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李翎, 1615-1637)은 인조 때의 의사(義士)다. <국조인물고>에 의하면, 자는 화중(和中)이고 호는 우송재(友松齋)이며 본관은 우봉(牛峰)이다. 어려서 효성과 우애가 지극했고, 22살(1636, 인조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이유겸(李有謙)과 함께 가족을 이끌고 강화에 들어가서 의병이 되어 광진(廣津)을 수비하다가 성이 함락되자 자결을 기도했으나 부모가 살아 있어 단념했다. 가족과 함께 길상산으로 피난하던 중에 적을 만나 어머니 윤씨가 불에 뛰어들어 화상을 입었고, 동생 숙(䎘)이 포로로 잡혔다. 형과 함께 어머니를 부축해 도망하던 중에 적이 쏜 화살을 막다가 형은 어깨와 옆구리에 화살을 맞고, 그는 얼굴에 두 대의 화살을 맞아 즉사했다. 그 때 나이 23살이었다. 후실인 오씨와 형수 김씨도 자결했다. 그 뒤에 부모와 형 핵은 살아났고, 동생 숙은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돌아와서 훗날 여러 벼슬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그의 충절이 조정에 알려져 정문이 세워지고 지평에 추증되었다.
초생달 뉘 베어 적으며 보름달 뉘 그려 둥글었느뇨.
냇물 흘러 마르지 않고 연기 나며 사라지니
세상에 영허소장(盈虛消長) 나는 몰라.
최남선본 <가곡원류>에 우봉인(牛峰人) 동산(東山) 이선생(李先生)이 지었다고 했는데, 심재완의 <시조대전> 작가 색인에는 이영의 작품으로 적어 놓았다. 이영이 지었다면, 병자호란 이전에 지었을 것이다. 초장이 형식을 벗어날 정도로 길어졌고, 종장은 한 어절이 짧게 되었다. 후대에 가창 때문에 ‘하노라’ 쯤이 탈락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격식에서 벗어나 있고 내용도 문맥 연결이 순조롭지 않다. 초장에서는 초승달은 누가 베어 먹어서 기운 달이 되었으며 보름달은 누가 그려서 둥그렇게 되었느냐고 했다. 달의 차고 기우는 것을 그려내고 베어낸 것 같다고 형용한 것이다. 중장에서는 냇물은 달과는 달리 변함없이 흐르는데, 연기는 나는 즉시 사라진다고 하여 서로 다른 것을 대조시켰다. 종장에서 달처럼 차고 기우는 것과 냇물처럼 변함없이 흐르는 것, 그리고 연기같이 금방 사라지는 것을 들어 영허소장(盈虛消長)을 말하고, 자신은 그것을 모른다고 했다. 차면 이지러지고, 쇠하면 성하는 자연의 이치를 자신은 모른다고 말한 것이, 세상에 어떤 변화나 풍파가 와도 자신은 도리에 투철하게 살겠다는 굳은 결의를 표명한 것인지, 세상의 변화에 관심이 없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