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백(李後白, 1520-1578)은 명종,선조 때의 문신이다. <선조실록>의 졸기와 <연려실기술>, <국조인물고> 등에 따르면, 그의 자는 계진(季眞)이고 호는 청련(靑蓮)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어려서 양친을 잃고 15살까지 함양의 백부(伯父)에게서 양육되다가 16살에 할머니를 따라 강진으로 옮겼다. 27살에 진사가 되었다. 벼슬에 뜻이 없어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 등 후진을 가르쳤고, 김인후(金麟厚), 기대승(奇大升) 등과 교유했으며, 할머니의 상을 치렀다. 36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박사, 홍문관 응교, 전한 등을 거쳤고, 50살에 명나라에 다녀와 도승지, 대사헌, 부제학, 호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다시 명나라에 주청사로 가서 선조의 종통(宗統)을 바로잡은 공으로 연양군(延陽君)에 추봉되었다, 대사간, 이조판서, 호조판서를 지냈다. 성품이 청렴하고 침착 중후하였으며, 청백리에 뽑혔고, 시문에 능했다.
평사(平沙)에 낙안(落雁)하고 강촌(江村)에 일모(日暮)로다.
어강(漁舡)도 돌아 들고 백구(白鷗) 다 잠든 적에
빈 배에 달 실어 가지고 강정(江亭)으로 오노라.
소상강(瀟湘江) 세우중(細雨中)에 삿갓 쓴 저 노옹(老翁)아.
빈 배를 흘리저어 어드러로 향하는다.
태백(太白)이 기결비상천(騎鯨飛上天)하니 풍월(風月) 실러 가노라.
순(舜)이 남순수(南巡狩)하사 창오야(蒼梧野)에 붕(崩)하시니
오현금(五絃琴) 남풍시(南風詩)를 뉘게 전코 붕(崩)하신고.
지금에 정호용비(鼎湖龍飛)를 못내 슬퍼하노라.
황학루(黃鶴樓) 저[笛] 소리 듣고 고소대(姑蘇臺)에 올라가니
한산사(寒山寺) 찬 바람에 취한 술 다 깨거다.
아이야 주가하처(酒家何處)오 전의고주(典衣沽酒)하리라.
그가 15살에 백부를 따라 하동 섬진강에서 뱃놀이하며, 백부의 권유에 따라 ‘소상팔경(瀟湘八景)’ 시조를 지었는데, 서울에 전파되어 악부(樂府)에까지 올랐다고 한다. 위의 네 수는 각각 ‘소상팔경’의 2, 4, 6, 8번째 수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능이 빼어나고 12살에 표인(表寅)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울 정도로 조숙했다. ‘소상팔경’ 시조는 섬진강의 풍경을 보고, 양자강 지류인 소수(瀟水)와 상수(湘水)가 합치는 동정호(洞庭湖) 남쪽의 경치를 그린 송나라 송적(宋迪)의 ‘소상팔경’ 그림을 모방하여 그 경치와 고사를 상상하며 지은 것이다. 소상팔경은 평사낙안(平沙落雁), 원포귀범(遠浦歸帆), 산시청람(山市晴嵐), 강천모설(江天暮雪), 동정추월(洞庭秋月), 소상야우(瀟湘夜雨), 연사만종(煙寺晩鐘), 어촌석조(漁村夕照) 등이다.
인용된 첫 수에서는 섬진강의 경치를 읊었는데 ‘소상팔경’의 평사낙안(平沙落雁)을 염두에 두었다. 초장은 하동 섬진강의 모래강변에 기러기가 앉고 강마을에 해가 지는 저녁 풍경이다. 중장에는 고기잡이배도 돌아오고 갈매기마저 잠들었다고 하여 강마을에 밤이 깃드는 고즈넉한 시간을 설정했다. 종장은 텅 비어 있으면서도 달빛으로 충만한 배를 그려서 자연 속에서 느끼는 초연한 아름다움을 잡아내었다. 그의 조숙한 솜씨를 짐작할 수 있다.
인용한 둘째 수는 ‘소상팔경’의 소상야우(瀟湘夜雨)를 생각하면서 지은 시조다. 초장에서 비 오는 강 풍경을 제시하고, 중장에서 강물 위에 흐르는 배의 가는 곳을 물었다. 자연 속에 노니는 배가 일정한 행선지가 있을 리 없다. 종장에서 이태백이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올랐다는 전설처럼 빗속에서 강물따라 흐르는 배는 음풍농월을 즐기는 낭만적 정취의 배라는 것이다.
인용한 셋째 수는 순임금이 남쪽으로 순수(巡狩)하다가 창오(蒼梧)에서 죽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직서하여 소상(瀟湘)과 관련된 고사를 연결시켰다. 소상의 반죽(斑竹)은 순임금을 따라 죽은 이비(二妃)의 피눈물이 어린 것이라는 전설을 상기하여 순임금의 죽음을 들고 나온 것이다. 중장에는 순임금은 오현금을 켜면서 남풍가를 노래하여 백성의 마음을 달래고 태평성대를 이루어냈다는 <십팔사략(十八史略)>의 고사를 끌어와 오현금과 남풍시를 어찌하고 죽었느냐고 한탄한 다음에 종장에서 황제(黃帝)가 형산(荊山) 아래 정호(鼎湖)에서 용을 타고 승천했다는 전설을 들어 소상(瀟湘)과 가까운 곳에서 옛날 전설 속 임금이 죽은 사실을 슬퍼한다고 했다. 황제나 요순이 중국 고대 전설 속에 나오는 임금들로 태평성대를 이루었던 이상적 군주라고 하는데, 이런 임금들이 이 곳에서 신선이 되었다는 고사를 들어서 풍광이 아름다운 ‘소상팔경’과의 인연을 나열한 것이다.
