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보(李鼎輔, 1693-1766)는 영조 때의 문신이다. <영조실록>과 <국조방목>, <강한집(江漢集)> 등에 의하면, 그의 자는 사수(士受)이고 호는 삼주(三洲)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으로 이명한(李明漢)의 고손(高孫)이다. 29살(1721, 경종1)에 진사를 거쳐 40살(1732, 영조8)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봉교가 되고, 44살에 병조좌랑, 정언을 거쳐, 지평이 되어 탕평책을 반대하고 현량을 뽑으라는 시무십일조(時務十一條)를 올렸다가 파직 당했다. 이듬해 부수찬, 교리를 거쳐, 다음해 헌납이 되었다. 47살에 응교, 동부승지가 되고, 이듬해에 수원부사로 나갔다가, 다음해 부제학, 대사간, 대사성, 예조참의를 지냈다. 50살에 모친상을, 이듬해 부친상을 연이어 당했다. 54살에 부제학, 승지가 되고, 이듬해 호조참의를 역임했다. 56살에 함경감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한성좌윤이 되었다. 58살(1750, 영조26)에 도승지가 되어 생진시(生進試)의 일을 직언하다가 인천부사로 좌천되었다. 60살에 성천부사, 좌부빈객을 지내고, 62살에 예조참판, 한성판윤, 형조판서가 되었다. 다음해에 지의금부사, 우참찬, 예조판서, 우빈객을 역임하고, 64살에 판의금, 공조판서가 되었다. 66살에 이조판서, 판돈령부사가 되었고, 69살에 이조판서 겸 수어사가 되었다. 이듬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양관 대제학,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71살에 대제학 겸 예조판서로 연로하여 사직했다. 성품이 강직하여 직언을 잘 했지만 도량이 넓었고, 문장과 글씨에 능했다. 시조 90여수를 남겼다.
귀거래(歸去來) 귀거래(歸去來)한들 물러간 이 그 누구며
공명(功名)이 부운(浮雲)인 줄 사람마다 알건마는
세상에 꿈 깬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내게 칼이 있어 벽상(壁上)에 걸렸으니
때때로 우는 소리 무엇이 불평(不平)한지
두우(斗牛)에 용광(龍光)이 비쳤으니 사람 알까 하노라.
누구가 광하천만간(廣廈千萬間)을 일시에 지어내어
천하(天下) 한사(寒士)를 다 덮자 하였던고.
뜻 두고 이루지 못하니 네오 내오 다르랴.
남양(南陽)에 누운 선비 밭 갈기만 일삼더니
초당(草堂) 춘일(春日)에 무슨 꿈을 꾸었건대
문밖의 귀 큰 왕손(王孫)은 삼고초려(三顧草廬) 하거니.
장공(長空)에 걸린 달아 만고인물(萬古人物) 네 알리라.
영웅(英雄)은 그 누구며 호걸(豪傑)은 누구누구
아마도 제일인물(第一人物)은 장자방(張子房)인가 하노라.
그의 작품들은 매우 다양하다. 주제나 소재가 다양할 뿐 아니라 형태적으로도 평시조, 엇시조, 사설시조가 다 있다. 여기서는 그가 정치적인 뜻을 드러낸 작품을 골랐다. 첫 수는 벼슬을 버리고 전원으로 물러나고 싶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정작 물러난 사람은 많지 않다는 풍자적인 어조를 띠고 있다. 벼슬에 나아가 공명을 이루는 것이 뜬구름 같은 것인 줄을 사람마다 알고 있지마는 공명에 대한 꿈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가지 못하니, 누구나 입신양명의 욕구를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은 그것을 슬퍼한다면서 사람들의 출세욕을 지적했다. 둘째 수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칼에 투사했다. 여항시인들이 자신의 포부를 칼에 투사하던 것과 유사하다. 벽 위에 걸린 칼이 때때로 불평을 지니고 운다면서 북두성과 견우성의 정기가 서렸다고 했다. 바로 자신이 심중에 큰 뜻을 품고서 현실의 부조리를 불평스럽게 여기고 이를 바로잡으려는 포부를 지녔다는 말이다. 그가 임금에게 여러 번 직언했다가 파직당한 것과 관련이 있을 듯하다. 셋째 수는 천하의 불우한 선비를 다 포섭하고 싶은 뜻을 말했는데, 천만간이나 되는 큰 집을 지어 그들을 다 초빙하고 싶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고 했다. 그가 도량이 넓고 배포가 컸음을 짐작할 수 있는 예다. 넷째 수와 다섯째 수는 고사를 회고한 것이긴 하지만 제갈량(諸葛亮)이나 장양(張良)처럼 큰 뜻을 이루어 보고 싶은 욕망을 표현한 것이다. 넷째 수는 제갈량이 남양에서 밭 갈다가 유비의 삼고초려를 받고 촉한을 세웠던 고사를 인용한 것이고, 마지막 수는 하늘에 뜬 달에게 영웅호걸이 누구냐고 물어 자신은 한고조를 도와 한나라를 세운 장양이 최고의 인물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자신도 임금을 도와 큰 공을 세우고 싶다는 포부를 드러낸 것이다.
