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조찬한의 시

김영도 2020. 8. 14. 17:28

조찬한(趙纘韓, 1572-1631)은 선조․광해․인조 때의 문신이다. 실록과 <국조인물고>에 따르면, 자는 선술(善述)이고 호는 현주(玄洲)이며 본관은 한양으로 조위한(趙緯韓)의 동생이다. 30살에 생원이 되고 35살(1605,선조38)에 문과에 급제했다. 성균관 학유를 거쳐 전적, 형조․호조좌랑, 사과(司果)가 되었다. 광해군 즉위 후에 정언, 부사과가 되었다가 파직 당했고, 영암군수를 거쳐 46살(1617,광해9)에 영천군수가 되었는데 도적이 창궐하여 파직되었다가 삼도토포사(三道討捕使)가 되어 공을 세웠다. 이듬해 병조참의를 거쳐 동부승지, 예조참의가 되었고 우승지가 되었다. 광해의 실정을 보고 외직을 지원하여 상주목사로 나가 정경세(鄭經世) 등과 어울리며 거기에 은둔하기를 바랐다. 인조반정 후에 형조참의 겸 승문원 제조, 이듬해 좌승지를 지내고, 회양부사가 되었다. 예조참의를 거쳐 선산부사를 지내고 병으로 죽었다. 시문에 능했고 권필(權韠), 이안눌(李安訥), 임숙영(任叔英) 등과 교유했다.

 

 빈천(貧賤)을 팔려 하고 권문(權門)에 들어가니

 짐 없는 흥정을 뉘 먼저 하자 하리.

 강산(江山)과 풍월(風月)을 달라하니 그는 그리 못하리.

 

 천지(天地) 몇 번째며 영웅(英雄)은 누고 누고.

 만고흥망(萬古興亡)이 수우(愁憂)잠의 꿈이거늘

 어디서 망령엣 것은 놀지 말라 하느니.

 

그가 형과 더불어 시인들과 어울리며 자연과 시주(詩酒)를  즐겼으므로 벼슬하기 전부터 강산풍월을 즐기는 취향을 지녔다고 할 것이다. 벼슬에 나간 후에도 득의한 시절은 없었고 광해군의 폭정을 보고는 외직을 청해 상주목사로 나가서 그 곳에 은둔하기를 생각하기도 했다니 그 즈음에도 강산풍월을 즐기려는 심정을 토로했음 직하다. 첫 수는 가난하고 천한 처지를 면해 보고자 권세가를 기웃거리는 것은 자연을 즐기는 생활보다는 못하다는 가치판단을 내린 것이다. 초장은 빈천한 처지를 면하려고 권문을 찾았다는 말이고, 중장은 거기에서 현물이 없는 흥정을 하자고 했는데 순조롭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종장에서 밝힌대로 빈천을 면하는 대신 강산풍월을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강산풍월을 즐기자면 가난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면하려고 부귀에 다가가면 결국 강산풍월을 포기해야만 하는 이치를 밝혔다. 그러니 자신은 가난하고 천할망정 자연을 즐기며 살고 싶다는 것이다. 벼슬길에 나서서 권세가의 눈치를 봐야 하는 현실의 구차함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소망을 토로한 것이라 생각된다. 둘째 수는 무변광대한 우주 속에서 흥망이니 영웅이니를 따져본들 그것은 허망한 짓이니 차라리 실컷 놀고 말자는 허무적이고 쾌락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초장은 이 천지가 몇 번째 생겨난 것이냐고 하여 불교에서 말하는 겁(劫)을 상기시키고, 천지가 한번 생겼다가 없어지는 기나긴 시간 속에서 영웅이 누구누구라고 들먹여본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긴 세월 속에 나라의 흥망이라는 것도 한갓 슬픈 잠 속의 헛 된 꿈에 불과한 것이거늘 가장 훌륭하게 살았다는 영웅이야 말할 것도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긴 시간을 전제하여 인생의 가치를 무로 돌려 버렸으니 남은 것은 당연히 종장에서 말하는 대로 모든 것을 잊고 노는 것밖에 없다. 이것을 거부한다면 망령든 사람일 것이다. 이렇게 허무로 인한 쾌락추구에 몰두하고 말았다. 이는 세상사가 뜻같이 않아서 좌절감을 느낀 연유일 것이다.   



'-조선시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계생의 시  (0) 2020.08.14
홍서봉의 시  (0) 2020.08.14
신계영의 시  (0) 2020.08.13
정충신의 시  (0) 2020.08.13
백수회의 시  (0) 2020.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