마지막 수는 호북성(湖北省) 무창(武昌) 서남에 있는 황학루(黃鶴樓)와 강소성(江蘇省) 오현(吳縣)의 고소산(姑蘇山)에 있는 고소대에 올라 취흥을 즐기는 것을 상상하여 지은 것이다. 초장에서 시공을 초월하여 황학루에서 피리소리를 듣고 고소대에 올랐다고 하였다. 황학루는 촉한(蜀漢)의 비위(費褘)가 신선이 되어 황학을 타고 나려와 쉬었다는 곳으로 예로부터 중국 시인들의 낭만적 정취를 드러내는 좋은 소재였다. 고소대는 고소산성의 높은 누대로 당나라 장계(張繼)의 ‘풍교야박(楓橋夜泊: 달 지고 까마귀 울어 천지에 서리 내리고 / 강변에 단풍들고 고기잡이 불 밝아 시름 속에 잠들었는데 / 고소성 밖 한산사에서 / 밤중에 울리는 종소리가 객선에 들려오네. 月落烏啼霜滿天 江楓漁火對愁眠 姑蘇城外寒山寺 夜半鐘聲到客船)’에 나와서 잘 알려진 곳이다. 중장에서 마치 자신이 고소성 밖 한산사에서 찬바람을 쐬어서 술을 깬 듯한 기분에 젖었다는 것이다. 하동 섬진강의 강바람을 맞으며 멀리 소상팔경을 상상으로 그리면서 자신이 고소성 밖 한산사에 서 있는 환상체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종장에서 아이를 불러 술집이 어디냐고 묻고 옷을 전당잡혀 술을 사러 보내겠다고 하였다. 옷을 전당잡히고 술을 사 먹는다는 고사는 이태백을 비롯하여 중국 시인의 낭만적 흥취를 보여주는 것으로 한시에 자주 나오는 것으로 여기에서 잠깐 차용했다.
우리의 경치를 놓고 ‘소상팔경’을 생각했다는 것부터가 중국 중심의 문화 모방적 발상이다. 당시는 중국만이 세계의 중심으로 인식되었으므로 한시에서도 이런 경향이 보편적인 일이었고 시조에도 거부감 없이 수용된 것이다. 중국의 역사와 지리가 시공을 넘어 우리가 지향하려는 대상이 되었으니 한시는 물론 시조에서도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
옥매(玉梅) 한 가지를 노방(路傍)의 버렸거든
내라서 거두어 분(盆) 위에 올렸더니
매화이성랍(梅花已成臘)하니 주인 몰라 하노라.
추상(秋霜)에 놀란 기러기 섬거온 소리 마라.
가뜩에 님 여의고 하물며 객리(客裏)로다.
어디서 제 슬허 울어 내 스스로 슬흐랴.
첫 번째 시조는 백련(白蓮) 문익주(文益周)를 추천하여 태인(泰仁) 현감 등 세 번이나 군수를 하게 했는데, 벼슬에 나간 후에는 일절 내왕이 없어서 이 노래를 지어서 염량세태(炎凉世態)를 풍자했다는 작품이다. 함축과 상징을 이용한 흥(興)의 수법이다. 매화를 읊고 있지만 속뜻은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 초장에서 길가에 버려진 옥매(玉梅)를 등장시켰다. 이것은 물론 벼슬에 나가지 못한 친구 문익주를 칭한다. 그냥 매화를 읊은 영물시(詠物詩)로 보기에는 종장의 ‘주인 몰라 하노라’가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작자의 의도를 존중하는 수밖에 없다. 중장에서 길가에 버려진 매화를 주워다가 화분에 심었다는 말은 벼슬에 나가지 못한 친구를 벼슬길에 추천해서 군수로 나가게 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종장에서 매화가 섣달이 되어 꽃이 피었는데 주워서 화분에 심어준 주인을 모른다고 한탄하여, 자신을 추천하여 군수를 지내게 해준 친구를 찾아보지도 않는 무정함을 섭섭해 하였다. 한자 어구가 섞여있긴 하지만 상징 수법이 자연스럽고 풍자하는 뜻이 은근하다.
두 번째 시조는 서글픈 주관적 감회를 토로한 작품이다. 자신의 슬픔을 강조하기 위해 기러기 울음소리를 끌어와 제 감정을 투사했다. 초장은 기러기의 놀란 울음소리를 듣고 나약한 소리 말라고 꾸짖었는데, 실은 그 울음소리에 서글퍼지는 자신의 심정을 추스르려는 자기암시에서 나온 말이다. 중장은 작중화자의 어려운 처지를 늘어놓았다. 임과 이별하고 객지에 홀로 떨어져 있는 슬픈 처지라고 했다. 종장에서 본심을 드러내어 기러기가 슬피 우니 자기도 그 울음소리에 더욱 슬퍼진다고 하였다. 기러기 울음소리를 듣고 서글픈 느낌이 들어서 이런 시조를 지었겠는데,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29살 때 그를 돌보아준 할머니가 돌아갔을 때 애통해 하였고, 말년에 동향 친구인 옥계(玉溪) 노진(盧禛, 1518-1578)이 죽자 몹시 애통해 하다가 조상하고 돌아와 다음날 죽었다고 한다. 이런 때의 애통한 심정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