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성 탐방기

서울특별시 몽촌토성 탐방기

김영도 2012. 12. 10. 13:14

1.위치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륜동 88-3

 

2.교통

8호선 강동구청역

 

3.요약

夢村土城 地形圖

 

몽촌토성은 남한산(南漢山)에서 뻗어 내려 온 표고 44.8m의 잔구상(殘丘狀)의 자연구릉을 이용하여 구축한 것이어서 성벽의 축조기법은 구지형(舊地形)에 따라 몇가지 차이가 있다. 첫째, 자연구릉의 구지형이 다른 지점보다 낮은 부분은 판축기법으로 성토하여 성벽을 축조하였으며, 둘째, 자연구릉이 연결되지 않은 지점에도 판축기법으로 성벽을 쌓아 양쪽 구릉의 말단부(末端部)가 이어지도록 하였다. 셋째, 자연지형이 그대로 성벽으로 이용된 지점의 경우 성의 외벽면을 삭토(削土)하여 급경사와 단을 이루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급경사면과 단은 당초 자연지형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성벽 정상부에서 기연부(基緣部)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2-3회 정도 반복되고 있다. 성 기부(基部)에 가까운 단에는 목책(木柵)이 설치된 경우도 있었다. 넷째, 치(雉)와 같은 기능을 가진 이른바 외성 역시 자연지형을 거의 그대로 이용한 것인데 그 북쪽 사면은 본성(本城)의 외벽과 마찬가지로 인공을 가했으며 정상부에는 목책을 설치하였다.

이 토성의 규모는 남북최장(南北最長) 730m, 동서최장(東西最長) 570m의 마름모꼴의 평면을 하고 있으며 성벽의 길이는 성벽 정상부를 기준으로 하여 서북벽 617m, 동북벽 650m, 서남벽 418m, 동남벽 600m로서 전체 길이는 2,285m에 달한다. 그리고 동북벽에 연이어 동북쪽으로 약 270m 가량 뻗어나간 성벽이 있는데 이는 일종의 치(雉)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시설로 보인다. 성내부 면적은 성벽 정상부를 기준으로 하면 216,000㎡(총 67,400평)가량 된다. 성벽의 규모는 지역에 따라 얼마간의 차이가 있으나, 절개조사된 서북벽, 동북벽 등 2개 지점을 대상으로 하여 구지형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성벽 기저부 폭은 50-65m, 높이 12-17m, 상부 폭 7.5-10.5m 정도이다.

성벽과 관련된 부대시설로는 해자(垓子)와 목책(木柵) 등이 확인되었다. 먼저 해자는 서북벽과 동남벽 아래에서 각각 그 흔적이 드러났는데, 대체로 성벽 외측 기부(基部) 현 지표 아래 3m 지점에서 수성퇴적토(水成堆積土)인 뻘흙이 노출되는 점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 지점은 성벽 정상부로부터는 약 30m 떨어져 있는 위치에 있었으나 해자의 폭이나 깊이 등에 대해서는 조사범위가 제한되어 있어 자세히 밝힐 수 없었다. 몽촌토성의 해자는 완전하게 인공으로 축조된 것이라기 보다는 성 주위(周圍)를 감고 흐르고 있는 한강(漢江) 지천인 성내천(城內川)의 유로(流路)를 이용하여 일부 개착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조사결과로 당시 해자 모습을 추정해 보면 남문 부근을 제외한 성벽의 3면을 에워싸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폭과 깊이는 전술한 것처럼 잘 알 수 없는데 경주(慶州) 월성(月城) 해자 경우는 폭이 40m, 깊이가 약 2m 정도인 것으로 밝혀져 있어 이곳 몽촌토성 해자규모 추정에 참고가 된다.

목책은 본성(本城)의 서북벽과 동벽에서 각각 확인되었다. 본성의 경우 외벽면상 단상(段狀)의 지점에 설치되어 있었으며, 치성(雉城)에는 성벽의 정상부에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조사시 드러난 목책은 직경 0.4-0.5m의 주 기둥을 깊이 0.3-0.9m 가량 박아 약 1.8m 간격으로 배열한 다음, 그 주위에 다시 보조 기둥들을 세운 방식이었다. 조사지역의 제한으로 인해 목책공(木柵孔)이 드러난 지점은 성벽 절개조사가 실시된 전술한 3개 지점에 불과하나, 당시 성벽의 외사면에는 이러한 목책이 설치된 곳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몽촌토성에는 3개소에 문지가 시설되어 있다. 이 3개소의 문지들은 모두 조사 당시 성벽이 이어지지 않고 있었던 곳들로 성내외로의 출입구로서 뿐만 아니라 분지상의 성내부에 집수된 우수 등의 배수로로서의 역할도 겸하고 있던 지점들이었다. 발굴조사 결과 북문지의 문 폭은 약 10여m, 동문지는 약 7m, 남문지는 약 10여m의 폭으로 시설되어 있었다.

