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성 탐방기

경기도 하남시 이성산성 탐방기

김영도 2015. 11. 23. 13:00

1.위치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2.교통

(갈때)잠실역(30-5번 버스)~고골낚시터

(올때)서부농협(30-5번 버스)~잠실역

 

3.상세설명

이성산성은 경기도 하남시 춘궁리·초일리·광암리(현재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초일동·광암동) 등 3개리에 걸쳐 있는 표고 209.8m인 이성산의 주봉을 에워싸고 동남쪽으로 전개되는 산능선상에 축조되어 있다. 따라서 이 산성지형은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이 낮으며, 성벽이 통과하는 선상의 고저차이는 75m이다. 이 산성의 평면형태는 부정형을 나타내고 있는데, 총 둘레는 1,925m이며, 산성 내부의 면적은 약 155,025㎡로 47,200평이 된다.

성벽의 축조방법은 주로 내탁법을 사용하였으며 남쪽의 계곡을 가로지르는 부분과 서쪽의 일부는 내외협축을 하였다. 북벽은 내탁법으로 축조하였는데 현재는 무너져서 30°의 경사각을 유지하고 있다. 성벽이 무너지기 이전에는 성벽의 높이는 4~5m, 경사각은 70~75°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성석은 판암계 계통으로 0.2~0.6m 크기이다. 성벽의 안쪽에는 4줄의 석열을 배치하여 위로부터 토사의 압력을 줄이고 있다. 남벽은 50×40×50㎝ 크기의 성석을 사용하여 내외협축 하였는데 현재 높이는 3m 정도로 계측된다. 성벽은 매 단마다 10㎝씩 들여쌓기를 하여 안정감을 유지하고 있으며 경사각은 75˚이다. 남문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성산성의 초축벽()이 확인되었다.

이 초축벽은 이미 확인된 외벽보다 1.3m 안쪽에서 발견되었는데, 장방형의 석재를 거의 90˚에 가깝게 축조하였으며 현재 4~5단 정도 노출되었다. 남벽에서는 배수구가 확인되었는데, 양 측벽은 3~4단을 약간 기울여 쌓았으며 바닥은 치석()한 판석을 계단식으로 쌓고 판석으로 덮었다.

성벽에는 4개의 문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북·서남·동·남쪽에 문지로 보이는 곳이 있는데, 이중에 남문이 정문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개구부의 너비는 5m이다. 남문지의 서쪽 측벽은 10단 이상의 석축이 남아 있으나, 동쪽 측벽은 거의 붕괴된 상태이다. 치()는 10개소 정도가 시설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각 치에는 각루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여장()의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북벽에서 회곽()도로보다 1m 정도 높게 1.5m 두께로 석축이 잔존하고 있었다. 성내의 도로망은 성벽과 성문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성벽의 안쪽에 2~3m 폭으로 성벽을 한바퀴 돌 수 있도록 회곽도로가 만들어져 있다. 이 회곽도를 통해 병력의 신속한 이동과 배치가 가능했을 것이다.

이성산성에서는 1·2차의 발굴을 통해 모두 6개의 건물지가 노출되었다. 장방형 건물이 3개로 각각 8·9·12각 건물이다. 성내에는 발굴된 건물지 이외에도 여러 개의 건물이 더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E지구 건물지는 E지구 전체를 가로지르고 있다. 건물의 전체 규모는 도리간이 15간, 양간(측면문)이 4간이다. 초석의 수는 모두 80개인데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54개이다. 초석은 변성암 계통의 편마암으로 크기는 70×90×30㎝ 정도이다. 각 면을 다듬지는 않고 기둥이 놓이는 윗면만 약간 다듬어 투박한 자연석 그대로의 모습이다. 초석은 생토층을 1~1.3m 크기로 파고 20~30㎝ 크기의 적심석을 쌓고 그 안에 점토를 다져 넣은 후에 올려놓았다. 바닥이 암반층인 경우는 암반을 평평하게 다듬고 그 위에 바로 초석을 놓고 있다. 건물의 평면 크기는 긴 쪽이 32.02m, 짧은 쪽이 7.88m이다. 이것을 고려척으로 환산하면 90×22척이 되고, 당척으로 환산하면 105×26척이 된다. 건물의 내부면적은 76.5평이다.

이 건물의 구조상의 특이한 점은 가장 남쪽 열의 초석이 하나도 없고 적심석만 남아 있는데 이것은 후대에 모두 파괴되었다기 보다는 다른 초석들 보다 힘을 덜 받는 구조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즉 처마 끝에 덧대어서 비나 볕을 피하도록 만들도록 만든 차양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건물은 특별히 기단부를 높이거나 하지 않고 산의 완만한 경사면을 다듬어서 만들었으며 개축되었거나 다른 문화층이 있었던 흔적이 전혀 없다.

