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

이규보선생묘 탐방기

김영도 2023. 3. 22. 22:19

1.위치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까치골길 72-17

 

2.교통

(갈때,올때)자가용

 

3.상세설명

고려 중기 문명의식과 이규보

고려 건국 이후 각축을 벌인 송나라와 거란이 점차 쇠퇴하고 금나라가 신흥 강국으로 등장한 12세기 초, 동아시아 대륙 정세는 크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특히 문명국 송나라가 금나라에 밀려 대륙의 강남 지역으로 쫓겨나면서, 고려 지식인들은 고려가 장차 신흥 문명국으로 번성할 것이라는 자부심 넘치는 문명의식()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이는 고려가 중국과 함께 또 하나의 천하 중심이라는 다원적 천하관과 연결된다. 다음은 이규보(, 1168~1241)가 1209년(고종 5) 연등회 의식을 보고 지은 축시이다.

금 등잔 토한 불꽃 홍사초롱 밝혀주고 ()
돋는 해 흩뿌린 광채 새벽놀 물들였네 ()
온 천하가 일가()되니 천자(고려 국왕)의 성스러우심이라 ()
서광이 비추니 온갖 꽃 피어나리 ()

- 《동국이상국집》 권13, <기사년등석 한림주정( )>(1209년)

이규보는 고려 국왕을 천하를 일가로 만든 중심적 존재로 보았다. 즉, 고려를 중국과 구별된 또 하나의 천하 중심으로 보았던 것이다. 고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그의 자부심이 반영된 문명의식을 보여준다.

인천 강화군에 위치한 이규보의 묘.<출처: 문화재청>

진화(, 생몰년 미상) 역시 강렬한 문명의식의 소유자였다. 금나라 사신으로 가는 도중에 진화는 다음의 시를 남겼다.

서쪽의 중화(남송)는 이미 시들고 (西)
북의 만지(, 금과 몽골)는 아직도 캄캄하다 ()
밤새워 문명의 아침을 기다리노니 ()
하늘 동쪽(고려)에 불그레 오르는 새로운 해여 ()

- 진화, 《매호유고(稿)》

이 시는 고려인으로서의 시대적 자각과 민족적 긍지를 보여주고 있다. 중국은 이미 노쇠의 지경에 있고 북방민족은 아직 몽매한 상태에 있는데, 새로운 문명의 아침이 동쪽에 트이어 온다는 것이다. 장야(, 긴 밤, 암흑시대)에 빛은 동방에서 온다는 것이다. 이 동쪽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고려 자신을 가리킨다. (금나라 건국 후) 송과 단절된 고려는 문명의 나라로서 ‘영광 있는 고립’을 지키는 데 그칠 뿐 아니라, ‘인간의 낙원’을 실현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고려는 나아가 다가오는 새 시대의 역사 위에 문명의 서광을 비추어 주리라는 것이다(이우성, 《한국의 역사상》, 창작과비평사, 1983, 175쪽, 재인용).

진화()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규보는 고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많은 글을 남겼다. 그는 고려 문화의 뿌리로 고구려와 신라의 역사와 문화에 주목했다.

신라의 역사에 주목하다

특히 <동명왕편()>을 통해 고구려 계승의식의 소유자로 알려진 이규보가 신라의 역사에 주목했다는 사실이 눈에 띈다. 그는 스승 오세문(, 생몰년 미상)이 지은 시에 300개의 운을 달아 화답하는 장편의 시를 지었다. 이규보가 27세 때인 1194년(명종 24)에 지은 이 시의 주제는 신라의 수도 경주[]와 신라의 역사이다. <동명왕편>보다 한 해 뒤에 지은 것이다. 주요 구절만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동도(경주)는 옛날 낙토의 나라 ()
당시 궁전 터 아직 남아 있다 (殿)
역사책에서 지난 자취 살필 수 있고 ()
순박한 풍속은 옛날을 기억나게 한다 ()
(중략)
(신라는) 천년 동안 왕업을 열고 ()
여러 성왕이 기쁨을 누렸네 ()
한신(한나라 명장) 같은 국사를 등용하고 ()
공규(당나라 명신) 같은 조신을 대우했네 ()
은덕은 우로와 같았고 ()
호령은 우뢰와 같았네 ()
문물예악[]은 바람과 구름같이 풍성했다 ()
(중략)
박인범의 생황 청아하였고(문장을 음악에 비유) ()
홍유(설총)는 문물예악()을 빛나게 했네 ()
가사가 청아하니 장적 소리 멀리 들리고 ()
뜻이 고상하니 복건차림 아름다워라 ()
저마다 앞을 다퉈 조반에 오르니 ()
누가 정무의 많음 사양하랴 ()
당나라 과거에 합격한 고운(최치원)은 ()
동해(신라)의 훌륭한 문장가 ()
훌륭한 문장으로 중국을 울리고 ()
천하를 진동시켰네 ()
높은 이름이 당시에 울려 퍼지고 ()
남긴 시문은 지금도 메아리로 울린다 ()

