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위치
주소 : 서울 중구 정동 5-1 (우100-120)
2.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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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교통안내
지하철 1호선 (2번 출구), 2호선 (12번 출구) 덕수궁 방면
버스 : 시청 앞 하차
덕수궁에는 주차시설이 없으니,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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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상세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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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정국이었던 덕수궁은 원래 성종(9대)의 형인 월산대군의 저택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타 없어지자 1593년(선조 26)부터 선조의 임시 거처로 사용되다가 광해군이 1611년(광해3)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던 이곳에 ‘경운궁’이라는 정식 궁호를 붙여 주었다. 그 후 광해군은 1615년(광해7) 재건한 창덕궁으로 어가를 옮기고 경운궁은 별궁으로 남게 되었다.
경운궁은 1897년 대한제국 출범과 함께 한국 근대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전성기 때의 경운궁은 현재 넓이의 3배에 달하는 큰 궁궐이었다. 현재의 미국대사관저 건너편 서쪽에는 중명전을 비롯해 황실 생활을 위한 전각들이 있었고, 북쪽에는 역대 임금들을 제사 지내는 선원전이 있었으며, 동쪽에는 하늘에 제사 지내는 환구단을 설치하여 황제국의 위세를 과시했다. 그러나 고종황제가 황위에서 물러나면서 경운궁은 선황제가 거처하는 궁으로 그 위상이 달라졌고 이름도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이후 궐내각사 일부와 환구단이 철거되었고 이 지역은 대한제국의 상징 공간으로서의 위상을 잃게 되었다.
고종이 승하한 뒤 1920년부터 일제가 선원전과 중명전 일대를 매각하여 궁역이 크게 줄어 들었으며, 1933년에는 많은 전각들을 철거하고 공원으로 조성하여 일반에 공개했다. 이처럼 덕수궁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원형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으나, 임진왜란과 대한제국의 역사적 격변을 겪은 궁궐로 국난 극복의 상징적 공간이자 그 중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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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현황 : 사적제124호 덕수궁일원(1962.7.25지정, 2007.2.7 추가지정) |
대지면적 : 63,069.2㎡(18,514.6평) |
고건물 : 중화전, 석조전 등 22동 |
- 국보 : 1건(보루각자격루) - 보물 : 3건(중화문 및 중화전, 함녕전, 흥천사종) |
편의시설 : 화장실 3동, 매점 1동 |
수목 : 111종 10,296 그루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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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중화전(보물제81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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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409.3㎡ 연혁:고종황제께서 1897년에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이어하시면서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셨으나 협소하였으므로 1902년 새로운 정전으로 중화전을 지으셨다. 본래는 중층건물이었으나 1904년 4월 14일 화재로 소실된 후 현재의 단층 건물로 중건되었다. 앞뜰에 조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문무백관의 위치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좌우에 있으며, 정문으로 중화문이 있다. | |
2.중화문(보물제81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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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83.31㎡ 연혁:1902년 건립된 중화전의 정문으로 1904년 화재로 소실된 후 중건되었으며 좌우에 행각이 있었으나 없어지고 동측에 일부만 남아있다. | |
3.함녕전(보물제82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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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343.77㎡ 연혁:1897년 건립되었으며 고종황제의 침전으로 사용되었다. 1904년 4월 14일 함녕전 온돌수리공사중 일어난 화재로 함녕전은 물론 덕수궁 내 주요 전각들이 모두 소실되는 큰 화재가 있었는데 이 건물은 같은 해 12월에 중건하였다.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이곳에서 승하하셨다. | |
