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시

경기도 화성시 건융릉 탐방기

김영도 2015. 12. 16. 18:32

1.위치

융릉/경기도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1
건릉/경기도 화성시 한신대길 65-33 경기유치원   지번주소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1-1

 

2.교통

(갈때)(올때)자가용

 

3.상세설명

융건릉

정조의 갸륵한 효심

수원 화성은 조선 후기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지극한 효심으로 축성된 근대 성곽건축의 백미이다. 수류방화정이 2월의 추위에 외롭게 서 있다.

효심으로 승화한 곳

조선 후기 문예 부흥의 주역이었던 정조(, 1752~1800년). 한편으로는 비극의 주인공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한평생 정치 개혁과 아버지에 대한 회한으로 점철했던 임금이다. 정조는 생부 사도세자의 무덤 융릉()을 경기도 화성군 송산리 화산 자락에 모시고 융릉의 원찰인 용주사를 중창했다.

융릉수원 화산에 위치한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의 능으로 지극한 효심으로 이루어낸 절세의 명품이다.

정조 자신의 무덤은 아버지 능 옆에 마련하고 건릉()이라 이름 하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을 목격한 정조는 군왕이 된 후 헌신적인 노력으로 살아 있는 동안 다하지 못했던 효심을 눈물겹도록 펼쳤다. 수원 화성()은 정조의 이상향인 신도시 건설로 새로운 세상을 펼친 곳이요, 아울러 부모에 대한 극진한 효심이 어린 영원한 사부곡의 무대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수원은 정조의 지극정성을 영원히 빛나게 승화시킨 아련한 곳이다.

건능정조의 능으로 사도세자능인 융능과 이웃하고 있다. 능역이 완벽하다.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형국

융건릉()은 사도세자와 헌경왕후() 혜경궁 홍씨가 합장된 융릉과 정조와 효의황후() 김씨가 합장된 건릉이 모여져 붙인 이름이다. 얕은 구릉으로 이어진 화산 자락에 능역까지 푸근한 솔숲 사이로 난 흙길을 소풍 하듯 걸어가면 왕릉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잘 다듬어진 공원 같다.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은 음력 섣달 햇살에 조용히 숨죽이고 있다. 홍살문을 뒤로하고 정자각과 능묘가 한눈에 들어온다. 융릉 병풍 담 뒤로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봉긋하게 솟은 봉우리가 한눈에 보아도 서기가 넘친다.

융릉의 형국은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형상인 반룡농주형()으로, 지세가 부드럽지만 힘이 있다. 정조는 이런 지세를 알고 융릉에서 내려다보이는 오른쪽 용의 머리 부근에 여의주 모양을 한 원형의 연못을 파게 했다. 화룡점정처럼 용이 여의주가 없으면 결정적인 무엇이 없어 보일 터인데, 이 연못은 여의주 형상을 했으니 평범한 사람이 보아도 조형이 특이할 뿐만 아니라 아름답기도 하다. 이런 형태의 연못은 한국의 다른 곳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 등 동북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조경이다.

융릉의 문인석과 무인석18세기 조선 문화의 꽃이 만들어낸 최고의 미감이다. 석상이 장엄하면서도 우아하다.

정조, 그 불꽃 같은 삶

참으로 드라마 같은, 비극적 운명이다. 정조는 영조 28년(1752년) 9월 22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사도세자로 알려진 장헌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맏아들로, 이름은 산(), 자는 형운(), 호는 홍재()이다. 기상()이 늠름하고 체상()이 특이하며 성품이 곧고 영특해 할아버지 영조로부터 종묘사직을 이을 기대주로 촉망받는다. 정조는 나이 7세에 세손에 책봉됐으나 불과 10세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쓰라린 죽음을 목격한다. 아버지를 잃고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후사()가 되었다가 영조가 승하하고 1776년에 왕위에 오른다.

정조는 이후 세수 49세(1800년)의 젊은 나이로 승하할 때까지 불꽃 같은 삶을 정치 개혁에 바친다. 정조가 재위한 25년의 조선 역사는 문예 부흥기로 찬란히 빛난다. 규장각을 설치해 인재를 등용하고 도서를 간행했으며, 탕평책을 시행하여 당파에 흔들리지 않았다. 어린 날의 상처와 한을 무던히도 감내하며 갸륵한 효성과 치적으로 승화한 것이었다.

북학 이론의 적극적 수용

용주사()는 융릉과 이어진 화산 남쪽 기슭에 있다. 이곳은 원래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염거화상()이 창건한 갈양사()가 있었던 곳이다. 고려 광종 21년(970년)에는 최초로 수륙재를 개설하는 등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호란()으로 소실된 채 숲 속에 묻혀 있었다.

