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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강화도 탐방기(강화나들길 제9구간 교동도 다을새길16k 대룡시장~대룡시장)

김영도 2014. 9. 28. 16:55

1.위치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일대

 

2.교통

(갈때)구래리정류장에서 90번 버스를 타고 강화터미널 도착후 18번 버스로 환승하여 대룡시장정류장에서 하차한다

(올때)대룡시장정류장에서 18번 버스로 강화터미널 도착후 90번 버스로 환승하여 부평역정류장에서 하차한다

 

3.코스

 

 

 

4.상세설명

                     

<교동도>

교동도도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에 속하는 섬. 강화도 북서부에 위치한다. 면적 46.90㎢.

이칭별칭 달을참(達乙斬), 고목근(高木根), 교동(喬桐), 대운도(戴雲島), 고림(高林)
유형 지명
성격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규모(면적|높이|길이) 면적 47.14㎢, 동서길이 10㎞, 남북길이 6㎞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에 속하는 섬.

개설

강화도 북서부에 위치하며, 동경 126°16′∼126°21′, 북위 37°45′∼37°00′에 위치한다.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양사면과 내가면이 있고, 남쪽으로는 강화군 삼산면 석모도가 있다. 북쪽으로 불과 2~3㎞의 바다를 끼고 황해도 연백군이 있다. 따라서 섬 북부에서는 황해도 땅을 쉽게 바라볼 수 있으며, 좀 높은 곳에서는 예성강 하구를 볼 수 있고, 맑은 날에는 개성 송악산도 바라볼 수 있어, 실향민들이 화개산 산정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망향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명칭 유래

교동도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달을참(達乙斬), 고목근(高木根), 교동(喬桐)으로 바뀌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달을참이란 ‘크고 높은 산이 있는 고을’이라는 의미를 가진 지명이라고 전한다. 대운도(戴雲島), 고림(高林)이라고도 불렸다.

자연환경

고도가 매우 낮은 섬으로 높이 0∼10m의 지역이 섬의 3분의 2를 이루고 있으며, 마식령산맥 서단에 해당한다. 가장 높은 산은 화개산(華蓋山, 260m)으로 이 섬의 주산을 이루며, 봉황산(75m)·율두산(89m)·고양이산(35m)·수정산(75m) 등 모두 100m 이하의 낮은 구릉들이다.

연백에 면한 동북해안은 제방을 쌓아 고구(古龜)의 관개용 저수지의 완성으로 경지확장 및 경지정리를 하였다. 해안선은 단조로우며, 연안의 저지(低地)는 이질(泥質)인 갯벌로 되어 있어서 어항의 발달은 불리하고, 간만의 차도 커서 선박의 출입도 그리 편리하지 못하다. 섬인 까닭에 한서의 차는 내륙에 비하여 작으나 언제나 해풍이 비교적 강하게 불며, 겨울에는 해안의 유빙으로 한기를 더욱더 조장한다.

내륙에 비하면 겨울이 빠르고 여름이 늦어 환절기에는 해상의 기류가 고르지 않아 때때로 소나기·회오리바람을 몰아오며, 때로는 서리나 우박이 내리는 등 날씨가 고르지 못하다. 연평균기온은 11.2℃, 연강수량은 1,390㎜이다.

상고시대에 이 섬은 개화산·율두산·수정산을 중심으로 세 개의 섬으로 되어 있었으며, 교동평야에는 언제나 조수가 흘렀고, 그것이 그 뒤 하나의 섬으로 변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개화산 중턱에서 볼 수 있는 화석이 된 조개껍질이나 현 해안선에서 내륙에 위치한 패총의 흔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 남쪽에 있는 석모도 상주산 사이의 바다가 육화(陸化)되어 인마가 내왕할 수 있었다가, 1578년(선조 14)경 다시 바다로 되어 간조 때 외에는 인마가 내왕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로 보아, 후빙기 이후 범세계적인 해면변동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하천의 발달도 드물고, 작은 계류가 있을 뿐이다.

