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서봉(洪瑞鳳, 1572-1645)은 선조․광해․인조 때의 문신이다. 실록과 <국조인물고>에 따르면, 자는 휘세(輝世)이고 호는 학곡(鶴谷)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어려서 시재(詩材)가 있어 정철의 칭찬을 받았으며, 임란에 강원도로 피난했다. 23살(1594,선조27)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 정언을 거쳐 30살에 수찬, 이조좌랑이 되었다. 명나라 사신 고천준(顧天峻)의 접반사 이정귀를 따라 이안눌, 차천로, 권필 등과 종사관이 되었다. 32살에 예조정랑, 경기어사를 거쳐 이듬해 성주목사로 나갔다. 광해군 즉위 후에 교리, 사성, 부응교가 되고, 사가독서했으며 문과중시에 갑과로 급제했다. 38살에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동부승지, 예조참의가 되었다. 다음해 김직재(金直哉)의 무옥에 장인 황혁(黃爀)이 화를 입자 이를 변호하다 파직되어 은거했다.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병조참의가 되고 정사공신 3등 익녕군(益寧君)에 봉해졌다. 이조참의, 대사간, 동부승지를 거쳐 이듬해 부제학이 되고, 다음해 대사헌, 병조참판이 되었다. 55살에 도승지, 이듬해 이조참판이 되었다. 다음해 유효립(柳孝立)의 모반 사건을 고변하여 영사(寧社)공신 2등이 되고, 지의금부사, 예조판서를 거쳐, 좌참찬, 이조판서가 되었다. 60살에 이조판서로 뇌물을 받았다는 비난을 받고 사직했으나, 다음해 홍문관 제학, 병조판서가 되었다. 64살에 대제학이 되고 이듬해 우의정, 좌의정이 되어 병자호란이 나자 화의론을 주장하여 청군과의 강화에 노력했다. 67살에 모친상을 당했고, 2년 후 영의정이 되어 청나라와 외교문제를 감당했는데, 의주에서 용골대가 척화신 김상헌을 소환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좌의정으로 전직했다가 병으로 죽었다. 사람됨이 총민하고 시문에 능했다.
이별(離別) 하던 날에 피눈물이 난지만지
압록강(鴨綠江) 내린 물이 푸른빛이 전혀 없네.
배 위에 허여 센 사공(沙工)이 처음 본다 하더라.
이 작품은 의주에서 청나라로 잡혀가는 척화신을 이별하면서 지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와 김상헌은 선조33년에 홍문록에 함께 이름이 올랐고, 권신 대북세력의 배척으로 그는 성주목사로 김상헌은 경성판관으로 내쫓겼으며, 광해군 원년에는 사가독서를 함께 했다. 이이첨이 광해군에게 그들은 한 시대의 뛰어난 인재인데 버렸으니 등용하라고 추천할 정도였다. 인조반정 후에도 나란히 조정에서 인망을 받으며 승진했다. 그러나 병자호란이 나자 그는 최명길과 더불어 화의론을 주장하여 사직을 보전하려 애썼고, 김상헌은 오랑캐에게 굴복하기를 거부했다. 그가 영의정으로 의주에 나가 용골대와 응대했는데, 용골대가 정명수를 시켜“김사양(金斜陽)이란 자가 연호(年號)를 사용하지 않고 관작도 받지 않는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 사람이 있는가?”라고 하자 “김사양은 없고 김시양(金時讓)은 눈뜬장님으로 벼슬을 떠났다.”고 하니 다시 “그 사람은 같이 산성에 들어갔다가 어가를 따라오지 않고 그대로 시골로 내려가서 관작을 제수해도 전혀 받지 않았고, 동궁(東宮)이 왕래하던 날 모든 사대부는 전송과 영접을 하는데도 유독 참여하지 않았으며, 또 연소배를 시켜서 소장을 함부로 올린 자인데, 과연 그런 사람이 없는가?”라고 다그쳐 물어서 “김시양은 병으로 산성에 들어가지 못하였고, 김상헌은 산성에 들어갔지만 병으로 어가를 따라 내려오지 못하였는데 그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하자 용골대가 “지금 어디 있는가?”라고 묻고 “나이가 많고 병들어 안동(安東)에 물러가 있다.”고 하니 “즉시 조정에 보고해서 속히 오게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조정에서 그가 잘못 응대해서 김상헌을 붙들려가게 했다는 비난이 있었는데, 지목해서 말하는 데야 어쩔 수 없었지만 강경하게 버티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남는다.
이 시조는 친한 벗을 정치적 입장이 달랐기에 사지로 보내야 되는 안타깝고 슬픈 정서가 드러나는 작품이다. 초장은 김상헌과 국경에서 이별하는 슬픔을 표현한 것으로 피눈물이 났지만 그것을 의식하지도 못했던 서글픈 심사를 말한 것이고, 중장은 압록강의 그 푸른 물결마저 푸른지 어떤지 분별이 가지 않은 마음상태를 드러낸 것이다. 친구를 사지로 보내는 자신의 무력감과 처절한 심정이 얼마나 황망했으면 오리의 푸른 털빛처럼 푸르다는 압록강 물빛을 푸른빛이 없다고 했겠는가. 늙은 대신이 이별에 임해서 이렇게 슬퍼하고 황망해하는 모양은 처음 본다고, 수많은 이별을 보아온 늙은 사공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종장을 삼았다.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친구를 사지로 보내는 지극한 슬픔이 서려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