1789년 7월 정조는 생부인 사도세자의 묘소 영우원()을 수원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을 영건하기로 결정했다. 용주사는 1890년에 정조가 왕실 이하 팔도에서 시주한 8만 냥을 들여 현륭원의 원찰로 지은 절이다. 조선 왕조 능침사찰()로는 1632년 지어진 원종 장릉 원찰 봉능사() 이래 158년 만의 예이자 마지막 능침사찰이다. 성리학이 주도하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감안하면 매우 이례적인 사찰로, 건립 배경에는 부친에 대한 정조의 각별한 효심이 자리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용주사를 재건할 계획이 확정됨에 따라 불화를 제작할 화원이 필요했다. 조정은 김홍도와 이명기()를 내정했다. 이 두 화원은 새로운 화풍을 접할 기회가 필요했다. 그해 11월 동지사행의 일원으로 청나라 사찰()이며 연경()의 천주당 벽화 등을 직접 견문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1790년 김홍도는 연경에서 돌아오자마자 2월부터 9월까지 꼬박 216일 동안 용주사 대웅보전의 ‘삼세여래체탱()’과 칠성각의 ‘칠성여래사방칠성탱()’의 제작을 주관·감동()하여 완성했다. 김홍도가 제작한 이 불화는 당시 연경의 천주교 성당에서나 볼 수 있는 서양 화법, 그중에서도 명암법, 원근법 등을 본격적으로 수용한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갖는다. 이러한 회화 기법은 당시로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혁신적인 기법이었다.

이러한 이채로운 결과물을 낳게 한 배경은 무엇보다도 이 화역()을 지시한 정조의 전진적인 회화관이 결정적 요인이었지만, 북학이라는 시대사상의 새 물결과도 무관하지 않다. 즉, 용주사 불화가 갖는 독특한 성격은 1794년에서 1796년에 걸쳐 이루어진 화성의 축조가 북학파 이론을 전폭적으로 수용해 이루어진 것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궁궐의 면모를 갖춘 능

용주사는 일반 사찰의 건축 구조와는 사뭇 다른 궁궐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우선 사찰 진입로에 보이는 일주문이나 사천왕문이 없다. 일주문 대신 사대부가의 솟을대문 같은 삼문을 두고 사찰 역역을 구획했다. 일주문격인 삼문을 들어서면 왕궁에서나 이름 붙이는 ‘천보루()’가 관가의 건물처럼 막아서고, 천보루 앞에 작은 5층석탑 한 기가 가람의 중심을 잡고 있다.

천보루는 사찰누각이라기보다는 궁궐의 한 전각 같은 웅장한 규모와 위용이 인상적이다. 평면에서 보면 천보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ㅁ자형 요사를 연이어 건축했다. 정면에서 보면 건물의 구조가 한 몸체로 보여 그 규모가 마치 창덕궁 어느 전각을 보는 듯하다. 따라서 용주사의 가람 배치라든가 건축물의 세부 처리 곳곳에서 국가가 경영한 사찰다운 면모가 잘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대웅보전에 오르는 소맷돌을 융건릉 정자각()의 층계 소맷돌과 유사한 형태와 삼태극 문양으로 처리한 것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용주사가 융릉의 원찰인 데다 정조의 지휘 감독하에 지어진 건물이어서 궁궐 규모로 사찰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문화의 보물 창고

천보루 아래를 지나 대웅전 영역으로 들어가면 화산의 아늑한 봉우리를 배경으로 삼아 단정하지만 당당하게 자리한 대웅보전을 마주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인 대웅보전은 정조의 친필 현판이 걸려 있다. 내부에 단원 김홍도가 그린 후불탱화가 세월의 흔적을 머금고 고색창연하다. 천장에는 화려한 닫집에 용과 봉황 그리고 여의주 장식과 화려한 연등천장이 장엄하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삼존불의 조각 솜씨도 조선 문화 절정기였던 당시의 조형답게 작지만 아름답다. 대웅보전은 그야말로 조선 후기 문화의 작은 보물창고이다. 대웅보전 앞마당 천보루 건물 위로 내리는 겨울 햇살이 따뜻하다.

 

용주사 대웅보전생부 사도세자의 원찰로 조성되었다. 정조의 친필 현판과 김홍도의 후불탱화가 있다. 김홍도는 정조의 명을 받들고 연경에 가서 마테오리치의 서양화풍 그림을 직접 보고 돌아와 이를 응용한 음영법으로 후불탱화를 조성했다. 당시로는 혁신적인 불화이다.

정조의 갸륵한 효심 융건릉은 여주 영릉만큼 크거나 화려하진 않지만 크기로 비교할 수 없는 기품과 아름다움이 서려 있다. 당나라 측천무후의 건릉처럼 엄청난 규모의 석수나 석인상이 없어도 사람의 마음을 감동케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인간 본연의 마음이 닿아서이리라.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정조는 살아서는 생부 사도세자의 신원()과 한을 풀어드리고, 죽어서는 자신도 부모 묘소 부근에 나란히 묻히는 천복을 누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정조의 갸륵한 효심에 숙연해진다.

 

4.탐방일자

2015.12.16(수)

 

5.글쓴이

김영도(010-8121-8041)

 

6.생생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