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군

화서 이항로생가 탐방기

김영도 2021. 11. 17. 21:14

1.위치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화서1로 239

     

2.교통

(갈때,올때)자가용

 

3.상세설명

본관은 벽진(碧珍)이고 자(字)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이다. 원래 이름은 광로(光老)였으나 조선 제25대 철종(哲宗)이 즉위한 뒤에 피휘(避諱)를 위해 항로(恒老)로 이름을 바꾸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지금의 경기도 양평인 양근군(楊根郡) 출신으로 아버지는 이회장(李晦章)이고, 어머니는 전의 이씨(全義李氏)이다. 부친의 권유로 1808년(순조 8) 한성부(漢城府)에서 실시한 초시(初試)에 합격했으나, 그 뒤로 더 이상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에만 매진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조선 말기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대표하며 의병운동을 주도했던 최익현(崔益鉉)·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 등이 모두 그의 문하이며, 이들을 그의 호를 따서 화서학파(華西學派)라고 부르기도 한다.

1840년(헌종 6)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휘경원 참봉(徽慶園參奉)에 임명된 것을 비롯해 여러 차례 관직에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양하며 관직에 나서지 않았다. 1862년(철종 13)에는 이하전(李夏銓)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의금부에 구금되기도 했으나 곧바로 풀려났다. 1864년(고종 1)에는 좌의정 조두순(趙斗淳)의 천거로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으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나자 좌의정 김병학(金炳學)의 천거로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임명되었고, 곧바로 외적과 화친하지 말고 항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고종은 이항로를 불러들여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임명했으나 이항로는 사직하였고, 고종이 다시 호군(護軍)으로 임명했으나 마찬가지로 노환을 이유로 거듭 사직을 청했다. 당시 이항로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추진하던 경복궁 중건을 중지하고, 명나라 만력제(萬曆帝)와 숭정제(崇禎帝)의 묘당인 만동묘(萬東廟)에 다시 제사를 지낼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항로는 1868년(고종 5) 음력 3월 18일에 사망했으며, 고향인 경기도 양평에 매장되었다.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에 있는 이항로 선생 생가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묘역 인근에 세워진 사당의 터인 노산사지(盧山祠址)는 경기도 기념물 제4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항로는 주리론(主理論)에 바탕을 두고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윤리를 강조해 한말 위정척사론과 의병항쟁의 사상적 기초를 다졌다. 그는 이(理)와 기(氣)를 엄격히 구별하고 차등적으로 인식해서 이(理)가 주가 되면 천하가 편안해지고 기(氣)가 주가 되면 천하가 위태로워질 것으로 보았다. 그의 저술은 1899년에 문인들에 의해 32권, 부록 9권으로 구성된 《화서집(華西集)》으로 편찬되었다. 이 밖에 《고려사(高麗史)》와 중국의 《송사(宋史)》, 《원사(元史)》를 합해 편찬한 《송원화동사합편강목(宋元華東史合編綱目)》(33권 33책), 주희의 《주자대전(朱子大全)》에 관한 송시열(宋時烈) 등의 주석과 해설 등을 집대성한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121권 70책) 등도 남겼다.

 

4.탐방일자

2021.11.17(수)

 

5.글쓴이

김영도(010-8121-8041)

 

6.생생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