- 《동국이상국집》 권5, <동각 오세문이 고원의 여러 학사에게 드린 삼백운의 시에 차운하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이규보가 병석에 눕자 권력자 최이는 이규보의 문집 출간을 서두른다. 이규보는 1241년 7월 사망했고, 이해 12월 그의 문집이 발간되었다.<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이규보는 이 시에서 천년국가 신라는 군신이 화합해 문물과 예악이 융성한 문명국가를 이룩했는데,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박인범, 설총, 최치원과 같은 훌륭한 인재가 배출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역사발전은 문명과 문화 수준에 따라 결정되며, 문명과 문화 수준은 훌륭한 인재의 배출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특히 이규보는 최치원을 높이 평가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과거에 합격해 그곳의 관리가 되었고, 황소의 난 때 격문을 지어 난을 진정시킬 정도로 중국에서 문명()을 떨쳤다. 이규보는 최치원이 《당서()》 열전에 실리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동국이상국집》 권22 <당서에 최치원 열전을 싣지 않은 데 대한 논의>).

이규보가 신라의 인물과 문화 수준을 높이 평가한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는 고려 문화와 문명의 근원으로 고구려는 물론이고 신라의 역사에도 주목한 것이다. 그를 삼국의 특정 국가를 계승하는 의식의 소유자로 평가하는 것은 사실과 다른 것이다.

‘작은 중국’이라 불린 고려

이규보의 문명의식은 당대 지식인들도 공유하고 있었다. 고려의 문화와 문명에 대한 자부심을 바탕에 깔고 있는 문명의식은 고려는 중국과 문화수준이 대등한 나라라는 뜻의 소중화() 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소중화 개념은 11세기 후반 문종(, 재위 1046~1083) 대에 나타난다.

(국왕 문종은) 사람을 알아보는 데 밝았으며, 위엄으로 오랑캐들을 교화하셨다. 오랑캐 풍속[좌임()]을 중화의 풍속[]으로 바꾸고, 서쪽 건물에 책을 쌓아두었다. 높으면서도 겸손하여 빛이 나고, 불러서 타이르매 곧 복종하였다. 황제가 보낸 조서는 친절하고 간곡했으며, 중국으로 가는 사신이 끊어지지 않았다. 성명()이 빛나고 문물이 번화하였다. 그들은 융성한 문물이 중국에 견줄 만하여 소중화라 일컬었다. 선조 왕들의 덕으로 나라가 영화로웠고 왕실이 빛나게 되었다. 재위 38년 동안 문물이 융성했다고 할 수 있다.

- 《동문선》 권28, 문왕애책() 박인량() 찬(1082)

위 글에 따르면, 문종 때 고려의 문물이 중국에 견줄 정도로 번성했다. 때문에 송나라 사람들은 고려를 ‘작은 중국’이라는 뜻의 소중화라 불렀다. 다음 기록에서도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국가(고려)가 무신정변 이전에는 학문이 빼어난 선비[]나 훌륭한 인물[]이 중국보다 많았다. 그래서 당나라는 우리를 ‘군자의 나라’라고 했다. 송나라는 ‘문물예악의 나라’라 하고, 고려 사신들이 머무는 곳을 ‘소중화관()’이라 이름 지었다. 무신정변 이후 난리에 죽지 않은 사람들은 산림으로 도망해 숨었다. 통유()와 명사()는 백에 한두 명도 남은 사람이 없었다.”

- 《고려사절요》 권35 공양왕 3년(1391) 6월 박초()의 상소문에서

송나라가 고려를 소중화라 한 것은 학문이 빼어난 선비[]나 훌륭한 인물[] 등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라 했다. 또한 고려 사신이 머무는 곳을 소중화관이라 했다. 그리고 고려 사신 박인량(, ?~1096)과 김근()의 글을 모아 ‘소중화 사람들의 문집’이라는 뜻의 소화집()을 편찬해 줄 정도로 고려의 문물과 예악을 높이 평가했다.