4.석조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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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3,986.65㎡ 연혁:조선시대 궁중건물 중에서는 최초로 유럽풍의 석조로 건립된 건물이며 영국인 "하딩"이 설계하였으며 영국인 "데빗손" 감독 하에 1900년 기공되어 1910년에 준공되었으며, 특별한 건물명칭은 없이 "석조전"으로만 전해 온다. 고종(高宗)황제는 이곳에서 고관대신과 외국 사절들을 접견하거나 침전으로 사용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기 이전까지는 현대미술품을 진열하였으며 1946년~1948년까지 미·소 공동위원회가 사용했고 1948년~1950년 동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유엔한국위원단이 이곳을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시 건물일부가 파괴되어 1955년 육군공병단에 의해 수리되었으며 그 후 국립중앙박물관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하기도하였다. | |
5.석조전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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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3,428.47㎡ 연혁:1936년 8월 21일 기공하여 1938년 6월 5일 준공하였으며 이왕가 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덕수궁 미술관으로 사용중이다. | |
6.정관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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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269.55㎡ 연혁:1900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동서양 절충식 건물은 고종황제께서 다과회를 개최하고 음악을 감상하시던 곳이며 한때 이곳에 태조(太祖)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였다. 설계는 사바찐이 하였으며,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5칸으로 내·외진으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내진 공간 위에는 팔작지붕이 덮여있고 외진공간은 차양칸처럼 된 특이한 형태이다. 외진에 두른 철제 난간에는 사슴, 소나무, 당초, 박쥐 등 전통문양을 넣었다. | |
7.석어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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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229.19㎡ 연혁: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고 1904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같은 해에 중건하였다. 덕수궁의 유일한 목조중층 건물로 선조(宣祖)께서 임진왜란 중 의주로 몽진하셨다가 환도한 후 이곳에서 거처하셨고 1608년 2월 선조가 승하한 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인목 왕후가 광해군에 의해 유폐되었던 곳이기도 하며,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광해군(光海君)을 석어당 뜰아래 꿇어앉히고 인목왕후가 죄를 책한 곳 이기도하다.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집"으로 아래층은 정면 8칸, 측면 4칸이며 상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 |
8.덕홍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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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127.54㎡ 연혁:함녕전을 침전으로 사용할때 일반 빈객들을 접견하기 위하여 1906년 건립한 후 1911년에 개조하였다. 용도는 주로 외국사신이나, 대신들을 만나던 접견실로 쓰였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4칸이며 겹처마 팔작지붕의 단층 건물이다. 측면에는 좌우 툇간이 있어서 전체의 평면은 정사각형에 가깝다. 이 건물 주위에는 행각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행각만이 함녕전 남행각에 연접되어있다. | |
9.준명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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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231.43㎡ 연혁:이 건물의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종(高宗)때에 중건된 것으로 추측되는 목조건물로 즉조당과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고종이 신하나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곳으로, 함녕전이 지어지기 전까지 고종의 침전으로 쓰였다. 정면 6칸, 측면 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집이며 높은 기단위에 세워졌다. 좌우 툇간에 쪽마루를 두고 있다. 1916년 4월에는 덕혜옹주 교육을 위해 이곳에 유치원을 개설하기도 하였다. | |
10.즉조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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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131.93㎡ 연혁: 준명당(俊明堂)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 이 건물은 15대 광해군(光海君)과 16대 인조가 즉위한 곳이다. 1897년 고종의 경운궁 환궁 직후 정전으로 이용되기도 하여 한때 명칭이 태극전, 중화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2년 새로운 정전이 세워지자 다시 즉조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1904년 화재로 손실된 것을 그해에 다시 석어당, 함녕전과 같이 중건한 것이다. 고종의 후비인 순헌귀비 엄씨가 1907년부터 1911년 7월 승하할 때까지 이곳에서 거처하셨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 |