건물지 내에서 온돌이나 난방에 관계된 유구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일상생활용의 건물이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초석과 초석사이의 거리가 정면칸이 2.13m, 측면칸이 1.97m로 매우 촘촘하다. 여기에 기둥을 세울 경우 남아 있는 공간이 너무 조밀하여 공간 이용에 문제가 있다. 또한 벽을 올렸을 경우 남아 있을 벽의 기초부분도 전혀 없다. 따라서 이 건물은 누각형의 건물일 가능성이 크다. 이 건물의 기능을 말해주는 유물은 전혀 없지만 창고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건물의 붕괴는 화재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자연붕괴라고 생각된다.

C지구 1호 건물지는 이성산성의 중심부에 해당되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은 산의 경사면을 깎아 평탄하게 만들고 축조하였는데, 발굴 전에는 퇴적토가 많이 쌓여 있었다. 건물지의 구조는 도리간이 17간, 양문이 4간으로 이성산성에서 발견된 건물지 중에 가장 큰 규모이다. 초석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으며 가운데 부분은 민묘로 파괴되었다. 건물의 정면은 남동향이다. 특이한 것은 건물의 가운데 부분에 1m 높이의 큰 돌이 놓여 있다. 윗부분은 직경 30㎝ 정도로 판판하며 아래로 내려 갈수록 굵어져 안정감을 가지고 있다. 정확하게 초석이 놓일 위치에 놓여 있어 건물의 구조와 관계된 것으로 생각된다. 초석이 놓이는 방법과 초석간의 거리 등은 E지구 장방형 건물지와 차이가 없다.

C지구 2호 건물지는 1호 건물지와 축대 하나를 사이에 두고 평행하게 놓여 있다. 축대는 현재 높이 1.2m 정도이고 길이는 0.33m이다. 강돌과 한쪽면만 치석이 된 20~50㎝ 크기의 돌로 축조하였는데 하단부에는 큰 돌을 놓고 윗부분에는 큰 돌과 작은 돌을 섞어서 85˚의 경사를 유지하며 쌓았으나 계단은 발견되지 않았다. 건물지는 파괴가 심한 상태이며, 전체구조는 도리간이 16간, 양간이 4간으로 34×7.9m 정도이다. 있어야 할 초석은 모두 85개이지만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은 26개에 불과하다. 건물방향은 1호 건물지와 평행하고 있다. 이 건물지에서 유일하게 연화문와당() 1점이 출토되었다.

8각 건물지는 D지구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의 구조는 중심부에 하나의 초석이 있고 이 중심초석에서 1m 거리에 4개의 초석이 각각 동·서·남·북의 방향과 일치하게 놓여 있다. 이 4개의 초석 사이사이마다 직경 30㎝에 높이 50㎝의 돌이 세워져 있다. 다시 중심초석에서 2.7m 거리에 8개의 초석이 놓여 있고, 이 초석에서 1.7m 거리에 다시 8개의 초석이 있다. 초석들은 화강편마암으로 다른 건물지의 것과 차이가 없다. 초석과 초석 사이에는 20~40㎝ 크기의 할석으로 2단 또는 3단을 쌓아 연결시켰는데 이것은 벽을 쌓아 올리기 위한 기단부라고 생각된다. 구조상 특이한 점은 초석과 초석 사이에 세워져 있는 0.5m 높이의 돌이다. 계란 모양의 이 돌들은 땅위에 그대로 세워져 있어 쉽게 넘어지기 때문에 초석으로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건물의 구조와는 관계가 없는 의례적인 목적의 구조물임을 알 수 있다. 건물지의 내부 면적은 16.18평으로 이성산성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작은 규모이다.

9각 건물지는 E지구의 장방형 건물지의 북동쪽 4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지의 구조는 중심부에 120×50×30㎝ 정도의 초석 4개가 놓여 있고, 중심부에서 2.7m 거리에 9개의 초석이 1.9m 간격으로 놓여 있다. 여기서 다시 2.5m 바깥쪽에 9개의 초석이 놓여 있다. 따라서 가운데 있는 4개의 초석 둘레로 2열의 초석이 9각으로 놓여 있는 상태이다. 기단 퇴적상태를 보면 지표 아래 1.1m 지점에서 생토층이 노출되었는데, 층위는 구별이 되지 않으며 점토와 잡석을 섞어 다져 놓았다. 퇴적토의 사이사이에서 몇 점의 와편이 출토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이 주변에 이미 건물이 축조되어 있었고 이 9각 건물을 축조하기 위해 흙을 쌓아 대지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 건물지에서도 역시 출입구나 난방시설 등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으며 발굴 도중 초석과 초석 사이에 연결되는 몇 개의 할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건물은 1층에도 벽이 있었던 건물이라고 여겨진다.

12각 건물지는 C지구 2호 건물지 동남쪽 22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전면발굴이 된 상태가 아니라서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지상에 노출된 초석의 배열을 연결시켜 도상 복원을 해 본 결과 12각 건물임이 밝혀졌다. 그 구조 중심부에는 초석이 없고 중심에서 1.6m 거리에 12개의 초석이 있으며 그 바깥쪽 2.1m 지점에 12개의 초석이 놓여 있다. 이 두 번째 초석열에서 1.9m 지점에 다시 2.8m 간격으로 12개의 초석이 놓여 있다. 반지름은 5.6m이고 내부 면적은 30평 정도의 규모이다. 초석은 0.7~1.3m 크기로 산 정상부쪽은 비교적 작은 것을 아래쪽으로는 큰 것을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은 장대지로 추정된다.