우복야 참지정사() 박인량이 죽었다. 박인량은 문장과 가사가 우아하고 화려했다. 송나라 희령() 연간(1068~1077) 김근과 함께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송나라 사람들은 두 사람이 지은 편지글과 문서[], 황제께 올린 표문[] 및 여러 서문과 시[]들을 칭찬하고, 그들의 시문을 모아 책을 편찬하여 소화집()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 《고려사절요》 권9, 숙종 1년(1096) 9월조

문물 수준이 중국과 견주어 손색이 없다는 의미의 소중화 개념은 이같이 11세기 후반 문종 때부터 나타난다. 고려 지식인들의 강렬한 문명의식도 이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제현(, 1287~1367)도 문종 대를 높이 평가했다. ‘문종은 불필요한 관리를 줄여 비용을 절약했다. 창고 곡식이 남아 썩어 문드러질 정도로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해 나라가 부유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그는 문종 대를 태평성대라 했다(《고려사》 권9, 문종 37년 이제현 사론).

1071년(문종 25) 고려는 거란 전쟁 무렵 중단된 송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약 50년 만에 재개한다. 송나라는 고려와 교류를 재개하면서 고려를 새롭게 인식하고 ‘소중화()’라 불렀던 것이다. 물론 상감청자 제작기술, 인쇄술, 제지술, 공예기술 등 고려의 문화와 문명 수준은 12세기에 절정을 맞는데, 이는 11세기 문종 대의 정치, 경제적 안정에서 비롯한 것이다.

12세기 고려시대에 제작된 상감청자, ‘청자 상감 구름 학 무늬 매병’.<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참고로 소중화는 조선시대에 더 많이 사용된 개념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전혀 달랐다. 명나라의 멸망과 청나라의 등장으로 조선 지식인들은 중화문명의 맥이 끊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조선이야말로 중화문명의 계승자라며 소중화로 자처했다. 따라서 조선에서 사용된 소중화 개념은 중국 한족()이 중화문명의 중심이며, 주변국을 오랑캐로 간주하는 중국 중심의 화이론()에 근거한 것이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중국을 본받아야 할 문명의 표준으로 삼았다. 즉, 천자국 중국의 문명을 동경하고 그것을 제후국 조선에 실현하려는 노력이 소중화 의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고려의 문화 수준이 중국과 대등하다는 뜻의 소중화 개념과 그 의미는 전혀 달랐다. 조선에서 성행한 소중화 의식은 서세동점 이후 존왕양이의 배외의식으로 발전한다.

이색(, 1328~1396년) 역시 고려가 송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은 이후 중국인은 고려는 문물 수준이 높은 소중화로 인식했다고 말했다.

우리 국가가 송나라의 문명 시대를 만나서 ()
예악을 서로 닦아 제일의 태평을 이뤘으니 ()
조칙으로 (고려를) 높임에 천자의 말씀 친밀하였고 ()
송나라 덕택에 해동(고려) 또한 태평하였네 ()
(문종이) 병들어 약물을 요구하자 의원을 보내왔고 ()
군대의 동태를 점검해 화의의 조짐을 보고했네 ()
만고에 연마키 어려운 충의가 있었거니 ()
소중화관이란 말이 어찌 헛된 이름이랴 ()

- 《목은시고()》 권18, <옛일을 생각하다>

성인의 나라 고구려를 노래하다

이규보는 26세 때인 1193년(명종 23)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왕(주몽)에 관한 사실을 시로 노래한 <동명왕편>을 지었다.

지난 계축년(, 1193, 명종 23) 4월 《구삼국사()》를 구해 고구려 동명왕본기를 읽었더니, (동명왕의) 행적이 세상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보다 더 신비하고 특이[]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믿을 수 없어 잡귀 이야기[]나 허황된 이야기[] 정도로 생각했다. 세 번 반복해 읽으면서 그 맛에 빠져 점차 그 근원에 들어갔더니, (동명왕의) 행적은 환(, 허황된 이야기)이 아니라 거룩한 이야기[]이며, 귀(, 잡귀 이야기)가 아니라 신의 이야기[]였다.

(중략) 동명왕에 관한 사실은 변화와 신이()함으로 사람들의 눈을 현혹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고구려를 건국한 신성한 자취이다. 이것을 기록하지 않으면 뒷날 무엇을 보겠는가? 이에 시를 지어 기록해서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의 나라[]인 것을 천하에 알리고자 한다.