북문지를 중심으로 성문의 구조를 살펴보면 전체 10여m의 문폭 가운데 서쪽의 5m 정도되는 부분은 성벽 기부(基部)에 이어져 편평하게 판축성토되어 노면처럼 되어 있었으며, 나머지 동쪽 7m 정도의 부분은 깬돌(割石)들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 보고서에서는 이 부분을 수구로 추정하고 있으나 그 근거는 확실하지 않은 듯하다. 그 밖의 건축물 흔적은 없었으나 현 표토 약 2.5m 아래에서 다량의 목탄(木炭)이 노출되고 있어 성문시설과 관련이 있었던 어떤 구조물의 잔해가 아닌가 생각된다.

몽촌토성 성벽에는 4개소에 망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역시 당시의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3-5m 정도 판축성토하여 만든 것인데 몽촌토성의 마름모꼴 평면을 그 동서남북 꼭지점을 기준으로 사분(四分)할 때 각 변마다 1개소씩 배치되어 있다. 서북망대지는 몽촌토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해당되는 표고 44.8m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곳에서는 석촌동(石村洞), 잠실(蠶室), 풍납동(風納洞) 등이 조망된다. 이곳에는 백제시대이래 건물지가 중첩되어 있었으나 백제 당시의 건물에 대한 구체적인 형상은 파악할 수 없었다.

동북망대지는 북문지와 동문지 사이를 잇는 성벽상에서 가장 높은 지점인 표고 33.4m의 봉우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은 치성(雉城)과 연결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조사결과 주변 성벽보다 최소한 3m 이상을 판축하여 구축하였으나 건물의 흔적은 확인하지 못하였다.

서남망대지는 남문지의 서쪽 성벽 정상부 표고 37.3m의 봉우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방이동(芳荑洞), 가락동(可樂洞), 석촌동(石村洞) 등 성의 서남부 지역을 잘 조망할 수 있다. 이 곳 역시 주위의 성벽보다 3m 정도 높게 판축성토하여 만들었으나 건물의 흔적은 확인할 수 없었다.

동남망대지는 동남쪽 성벽의 가운데 지점인 표고 37.5m 봉우리에 위치하고 있어 남한산성(南漢山城)과 몽촌토성 사이의 평야지대를 관망하기 용이한 지점이다. 조사결과 원지형보다 약 5m 가량 판축성토하여 만든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특별한 시설물은 드러나지 않았다.

몽촌토성에서 현재까지 밝혀진 한성시대 백제 시설물로는 적심석(積心石)을 갖추고 있는 지상 건물지 1기, 판축성토대지(版築盛土臺地) 1개소, 수혈주거지(竪穴住居址) 9기, 저장공(貯藏孔) 31기, 저장공과 유사한 방형유구(方形遺構) 2기, 적심유구(積心遺構) 7기, 지당지(池塘址) 2개소 등이 확인되었다. 몽촌토성은 3세기 후반이래 475년까지 약 2세기에 걸쳐 도성으로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당시의 다양한 시설들이 더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적심석(積心石)을 갖춘 건물지는 서남지구 표고 35-40m 사이의 고지대에서 드러난 것으로 판축대지(版築臺地) 유구와 마주보고 있는 정면 4칸, 측면 2칸 이상되는 동향(東向)으로 배치된 지상 건물지이다. 이 건물지는 이 보다 앞서 축조된 장방형의 건물지가 폐기된 후 약 0.5m 정도 성토(盛土)한 다음 축조된 것으로 몽촌토성(夢村土城)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된 구조가 정연한 지상 건물지로 이 성내(城內)에서는 매우 비중 있는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축조방식을 보면 먼저 벽체 윤곽을 따라 폭 0.3m, 깊이 0.4m 가량을 파내고 그 속에 주먹만한 크기의 자갈을 채워 벽 기초를 하였으며 다시 이 벽 기초들 사이에 기둥이 들어설 부분은 직경 0.7-0.8m 가량 되게 적심을 넣은 띠기초와 독립기초를 혼합한 기초방식을 채택하였다. 기둥간 간격은 정면이 5.5m, 측면이 3m이다.

또한 적심들만이 일부 확인된 동북향한 건물지가 있는데 단변(短邊)은 약 3m, 장변(長邊)은 최소 15m 정도로 추정된다.

판축대지(版築臺地)는 앞의 적심석(積心石)이 있는 건물지로부터 동쪽으로 25m 정도의 거리에 평면이 방형인 10×10m 규모의 판축대지(版築臺地)가 확인되었다. 이 유구는 생토인 풍화암반토(風化巖盤土)를 파내고 점성이 강한 점토와 풍화암반토를 교대로 다져 성토(盛土)하였는데, 4변 방향이 앞의 적심석이 있는 건물지 각 변과 평행하게 되어 있어 동일한 공간기획에 따라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 부근의 지당지(池塘址)와 더불어 일종의 정원(庭園) 내에 만들어진 사대지(사臺址)로 추정된다. 이 판축대지의 축조시기는 대체로 한성 2기인 A.D. 4세기 후반-5세기 중엽에 해당할 것으로 보고 있다.

