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계영(辛啓榮, 1577-1669)은 광해․인조․효종․현종 때의 문신이다. 실록과 <선석유고(仙石遺稿> 등에 의하면, 자는 영길(英吉)이고 호는 선석(仙石)이며 본관은 영산(靈山)이다. 25살에 생원이 되고, 부친을 따라 예산 오지리(梧池里)로 이주했다. 31살에 부친상을, 이듬해 모친상을 당했다. 43살(1619,광해군11)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주서를 지냈다. 인조반정 후 전적, 병조좌랑이 되고, 이괄의 난에 왕을 공주로 호종하였으며, 48살에 정언, 예조정랑, 지평 등을 지내고 통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에 가서 포로들을 데려왔다. 장령, 직강 등을 지낸 뒤, 50살에 경상도 어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나주목사가 되었다. 수찬, 교리, 형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병자호란에 남한산성에 호종했다. 58살에 동부승지가 되고, 이듬해 호조참의가 되어 속환사(贖還使)로 심양에 가 남녀포로들을 구해왔으며, 강화유수가 되었다. 호조참판, 용양위 부호군을 거쳐 63살에 좌부빈객이 되어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를 심양에 가서 맞이해 왔고, 이듬해 순천부사를 거쳐 우부빈객이 되었다. 73살에 전주부윤이 되고, 효종3년(1652)에 사은사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한성판윤이 되었다. 이후 예산으로 낙향했으나, 조정에서 현종6년(1665)에 지중추부사, 2년 뒤 판중추부사의 벼슬을 내렸다.
창오산(蒼梧山) 해 진 후에 세월이 깊어 가니
님 그린 마음이 갈수록 새로워라.
우로은(雨露恩) 생각하거든 더욱 설워하노라.
창연(蒼然)한 삼각산(三角山)이 반공(半空)에 섰는 얼굴
눈에 뵈는 듯 그리움이 가없거든
하물며 오운궁궐(五雲宮闕)이야 일러 무엇하리.
아이 제 늙은이 보고 백발(白髮)을 비웃더니
그 덧에 아이들이 날 웃을 줄 어이 알리.
아이야 하 웃지 마라 나도 웃던 아이로다.
늙고 병이 드러 강호(江湖)에 누웠은들
님 향한 단심(丹心)이 잠들다 잊을소냐.
천리(千里)에 일편혼몽(一片魂夢)이 오락가락하나다.
사람이 늙은 후에 거울이 원수로다.
마음이 젊었으니 옛 얼굴만 여겼더니
센 머리 찡긴 양자(樣子) 보니 다 죽어만 하여라.
늙고 병이 드니 백발을 어이하리.
소년행락(少年行樂)이 어제런 듯하다마는
어디가 이 얼굴 가지고 옛 내로다 하리오.
앞의 두 수는 ‘연군가(戀君歌)’이고 뒤의 네 수는 ‘탄로가(嘆老歌)’다.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연군가’ 첫 수에는 순임금을 여의고 따라죽은 이비(二妃)의 마음을 자신의 연군지정(戀君之情)에다 비겨서 표현하였다. 창오산(蒼梧山)은 중국 호남성 영원현에 있는 산으로 순임금이 묘(苗)를 정벌하려고 남순(南巡)하다가 죽은 곳이다. 순임금이 창오산에서 죽은 후에 이비가 따라가 죽었듯이 임금을 이별한 후에 세월이 갈수록 그리움이 새롭다고 하였다. 그는 인조․효종 때에 주로 활약했으니 두 임금이 자신을 사랑한 은혜가 마치 비와 이슬이 식물을 키우듯 하였다고 감격하고 있다. 둘째 수에는 임금이 사는 한양의 뒷산인 삼각산을 가리켜서 임금의 얼굴로 대유(代喩)하였다. 어슴푸레하게 떠오르는 반공의 삼각산을 회상하고 그것이 눈에 뵈는 듯 그립다고 하여 임금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고, 임금이 계시는 궁궐에 대한 그리움은 말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연군가’ 두 수에서 지명을 활용한 은유가 재치 있게 사용되어 자신의 정서를 은근하게 환기시켰다고 하겠다.
