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민제장의 시

김영도 2019. 1. 9. 21:04

민제장(閔濟章, 1671-1728)은 숙종경종영조 때의 무신이다. 실록에 의하면, 자는 회백(晦伯)이고 호는 삼금당(三錦堂)이며 본관은 여흥(驪興)으로 광주(光州) 출신이다. 35(1705, 숙종31)에 무과에 급제하여 감찰을 거쳐, 41(1711, 숙종37)에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가다가 대마도에서 풍랑을 만나 닻줄이 끊어져 배가 뒤집히게 되었을 때 맨몸으로 닻줄을 잡고 일행을 뭍으로 구출하여 무사하게 되었다. 이듬해 무산부사가 되고, 54(1724, 경종4)에 전라병사가 되었다. 이듬해(영조1) 삼도 수군통제사에 올랐으나 회령부사로 좌천되었다. 58(1728, 영조4)에 전라병사로 있을 적에 불법으로 국고를 탕진했다고 탄핵되었으나 임금이 파직하지 않았다. 이 해 안성군수로 부임하여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안죽(安竹) 싸움에서 동생 민제만(閔濟萬)과 함께 적을 크게 물리치고 황해도 병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죽었다.

 



원산(猿山)을 발로 박차 대마도(對馬島)를 연륙(連陸)하고

장검(長劍)을 빼어들며 강호(康湖)를 뛰어들어

장부(丈夫)의 백년 수치(羞恥)를 갚아 볼까 하노라.

 



북관(北關) 모든 벗님 승평(昇平)을 믿을소냐.

닫는 말 살찌우고 드는 칼 다시 갈아

지중(至重)한 성은(聖恩)을 갚아 봄이 어떠하뇨.

 



앞의 시조는 그가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갈 때 지은 작품이라고 한다. 영남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면서 이 노래를 지었다고 그의 행록 연보에 한역시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일본으로 가면서 임진왜란에 당한 수치를 갚고 싶은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뒤의 작품은 그가 무산, 회령 등지의 부사로 부임하여 국경을 수비할 때 무비(武備)를 튼튼히 해서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각오를 드러낸 것이다.

앞 시조의 초장에서 원산(猿山)이라는 산을 발로 차서 대마도를 일본의 땅덩어리에 갖다 붙인다고 했다. 아마 원산은 대마도에 있는 산이 아닌가 생각한다. 거기를 차서 뭍에 이어지게 한다고 했으니 말이다. 중장에서 장검을 뽑아 강호(康湖)로 뛰어든다고 했는데 강호는 일본의 내해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그리하여 종장에서 일본의 심장부를 찔러서 임진왜란에 당한 치욕을 복수하고 싶다는 무장의 심정을 토로한 것이다. 뒤의 시조 초장에서 북관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권유하는 투로 평화를 믿지 말라고 했다. 국방에 임하는 무장의 기본적인 태도다. 중장에서 비상시에 대한 대비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는데, 말을 잘 먹여 조련시키고 무기를 정비하자고 했다. 종장에서 이렇게 국방을 튼튼히 하여 국가와 국민의 상징인 임금을 위해 그 은혜를 보답하자고 하였다. 군주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 것이기도 하고 나라를 지켜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무장의 임무를 다짐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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