형성 및 변천

고구려 때에는 고목근현(高木根縣)이라 불렸고, 신라 경덕왕 때부터 교동이라 불려 혈구현(穴口縣)에 속하였다. 고려시대에도 교동이라 일컬었으며, 고려 명종 때 감무(監務)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1395년(태조 4)에 만호(萬戶)와 지현(知縣)을 두었으며, 그 뒤 이를 고쳐 현감이라 일컬었다. 1629년(인조 7) 화량진(花梁鎭)으로부터 수영(水營)을 교동 원권진(현 읍내리)으로 이전하면서 현을 부로 승격시키고 수군절도사 겸 부사를 두었다.

1633년 서남해의 방어를 더한층 강화하기 위하여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를 교동에 두고, 삼도, 즉 경기·황해·충청의 주사(舟師)를 통괄하게 하였다. 1777년(정조 1)에 이르러 교동부사를 격을 낮추어 현감으로 하였다가, 1779년에 통어사가 강화로 이속되면서 교동현감은 다시 부사 겸 방어사로 승격되었다. 1789년에 통어영(統禦營)이 다시 교동으로 옮겨왔다.

1866년(고종 3) 통어사가 다시 강화로 이속되면서 부사 겸 방어사로 하였다가, 같은 해 8월 또다시 통어사를 두었다. 1884년 해방영(海防營)에 통어사가 이속되어 부사 겸 통어사로 격이 내려갔다. 1895년 행정개편에 따라 읍을 폐하여 강화에 이속하였다가 1896년 읍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강화군에 속하게 되면서, 개화·수정의 두 면을 두었다가 1934년 두 면이 교동면으로 통합되었다.

현황

인구는 광복 당시 8,644명이었던 것이 6·25전쟁 뒤 많은 피난민으로 1965년에는 1만2443명에 달해 최고를 이루었다. 그러나 1972년부터 점차 감소하고 있으며, 1977년부터 감소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2009년 5월 현재 교동면 인구는 3,132명이고 세대수는 1,389호이다.

2006년 현재 교동면 전체 면적은 47.14㎢이고 논 25.89㎢, 밭 2.57㎡, 임야 11.45㎢이다.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교동토의 간척은 일제강점기와 현대에 까지 지속되었다. 이로써 형성된 저평한 평야가 넓고, 완비된 경지정리·수리시설 기계화 등으로 쌀의 생산량은 섬의 자급자족을 넘어 다른 지방으로 나가며, 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감자 등과 임산물은 밤·대추·버섯 등이 생산된다.

그리고 밭에서 하는 인삼재배가 농가의 부업으로, 완초공예품은 강화도의 화문석처럼 그 이름이 높다. 완초공예품으로는 화방석·꽃삼합·광주리·손가방·화문석 등 다양하며, 그 가운데 화방석과 꽃삼합은 대도시로 팔려나가는데, 수익성이 높아 오랜 전통을 오늘날까지 지속하고 있다.

6·25전쟁 이전에는 4개의 정기연락선이 있어 육지와 서해도서가 자유롭게 연락되었으나, 전쟁 이후 매우 불편해졌다. 그러나 서울과의 연결은 강화도 창후리에서 수시로 배가 있고, 연안도서를 연락하는 선편이 있으나 불편한 편이다. 육지와 격리된 섬인 까닭에 고려 중엽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유배지로 이용되었고, 지리적 위치상 외세의 침범이 빈번했던 관계로 섬에는 많은 고적이 남아 있다.

1629년에 축조된 읍성지(邑城址), 1173년경 축조된 것으로 추측되는 화개산성지, 교동구현허(喬桐舊縣墟)를 비롯하여, 고려 희종이 유배되어 기거하던 경원전(慶源殿)과 철종잠저소(哲宗潛邸所)·봉수대(烽燧臺)·단묘(壇廟) 등과 그 밖에도 많은 유적들이 있다. 또, 명승지로는 교동팔경이 있고, 화개사·교동향교 등은 화개산 남쪽에 있다.

오염원과 축산농가가 없어 맑고 깨끗한 농업용수로 농사를 지어 생산한 교동쌀이 이름있다.