지당지(池塘址)는 성내의 서남구획에서 2개소가 확인되었다. 그 중 1개소는 앞의 적심건물지 및 판축대지와 더불어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또 다른 하나는 남문지 부근의 저지대에서 조사되었다.

먼저 고지대의 연못은 평면이 타원형으로 그 규모는 장경(長徑)이 약 30m, 단경(短徑)이 약 15m 정도이며, 깊이는 일정치 않으나 가장 깊은 곳은 약 2m 가량 되는데, 호안석 등 부대시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 지당지(池塘址)는 일종의 조경지(造景池)로서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연못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백제본기〉진사왕 7년(391)조에 보이고 있는데 발굴조사시 연못의 퇴적토에서 수습된 토기들의 연대와 문헌기사의 연대가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저지대 남문지 근처의 연못지 역시 그 일부분만이 조사되었는데 평면은 동남-서북방향을 장축으로 하는 부정형에 가까운 방형으로 한변의 길이는 약 20m 정도이며, 연못 중심부 깊이는 약 1m 정도이다. 이 연못의 호안(護岸)에도 역시 석축 등의 시설은 없었는데 이것이 당시 모습인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 내부 퇴적토에서 출토된 유물로 보아 이 연못은 고구려에 의해 몽촌토성(夢村土城)이 장악된 이후에도 그대로 존속하고 있었으며 조선초에 이르러 자연매몰된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본기(百濟本紀)』 비류왕 21년(447)조에 나타나는 ‘궁남지(宮南池)’가 곧 이 연못을 지칭하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설도 있다.

수혈 주거지(竪穴 住居址)는 대체로 구릉성의 고지대에서 9채가 드러났는데 그 중 3채는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그 위치가 동문지 바로 남쪽 성벽상의 평탄면에 위치하고 있고 이들 유구에서는 철모(鐵矛), 준(준: 창고달), 철도(鐵刀) 등의 무구류가 출토되어 성의 방수와 관계 깊은 군사적 용도의 수혈유구로 생각되며, 나머지 규모가 작은 6채는 당시 민호들의 가옥으로 추정된다.

88-2호 주거지의 평면은 상하 두 변이 긴 6각형으로서 6각형의 짧은 두 변이 만나는 한 꼭지점 부분에 출입구를 시설하였다. 긴 옆벽의 길이는 약 6m이고 짧은 벽은 약 4m 정도이다. 긴 벽은 약 0.5m 간격의 기둥구멍이 10개씩 배치되어 있고, 짧은 앞·뒤벽에는 4-5개의 기둥구멍이 있는데 주거지 내부에서는 기둥구멍이 확인되지 않았다. 기둥구멍의 평면형태는 4각으로 그 크기는 대체로 한 변이 0.2-0.3m 정도이나 각 모서리에는 40-50㎝ 정도로 커지고 있어 무게의 하중을 받도록 시설되었으며, 깊이는 0.2-0.3m 정도 수직으로 파여 있다. 주거지 내부에서는 약간의 불탄 흙이 바닥면에서 확인되었으며, 화덕과 같은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88-2호 주거지는 주거지의 위치가 동문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성벽 정상부분이라는 점과 주거지 바닥 사용면에서 출토되는 유물이 장도(長刀), 철모(鐵矛) 등의 무기류가 주를 이루고 있는 점으로 볼 때 수성(守城)과 관련 있는 일종의 군사적 성격의 건물로 판단된다.

저장혈(貯藏穴)은 모두 31개소가 조사되었는데, 단면형이 절두(截頭) 원추형(圓錐形)인 구덩이들로 이들 규격은 일정하지 않으나 가장 소형의 것은 입구 직경 1.5m, 바닥 직경 2.4m, 깊이 0.8m 정도이며 대형의 경우는 입구 직경 1.2m, 바닥 직경 3.6m, 깊이 2.7m 정도로 서로 차이가 큰 편이다. 이들을 지금까지 저장공(貯藏孔) 또는 저장혈(貯藏穴)로 지칭하여 왔는데 실제로 어떤 경우에는 대형호(大形壺) 등의 저장용기가 드러난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이런 유구에서는 특별한 저장 흔적도 찾기 어려운 예도 확인되었는데, 이런 유구들은 성곽의 경우 함정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몽촌토성의 성벽 정상부에서는 직경 0.2m 내외의 냇돌(川石)을 모아 놓은 적석유구들이 7개소에서 확인된 바 있는데, 이 유구들은 수성(守城)시에 투석에 쓰기 위한 일종의 준비물로 판단된다.

 

4.탐방일자

2012.12.08(토)

 

5.글쓴이

김영도 010-2888-8041

 

6.주요 촬영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