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인조․효종․현종․숙종 때의 문신․학자이다. 실록과 <연려실기술>, <송자대전(宋子大全)> 등에 의하면, 자는 영보(英甫)이고 호는 우암(尤庵)이며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김장생․김집 부자의 문인이고 노론의 영수다. 27살(1633, 인조11)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경릉참봉이 되었다. 29살에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고, 병자호란에 남한산성으로 왕을 호종한 후 낙향했다. 효종즉위 후, 장령, 진선, 집의가 되었으나 김자점이 영의정이 되자 사직했다. 다시 진선이 되었으나 그가 지은 장릉지문(長陵誌文)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김자점이 청나라에 밀고하여 낙향했다. 후진양성과 저술에 힘쓰다가 52살(1658, 효종9)에 이조판서가 되어 북벌책을 추진했으나 이듬해 효종이 죽자 북벌책은 중지되었다. 효종의 장례에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을 1년으로 하자고 주장하여, 반대파인 남인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좌참찬을 거쳐 54살(1660, 현종1)에 우찬성이 되었으나 효종의 장지를 잘못 골랐다는 규탄을 받고 낙향했다. 62살에 우의정이 되었으나 좌의정 허적과 불화로 사직했다가 3년 뒤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었다. 68살에 인선왕후가 죽어 자의대비의 복상을 9개월로 하자고 주장하다가 남인의 1년설에 밀려 덕원, 거제 등지로 유배되었다. 73살(1679, 숙종5)에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영중추부사가 되었고 77살에 치사하여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남인의 처벌에 대하여 과격한 입장을 취하였고, 제자 윤증(尹拯)과 대립하여 서인 소장파인 소론과 분파되었다. 그 후 화양동(華陽洞)에 은퇴하여 왕세자 책봉에 반대상소를 올렸다가 제주에 유배되었고 국문을 받으려고 상경하는 도중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승하였고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늙고 병든 몸이 북향(北向)하여 우니노라.
님 향한 마음을 뉘 아니 두리마는
달 밝고 밤 긴 적이면 나뿐인가 하노라.
님이 혜오시매 나는 전혀 믿었더니
날 사랑하던 정(情)을 뉘손대 옮기신고.
처음에 뮈시던 것이면 이대도록 설우랴.
청산(靑山)도 절로절로 녹수(綠水)도 절로절로
산(山) 절로 수(水) 절로 산수간(山水間)에 나도 절로
그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 하리라.
그는 효종의 지우를 받아 북벌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러나 효종이 죽자 그 정책은 중단되었고 곧 예송(禮訟)이 일어나 남인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지만 오래지 않아 실각하였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가 죽은 임금을 그리워했다. 특히 가운데 수는 ‘기해년에 임금이 죽은 후 뒤를 따를 수 없어 화양동에 은거하며 슬픔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시를 지었다.’라고 했다. 앞의 두 수는 임금을 그리워하는 충성을 드러낸 것이고, 마지막 수는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살겠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첫 수는 효종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직설적으로 드러내었다. 쉰 살이 지났으니 늙고 병들었다고 했고, 임금을 그리는 정을 북향하여 운다고 표현했다. 신하이면 누구나 임금을 사랑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자신의 임금에 대한 사랑은 남다른 것이라고 했다. 달이 밝고 잠들지 않는 긴 밤에는 죽은 임금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하여, 효종의 지우(知遇)를 못 잊어 함을 드러내었다. 둘째 수는 정국의 변화가 있은 다음에 임금에 대한 서운함 내지 원망을 표현한 것이다. 아마 현종이나 숙종 때에 정쟁에 밀려 물러난 다음에 지은 것이라 생각된다. 임금이 자신을 헤아려 주시므로 전혀 믿었는데 정쟁으로 자신이 밀리자 다른 사람에게로 총애를 옮겼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미워했더라면 지금 이렇게 서럽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버림받고 그를 원망하는 여인의 목소리를 취하여서 자신의 서운한 정서를 더욱 절절하게 했다. 마지막 수는 김인후(金麟厚, 1510-1560)가 지은 ‘청산(靑山)도 절로절로 녹수(綠水)도 절로절로/ 산도 절로 물도 절로하니 산수간(山水間) 나도 절로/ 아마도 절로 생긴 인생 절로절로 늙사오려.’를 종장만 조금 손질한 것이다. 김인후는 벼슬을 그만 두고 은거하여 노장사상에 심취하였으므로 이런 시조를 읊었다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송시열은 화양동에 은거해서도 중앙 정계에 관심을 끊지 않았고 결국 정치적 회오리 속에서 죽었다. 화양동에 머물며 한때 자연 속에서 느낀 정취를 잠깐 김인후의 시조를 빌어 표현한 것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