산성내 남쪽 계곡을 막아서 형성된 저수지가 조사되었는데, 1·2차에 걸쳐서 축조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1차 저수지는 산성 축조와 동시에 형성된것으로 규모는 54×30m이고, 평면은 타원형을 나타내고 있는데, 제3차 조사시에 이 1차 저수지에서 간지()가 기록된 목간()이 출토되었다. 목간은 전면과, 측면 및 후면에 글씨가 씌어져 있는데, 전면에는 ‘使…’ 측면에는 ‘使□□…’ 후면에는 ‘□□□□□□□□…’라고 기록되어 있다. 2차 저수지는 1차 저수지가 자연 매립되고 난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규모는 18×27m이고 평면은 장방형을 하고 있다. 이 2차 저수지에서도 목간이 출토되었으나 판독되는 목간은 없었다. 저수지의 형성시기는 1차가 6세기 중엽, 2차는 7세기 후반~8세기초로 판단하고 있다.

이 산성 내에서는 3개소의 저장구덩이가 발견되었는데, 2개소는 입구가 좁고 밑으로 내려갈수록 넓어지는 복주머니 형태이고 1개소는 움집의 형태인데 인위적으로 매립되었다.

신앙유적()은 4개소가 조사되었는데, 건물의 초석 상부 또는 초석에서 가까운 곳에 1.0~1.5m 크기의 큰 돌을 올려놓고 그 주변으로 돌아가며 잔돌을 쌓아 놓은 형태이다. 이 신앙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17마리 개체분의 말()로 모두 파손되었다. 이 중 정선된 점토를 사용한 회색 연질의 토제품이 27점인데 머리, 몸통, 다리, 꼬리, 안장 등을 만들고 가는 세선으로 말안장과 고삐, 갈기를 잘 묘사하고 있으며, 철제품은 17점으로 주조()와 단조() 2가지 방법으로 제작하였다. 이 신앙유적은 무속()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출토유물의 대부분은 와류와 토기류이며 금속류와 석기류도 몇 점씩 출토되었다. 기와는 회청색 또는 적갈색을 띠고 있는 것이 대부분인데, 암기와는 기울기가 없고 크기가 40~45㎝ 정도의 대형이며, 숫기와는 언강이 전혀 없는 토수기와들이다. 기와의 등무늬는 격자문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사선이나 선조문 등도 많이 보이고 있다. 그 외에 당초문과 복합문, 그리고 어골문도 보이고 있으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기와의 뒷면에는 포목문이 있다. 와당은 1점이 수습되었는데 굵은 모래가 많이 섞인 거친 태토에 10엽의 소판()이 방사선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방()에서 14과의 연자()가 불규칙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토기류는 형태를 알 수 있는 것이 약 500여 점으로, 형태는 고배(), 고배합(), 합(), 개배(), 완(), 단경호(), 장경호(), 병(), 도호() 등 다양하다. 금속제품으로는 유공철부(), 철촉(), 철정() 몇 점과 청동제 합개() 1점이 출토되었다. 석제품도 마제석촉, 방추차 등 몇 점이 출토되었으나 본 산성 유적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또한 지진의례()와 관계있는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이 토기들은 건물 축조시에 인위적으로 매납()한 것으로 기형은 완(), 합(), 호(), 병() 등이며 공통적인 특성은 모두 구연부의 일부나 전체가 의도적으로 파손되어 있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제8차 조사에서는 ‘욕살()’이란 고구려 관직명이 기록된 목간()과 고구려 자()가 출토되었는데, 이때 조사된 유적문화층은 모두 7개층으로 구분된다. 윗부분인 1층부터 5층까지는 인화문토기 등 신라와 통일신라 때 유물만 나오고 목간과 고구려척 등이 나온 5번째 층은 고구려계 유물이 소수의 백제계토기류와 섞여 나오고 있다. 7번째 층은 청동기시대 유물이 나오고 있는데, 이 석축산성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하겠다.

고구려자()의 총길이는 36.1㎝로, 눈금이 끝에서 0.5㎝ 간격을 두고 시작하므로 이 길이를 제외한 35.6㎝가 실제길이다. 이 고구려척은 전체 세 구간으로 나뉘며 첫 구간은 5개의 마디로, 각 마디는 다시 5개의 눈금으로 나뉘어져 있다. 5개의 눈금이 모여 한 마디()가 되고 이 5마디가 모여서 한 구간이, 다시 세 구간을 합해 한 자()가 되는 셈이다. 제8차 조사시에 출토된 5~6세기경의 유물과 ‘욕살()’이 기록된 목간, 그리고 고구려자의 출현은 3차 조사 때 출토된 고구려 성주를 뜻하는 ‘도사(使)’가 기록된 목간과 아울러 살펴볼 때 당시 이성산성이 고구려 수중에 있었을 가능성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4.탐방일자

2015.11.21(토)

 

5.글쓴이

김영도(010-8121-8041)

 

6.생생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