11.귀빈실 |
규모:103.14㎡ 연혁:함녕전 남행각의 일부로 원래의 모습이 많이 변형되어 있다. | |
12.대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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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123.04㎡ 연혁:덕수궁(德壽宮)의 정문으로 원래는 대안문(大安門)이던 것을 1906년 7월 15일 수리 시 대한문이라 개칭하였다. 서울시 도시계획에 의한 제2차 도로확장 공사 때에 담장만을 궁내로 이전하여 도로상의 한복판에 분리 폐쇄되어 있다가 1970년 8월 21일 현 위치로 이설 공사를 착공하여 1971년 1월 2일 준공을 보았다. 2005년에 해체 보수공사를 하였다. | |
13.광명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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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56.53㎡ 연혁:1897년에 건립하였으나 1904년에 소실되었다가 중건된 목조건물로 당초 함녕전의 정문이었으나 1938년 미술관 개관 시 흥천사종과 보루각 자격루를 진열하기 위하여 현 위치로 이전한 것이다. | |
14.보루각자격루(국보제22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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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1536년 (중종 31)에 만들어진 물시계 물을 보내는 파수호(播水壺)가 3개, 물받이인 수수통(受水筒)이 2개 남아 있는데, 시계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434년(세종 16) 장영실(蔣英實)에 의해서였다. 장영실의 물시계는 정해진 시각이 되면 격발장치를 건드려 쇠알이 굴러가서 여러 운동을 하게 만든 것이다. 종·북·징이 울리고 인형이 나타나는 장치는 정교한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장영실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물시계는 경복궁에 보관되었는데 남아 있지 않고 중종 때 이를 본떠서 다시 만든 것이 창경궁 보루각에 보관되었다가, 일부가 지금까지 전해 오는 것이다. 대파수호와 수수통은 청동으로 만들어져 있다. 수수통에는 하늘로 솟아오르는 용의 모양을 양각해 놓았는데 중종 때 이를 만든 우찬성 유부(柳溥), 공조참판 최세절(崔世節) 등 참여자 이름이 적혀 있다. | |
15.흥천사종(보물 제146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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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높이:2.82m,직경:.7m,두께:3㎝ 연혁:이 종은 1462년 7월 이태조(李太組)의 후비 신덕황후를 추모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이 종은 신덕왕후 능의 근처 흥천사에 있었으나 흥천사가 중종 5년(1510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영조 23년(1747년)에 경복궁(景福宮) 정문인 광화문으로 옮겼다. 한일합방 후 일인들이 이 종을 창경궁으로 옮겼다가 후에 덕수궁 현 위치에 다시 옮겼다. | |
16.중명전 |
규모:784.49㎡ 연혁:중명전은 러시아의 건축가 사바찐(Seredin Sabatin)의 설계로 1897년부터 1901년에 걸쳐 황실도서관으로 건립된 지하1층, 지상2층의 벽돌조 건물로 처음에는 수옥헌(漱玉軒)이라 불렀다. 1904년 4월 14일 경운궁 대화재로 인해 고종황제의 편전이자 외국사절들의 알현실로 사용되었으며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된 근대사의 중요한 유적이다. 또한 1907년 4월 20일 이곳에서 고종황제로부터 친서를 받은 이준은 이상설 · 이위종과 함께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리고 대한제국의 주권회복을 호소하였으나 이것이 빌미가 되어 일제에 의해 고종황제는 강제 퇴위 당하였다. 건축학적으로는 우리나라 근대건축의 가장 초창기 풍모를 간직하고 있으며 1925년 3월 12일 일어난 화재로 외벽만 남기고 내부는 대부분 소실되어 원형을 잃었다. 해방이후 여러 차례 건물의 용도와 소유주가 변경되었으며 2006년 9월 20일 문화재청으로 소유권이 이전되었고, 2007년 2월 7일 사적 제124호인 덕수궁에 포함되어 사적으로 추가 지정되었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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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글쓴이
김영도 010-2888-8041
5.탐방일자
2011.1.6 (목)
6.생생한 장면
(시청역 2번 출구)
(덕수궁 돌담길)
(덕수궁 입주문인 대한문)
(덕수궁 배치도)
(창녕전과 덕홍전전경)
(창녕전과 덕홍전 설명서)
(함녕전 전경)
(함녕전 내부)
(함녕전 현판)
(덕홍전 전경)
(덕홍전 현판)
(덕홍전 내부)
(덕홍전 뒷뜰)
(정관헌 설명서)
(정관헌 전경)
(정관헌 설명서와 구조)
(고종황제의 차탁자와 의자)
(즉조당 설명서)
(즉조당 내부)
(즉조당 전경)
(즉조당 현판)
(준명당 전경)
(준명당 현판)
(석어당 현판)
(아궁이)
(뒷뜰)
(중화전 전경)
(중화전 용머리)
(중화전 내부)
(정전인 중화전과 품계석)
(정전인 중화전 품계석)
(정일품 품계석)
(종일품 품계석)
(중화문 전경)
(중화문 현판)
(광명문 전경)
(광명문 현판)
(흥천사 종의 설명서)
(흥천사 종)
(보루각 자격루의 설명서)
(보루각 자격루)
(신기전기화차 설명서)
(신기전기화차)
(보루각자격루 국보 지정석)
(석조전 복원공사 설명서)
(석조전의 전경)
(중화전에 있는 드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