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

김재로묘

김영도 2021. 9. 13. 20:57

1.위치

인천광역시 남동구 운연동 산 64-13번지

 

2.교통

(갈때,올때)자가용

 

3.상세설명

조선의 정치가. 자는 중례(仲禮), 호는 청사(淸沙)ㆍ허주자(虚舟子), 시호는 충정(忠靖). 본관은 청풍(淸風). 우의정 구(構)의 아들. 1710년 문과에 급제, 1716년 부수찬(副修撰)으로서 선현(先賢)을 무고한 소론(少論)의 유봉휘(柳鳳輝)ㆍ정식(鄭拭) 등을 탄핵, 파직케 했다. 1720년(경종 1) 호조ㆍ이조의 참의ㆍ부제학 등을 역임, 이듬해 좌부승지(左副承旨)를 거쳐 대사간ㆍ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다. 1722년 신임사화(辛壬士禍)로 문외 출송(門外黜送) 되었다가 이듬해 울산(蔚山)에 안치(安置) 되었고, 1724년(영조 1) 풀려 나와 이듬해 대사간에 재등용되어 소론(少論)의 과격파 김일경(金一鏡)의 무고 사실을 상소하여 사형케 했다. 부제학ㆍ예조 참판 등을 거쳐 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이 재등장하자 다시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다시 기용되어 호서 안무사(湖西按撫使)를 겸하여 난을 토평하는데 공을 세웠고, 이해 다시 당파를 조성한 죄로 삭직(削職) 되었으나 곧 복직되어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서 실록도청당상(實錄都廳堂上)을 겸직 《경종수정실록(景宗修正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1731년 병조 판서로 재직 중 신임사화로 죽은 노론(老論)의 대신 김창집(金昌集)과 이이명(李頤命)의 복관(復官)을 상소하여 신원케 했고, 2년 후 양역 구관당상(良役勾管堂上)으로 양역을 재조정했으며, 이듬해 세자의 책례도감 제조(册禮都監提調)를 지낸 뒤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었다. 1737년 당파 싸움을 벌여 탕평책(蕩平策)을 어긴 죄로 파직되었다가 곧 좌의정에 복직, 이듬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청나라에 가서 신간된 《명사(明史)》를 얻어 왔고, 1740년 영의정에 올랐다. 관직 생활의 절반은 모두 대신으로 있으면서 노론의 선봉자로 활약했고, 1746년에 김종서(金宗瑞)ㆍ황보 인(皇甫仁)의 복관을 건의하여 신원케 했다.

 

4.탐방일자 

2021.09.13(월)

 

5.글쓴이

김영도(010-8121-8041)

 

6.생생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