- 《동국이상국집》 권3, <동명왕편>

이규보는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왕에 관한 이야기는 잡귀들의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 고구려를 건국하는 과정을 담은 신성하고 거룩한 이야기라고 했다. 그는 동명왕이 고구려를 건국한 신성한 행적을 알리고, 고구려가 성인()의 나라임을 천하에 알리기 위해 <동명왕편>을 저술했던 것이다. 즉, 이 글을 통해 고구려가 문화 수준이 높은 나라임을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성인은 지혜와 덕이 매우 뛰어나 길이 우러러 본받을 만한 유교의 이상적인 인간상을 뜻한다. 주로 군주에게 많이 붙여 ‘성인군주()’ 또는 이를 줄여 ‘성군()’이라 칭한다. 참고로 문종 때 관료를 지낸 임완()은 문종을 ‘어질고 성스러운 군주[]’라고 평가했다(《고려사》 권9, 문종 37년, 이제현 사론). 고려가 소중화로 호칭될 정도로 문물을 번성시킨 문종을 성인군주로 평가한 것이다. 이규보가 동명왕을 성인이라 한 것에도 이 같은 뜻이 담겨 있다. 그는 성인이 건국한 고구려의 높은 문화와 문물 수준을 강조하기 위해 <동명왕편>을 저술했다.

고구려와 신라의 역사를 노래한 두 편의 시는 고려가 인재가 융성해 문화 수준이 높았던 고구려와 신라를 계승한 문명국가라는 이규보의 문명의식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글이다. 이규보의 다음 글에 주목하기로 한다.

두어 폭 종이에 많은 나라가 그려져 있어 ()
삼한은 작은 덩어리 같이 모퉁이에 붙어 있다 ()
보는 자여 작다고 하지 마라 ()
내 눈엔 크다고 말하고 싶다 ()
고금에 뛰어난 인재 끝없이 태어났으니 ()
중국과 비교해도 크게 부끄럽지 않구나 ()
인재가 있으면 나라요 없으면 나라가 아니다 ()
오랑캐는 비록 큰 나라이나 풀과 같은 존재에 불과해 ()
그대는 중국인이 우리를 소중화라 말한 것을 보지 않았나 ()
이 말은 진실로 받아들일 만하네 ()

- 《동국이상국집》 권17, 화이도()에 장단구()를 제()함

삼한(고려)은 작은 땅덩어리에 불과하지만, 중국과 견주어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고금에 뛰어난 인재가 많이 배출된 나라였다. 인재가 있으면 나라요, 인재가 없으면 나라가 아니라고 했다.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된 고려를 중국인은 소중화라고 불렀다고 했다.

100년 전 11세기 후반에 처음 사용된 소중화 개념이 이규보에게서도 나타난다. 이규보의 문명의식 속에 고려는 소중화라는 자부심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규보의 문명의식은 창조적이고 자존감 넘치던 자의식에서 비롯된 점도 없지 않았지만, 크게는 고려 중기 이후 문물과 예악이 풍성하고 뛰어난 인재가 배출된 전성기 고려의 시대정신의 산물이기도 했다.

몽골의 지배와 문명의식의 변질

고려 문화에 대한 자부심의 원천인 이규보의 문명의식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몽골에 굴하지 않고 저항하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고려 정부는 몽골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국가적 대사업인 고려대장경 판각사업에 착수한다. 이규보는 이를 위한 <기고문()>을 썼다.

달단(, 몽골 군사)이 크게 환란을 일으켰다. 그들의 잔인하고 흉포한 성질은 말로 다 할 수 없으며, 어리석고 미련함은 금수보다 더 하다. 그들이 어찌 천하 사람들이 공경하는 것을 알 것이며, 그들에게 어찌 불법()이 있겠는가? 그들은 가는 곳마다 불상과 불경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부인사에 소장된 대장경 판본도 또한 남김없이 태워버렸다. 아, 여러 해 동안 이룬 공적이 하루아침에 재로 변해, 나라의 큰 보배가 사라졌다. 여러 부처님의 큰 자비심이 깃든 곳에도 이런 짓을 하는데,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중략) 그러나 부처님 말씀은 만들어지지도 훼손되지도 않는다. 말씀은 그릇(대장경)에 깃들어 있을 뿐이다. 그릇이 만들어지고 훼손되는 것은 자연의 분수이다. 훼손되면 다시 고쳐 만드는 것이 마땅하다. 하물며 가정과 국가가 불법을 존중해 받들고 있는데, 구습에 젖어 그대로 지낼 수 없다. 이 커다란 보배(대장경)가 없는데, 어찌 감히 그 만드는 일이 거대하다고 걱정해 꺼려하는가?