 

<대룡시장>

월선포 선착장에서 큰길을 따라 4~5킬로미터를 가면 대룡시장이다. 교동도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라고는 하지만 여느 지방의 읍내보다도 작은 규모다. 골목은 짧다. 길이는 400미터 남짓. 빠른 걸음으로 10분이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 골목은 어른 두 명이 나란히 걸어갈 만한 폭이다. 칠이 벗겨진 창틀, 손으로 꾹꾹 눌러선 입간판, ‘선팅’이 벗겨진 유리문……. 붉은 보도 블록이 깔린 길은 울퉁불퉁하다. 짧은 골목이지만 있을 건 다 있다. 미장원과 분식집, 통닭집, 전파사, 시계점, 이발관, 신발가게, 잡화점 등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길게 늘어서 있다. 재미있는 것은 간판이다. 모두가 ‘그 때 그 시절’에나 보았을 법한 낡은 것들이다. 글자가 지워진 것도 있고 덧칠된 것도 있다. 가게 이름도 간판의 모양만큼이나 정겹다. ‘민욱이네 담배 잡화’, ‘돼지네 식품’, ‘희망소리사’, ‘중앙신발’, ‘연지곤지’, ‘임득남 미용실’, ‘붉은노을 호프 치킨’, ‘와글와글 식당’ 등등.촌스러운 간판 이름에 피식 하고 웃음이 나온다.

골목 입구 ‘강화상회’에 슬쩍 들어가 보았다. 유리문에는 ‘의류, 아동복’이라고 커다랗게 씌어져 있다. 가게 안에는 온갖 알록달록한 옷이 빼곡히 걸려 있다. ‘몸뻬’ 바지와 요란한 색깔의 꽃무늬 블라우스, 아이들 양말과 삼선 무늬 선명한 ‘추리닝’이 가득하다. 제법 쌀쌀해진 날씨 때문일까, 할머니 한 분이 손자 내복을 사주려고 오셨나 보다. 이것저것 골라보는 와중에 주인 아주머니가 한마디 거든다. “이런 게 최신 유행이야. 요즘엔 내복도 이렇게 ‘패션스럽게’ 나와.” 주인 아주머니가 골라 준 내복에는 활짝 웃는 미키마우스 그림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다. ‘중앙신발’ 가게 좌판에는 비닐봉지에 싼 실내화와 운동화, 고무 슬리퍼가 쌓여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약국도 여기선 ‘약방’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다. “6.25 사변 나고 황해도에서 피란민들이 많이 들어왔지. 나도 그때 내려왔어. 고향은 연백이야. 곧 돌아갈 수 있으려니 했는데 벌써 50년이 됐네.” 지광석(70) 할아버지는 대룡시장 골목에서 50년 동안 ‘교동이발관’을 운영했다. 이발관 안에는 할아버지의 손때 묻은 가위며 면도기, 빗, 헤어드라이어 등 이발 도구가 단정히 놓여 있다. 머리를 감는 세면대에는 하얀 타일이 깔려 있다. 면도 거품 냄새가 포근하다. “여기 피란 왔을 때만 해도 시장이라는 것이 딱히 없었어. 집이 두어 채 서 있는 게 다였지. 피란민들이 몰려들면서 마을이 커지기 시작했어.”

 

<교동읍성>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되었다. 둘레는 430m, 높이는 약 6m이다.

1629년(인조 7)에 축조된 읍성으로 동남북 세 곳에 성문이 있고 각 문에는 문루(門樓)가 세워졌는데, 동문은 통삼루(統三樓), 남문은 유량루(庾亮樓), 북문은 공북루(拱北樓)라 하였다. 1753년(영조 29) 성곽을 고쳐 쌓았고 1884년(고종 21) 성문을 다시 세웠으며, 1890년(고종 27) 동문과 북문을 다시 세웠다. 현재 동문과 북문은 남아 있지 않으며, 남문인 유량루는 1921년 폭풍우로 무너져 홍예(虹霓)만 남아 있다.

 

5.탑방일자

2014.09.27(토)

 

6.글쓴이

김영도(010-8121-8041)

 

7.생생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