 1928년 문루가 퇴락하였으므로 이를 헐어버리고 홍예()만 남겨 두었는데, 일제는 혜화동돈암동 사이의 전차길을 내면서 이마저 헐어버려 그 형태도 찾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당시 북문(북대문)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 문은 양주·포천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한 출입구 구실을 하였다. 1975년부터 시작되어 1980년에 완공된 서울성곽의 일부로 1992년에 복원하였다

 

5.탐방일자

2015.05.29(금)

 

6.글쓴이

김영도(010-8121-8041)

 

7.생생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