- 《동국이상국집》 권25, <대장경판각 군신기고문()(1237)>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판.<출처: 문화재청>

몽골을 야만시해서 ‘달단’이라 부르는 등 고려가 문명국임을 과시하는 강렬한 문명의식이 <기고문>에 드러나 있다. 이규보는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초조 대장경을 불태운 몽골을 문명의 파괴자로 여겼다. 그는 불법()과 문명을 수호하기 위해 대장경을 다시 판각하는 대역사(재조 대장경)의 성공을 기원했다. 또한 대장경 조판을 통해 국왕에서 일반민까지 모든 계층을 결집해 몽골의 침입을 극복하려 했다. 그의 문명의식이 지닌 긍정적인 측면이라 할 수 있다.

몽골의 1차 침입(1231) 이듬해 최씨 정권은 강화 천도를 결심하지만, 당시 조정 내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아 쉽게 결정할 사안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규보는 최씨 정권의 강화 천도를 높이 평가했다.

도읍을 옮기는 일은 하늘로 오르는 것만큼 어려운 일
마치 공을 굴리듯 하루아침에 옮겨왔네
천도 계획을 서두르지 않았으면
우리 삼한은 이미 오랑캐의 땅이 되었을 것이네
쇠로 만든 듯이 크고 단단한 성과 주위를 둘러싼 물결
공력을 비교하자면 어느 것이 더 나을까?
천 만의 오랑캐 기마병이 새처럼 날아온다 해도
눈앞의 푸른 물결을 건널 수 없으리

- 《동국이상국집》 권18, <바다를 바라보면서 천도한 것을 추경함[]>

이규보는 고려 조정이 바다에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인 강화도로 천도하지 않았다면 삼한은 벌써 오랑캐의 땅이 되었을 것이라며 천도를 옹호했다. 물론 위의 글은 강화 천도 후 지은 것이다.

고려고종사적비. 강화 천도로 고종이 첫 발을 디딘 승천포에 있다.<출처: 필자 제공>

이규보와 과거 합격 동기생이자 가장 절친한 사이인 유승단(, 1168~1232)은 과거 합격 후 태자를 가르치는 학관()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성공한 관료의 길을 걸었지만, 그는 강화천도에 반대했다. 그는 강화 천도를 단행한 1232년 사망한다. 반면에 이규보는 과거 합격 후 18년 동안 백수로 지내다가, 당시 권력자 최이()의 천거로 그토록 바라던 관료가 되었다. 그러니 그는 천도에 찬성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절친한 두 사람 사이에도 의견이 갈릴 정도로 강화 천도는 당시로서는 쉽게 합의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이규보는 최씨 정권의 천도를 옹호했고, 천도 이듬해인 1233년 재상이 된다. 초고속 승진이었다. 그는 강화 천도를 찬양하는 글을 짓는 등 이후 최씨 정권을 옹호하는 문객()이자 문사()로 변신한다. 이뿐만 아니었다. 그는 각종 외교문서와 최씨 권력자들을 위한 문장을 짓는 등 최씨 정권의 철저한 이데올로그가 된다.

강화산성 북문 성벽. 강화천도 후 쌓은 산성. 대몽항쟁의 상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출처: 필자 제공>

그러나 강화 천도를 강행한 최씨 정권은 육지에서 몽골의 침략에 시달린 백성의 외면을 받아 점차 몰락의 길로 들어선다. 그런 점에서 최씨 정권의 강화 천도를 찬성한 이규보의 문명의식은 때로는 연구자들에 의해 비난을 받기도 한다. 어떻든 13세기 전반 몽골 항쟁기를 거쳐, 13세기 후반 고려는 몽골의 지배를 받아 제후국으로 전락한다. 이에 따라 고려는 중국과 다른 또 하나의 천하 중심이라는 다원적인 천하관과 중국과 문명 수준이 대등하다는 소중화 의식은 변질을 강요당하게 된다. 이규보의 문명의식은 그 분기점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규보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다. 고려 중기 지식인의 문명의식 자체가 크게 변질될 수밖에 없었다.

 

4.탐방일자 

2023.03.22(수)

 

5.글쓴이

김영도(010-8121-8041)

 

6.생생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