‘탄로가’ 첫 수에는 아이 적엔 늙은이를 비웃다가 지금은 백발이 되어 비웃음을 당한다고 하여 상황이 역전된 것을 탄식하였다. 둘째 수에는 늙어 강호에 물러나서도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강호에 물러가서도 단심(丹心)을 잊지 않고서 꿈에 임금을 뵌다는 것이다. 차라리 연군가에 들어감 직한 내용이다. 셋째 수에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늙고 추한 모습을 보고 거울을 원망한다고 했다. 마음은 젊었으나 몸이 늙었음을 거울로 확인하고 노쇠에 대한 원망을 거울에다 하였다. 넷째 수에는 늙고 병든 모습에서 젊어 즐거웠던 시절의 모습은 간 곳 없다는 상실감을 토로하였다. 젊은 날은 어제 같지만 벌써 백발이 찾아왔다는 한탄이요 아쉬움의 토로다. 가버린 젊음이 그립고 찾아온 늙음이 싫다. 늙음이 인격의 성숙과 노년의 존경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유교사회의 전통적 가치보다 젊음의 활력이 더 가치 있다는 인간본연의 시각이 드러나 있다.
봄날이 점점 기니 잔설(殘雪)이 다 녹겠다.
매화는 벌써 지고 버들가지 누르렀다.
아이야 울 잘 고치고 채전(菜田) 갈게 하여라.
잔화(殘花) 다 진 후에 녹음이 깊어 간다.
백일(白日) 고촌(孤村)에 낮닭의 소리로다.
아이야 계면조(界面調) 불러라 긴 졸음 깨우자.
흰 이슬 서리 되니 가을이 늦어 있다.
긴 들 황운(黃雲)이 한 빛이 피었구나.
아이야 빚은 술 걸러라 추흥(秋興) 겨워하노라.
어제 소 친 구들 오늘이야 채 덥거니
긴 잠 겨우 깨니 아침 날이 높아 있다.
아이야 서리 녹았느냐 일고 자고 하노라.
이봐 아이들아 새해 온다 즐겨 마라.
헌사한 세월이 소년 앗아 가느니라.
우리도 새해 즐겨하다가 이 백발(白髮)이 되었노라.
‘전원사시가(田園四時歌)’ 10 수 중에서 춘하추동(春夏秋冬) 각1수와 제석(除夕) 1수를 뽑았다. 전원 속에서 사철의 변화를 특징 있게 잡아내어 한 해가 순환하는 모습을 실감나게 그렸다. 첫 수는 봄이다. 응달에 남았던 잔설이 녹고 매화는 피었다 졌으며 버들가지에 노란 싹이 나왔다. 농부는 울타리를 고치고 채마밭을 갈아야 한다고 시인은 서둘고 있다. 둘째 수는 여름이다. 꽃피는 봄이 가고 녹음이 짙어가는 계절이다. 여름 해 길고 고적한 마을에 낮닭이 울음소리를 뽑는다. 한가한 여름날의 풍경이다. 시인도 졸음이 오는지 빠른 가락의 계면조를 부르라고 동자에게 시킨다. 셋째 수는 가을이다. 이슬이 서리로 바뀌고 너른 들판에는 황금 물결이 구름처럼 출렁이는 풍년이다. 가을의 풍요 속에서 한 잔 술로 가을의 흥취를 느껴보자고 하였다. 넷째 수는 겨울이다. 날이 차가워져 구들 속을 쳐내고 장작불을 지핀 뜨뜻한 방에서 늦잠에서 일어나 한껏 게으름을 피우는 겨울 전원의 일없음을 표현하고 있다. 마지막 수는 섣달 그믐날이다. 농촌의 한 해가 저물고 내일이면 새해가 된다. 아이들은 설날이라고 좋아들 하지만 바쁜 세월에 어느덧 젊음도 흘러가 버리는 것이니 새해가 온다고 너무 즐거워하지 말라고 하였다. 늙은 시인이 느끼는 새해의 감회는 늙음에 대한 탄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