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이정귀의 시

김영도 2020. 8. 18. 22:42

이정귀(李廷龜, 1564-1635)는 선조․광해․인조 때의 문신이다. 실록과 <연려실기술>, <국조인물고>에 의하면, 자는 성징(聖徵)이고 호는 월사(月沙)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으로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진사를 거쳐 27살(1590)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사관이 되었다. 임란이 나자 행재소에서 설서(說書)가 되고, 이듬해 명나라 경략 송응창(宋應昌)과 <대학>을 토론하고 육상산(陸象山)과 정주(程朱)의 학설 차이를 밝혔다. 병조․이조좌랑이 되었으나 부친상을 당했다. 정유재란 후에 병조정랑, 교리가 되어 명나라 장수들을 응대하는 데 실수 없이 주선하여 왕의 칭찬을 받고, 동부승지, 병조참지가 되었다. 35살에 조선이 왜병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치려한다는 무고가 있자, ‘조선국변무주문(朝鮮國辨誣奏文)’을 지어 명나라에 가서 무고임을 밝혔다. 37살에 예조판서가 되고, 대제학, 지성균관사, 좌참찬이 되었다. 41살에 세자책봉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조천기행록(朝天紀行錄)’을 지어 간행했다. 경기관찰사로 나갔다가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광해 즉위 후에 병조․이조․예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냈으나 50살(1613,광해5)에 계축옥사가 일어나 김제남과 교유한 일로 사직했다. 다시 형조․호조판서, 판중추부사를 지내고 여러 번 중국에 다녀왔다. 55살 폐모론에 참여치 않았으며, 도총관, 공조판서, 감군접반사를 지냈다. 인조반정 후 예조판서를 거쳐 69살에 좌의정이 되었다. 타고난 자질이 빼어나고 기개와 식견이 높았으나 우유부단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한문학의 대가로 글씨에도 뛰어났다.     

 

 님을 믿을 것가 못 믿을 손 님이시라.

 믿어 온 시절도 못 믿을 줄 알았어라.

 믿기야 어려우랴마는 아니 믿고 어이리.

 

그는 선조(宣祖)의 인정을 받고 하루 만에 관직이 일곱 계급을 뛰어오른 적도 있었다. 그렇게 왕의 사랑을 받다가 중국에 갈 때 역관을 제멋대로 늘였다는 사소한 문제로 왕의 의심을 받고 외직으로 나갔다. 아마 그때에 이 작품을 짓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 시조는 못 믿을 님이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모순을 말하고 있는데, 아마도 님은 선조 임금을 가리킨다고 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광해군은 계축옥사 때에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고 폐모론에 참여하지 않았어도 벌주지 않았으나, 선조는 당쟁에 휘말려 확실한 주관을 차리지 못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광해군에 대한 근본적 불신이 서인인 그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광해군은 그를 의심해서 내친 일은 없다. 초장에는 ‘님을 믿을 것가’라고 의문을 제시하여 심중의 불신을 토로하고 그래서 믿지 못할 님이라고 단정을 했다. 자신의 재능을 믿어주고 사랑해 주었던 왕이 정인홍(鄭仁弘) 등 북인을 총애하면서 그 사랑이 식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중장에는 불신이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지난날 왕의 사랑을 믿고 따르던 그 시절에도 마음속으로는 언젠가는 변할 줄 알았다고 했다. 굳건한 신념으로 서인을 보호해 주지 않는 왕에 대한 서운함이요 원망이다. 종장에서 임금의 사랑을 잃고 밀려나는 처지가 되었지마는 그래도 임금을 믿지 않을 수 없는 신하의 도리를 말했다. 이리저리 마음이 변하는 군주에게 일방적으로 충성해야만 했던 40여년의 벼슬살이에서 그가 터득한 관료의 체관(諦觀)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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