초야(草野)에 묻힌 어른 소식(消息)이 어떠한고.
여반산채(糲飯山菜)를 먹으나 못 먹으나
세상에 우환(憂患) 뉘 모르니 그를 부러 하노라.
두견(杜鵑)아 우지마라 이제야 내 왔노라.
이화(梨花)도 피어 있고 새 달도 돋아 있다.
강상(江上)에 백구(白鷗) 있으니 맹세 풀이 하노라.
운담풍경(雲淡風輕) 근오천(近午天)에 소차(小車)에 술을 싣고
방화수류(訪花隨柳)하야 전천(前川)을 지나가니
사람이 알 리 없으니 혼자 논들 어떠리.
한중(閑中)에 일이 없어 낮잠과 벗이 되어
꽃이 핀지 잎이 진지 모르고 누웠으니
세상에 무슨 일 있었던지 나는 몰라 하노라.
천산(千山)에 눈이 오니 건곤(乾坤)이 일색(一色)이라.
백옥경(白玉京) 유리계(琉璃界)인들 이에서 더할쏘냐.
천수(千樹)에 이화발(梨花發)하니 양춘(陽春) 본 듯하여라.
정치적 포부를 버리고 강호에 돌아가 한가로움을 즐기는 것을 표현한 작품은 상당히 많다. 그런 점에서 선배 정치인의 사대부적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첫 수는 자신이 초야에 돌아가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서 부럽다는 말이다. 초야에 묻힌 선비가 거친 밥에 산나물 반찬을 먹기도 하고 거르기도 하지마는 벼슬길의 우환은 없으니 그것이 부럽다는 것이다. 둘째 수는 강호에 돌아가 즐기는 모습으로 계절은 봄이다. 이제 막 강호에 돌아와 ‘불여귀(不如歸)’라고 우는 두견새 소리를 듣고 이제 자신이 돌아왔으니 ‘돌아감만 못하다’라고 울지 말라는 것이다. 전원에는 배꽃도 피고 달도 솟았으며 강 위에 흰 갈매기도 떴으니 이 강호자연 속에 동화되겠다고 하여 전통적인 강호한정을 표현했다. 셋째 수는 늦은 봄날 구름은 성글고 바람은 가벼운데 한낮이 가까울 때 작은 수레에 술을 싣고, 꽃 피고 버들 우거진 앞내를 찾아가는 모습이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강호한정을 즐기는 풍경을 묘사했다. 넷째 수는 한가함에 겨워 낮잠을 즐기는 모습이다. 창밖에는 꽃이 피었는지 졌는지도 모르니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형편이라는 것이다. 현실세계와는 절연한 채 느긋하게 강호에서 사는 모습을 그렸다. 마지막 수는 강호의 겨울 풍경이다. 온 산에 눈이 내려 하늘과 땅이 모두 하얗다. 신선이 산다는 세계인들 이보다 더 아름답겠느냐고 감탄한다. 게다가 나무마다 배꽃처럼 하얀 꽃이 피었으니 마치 봄날의 풍경을 보는 것 같다는 것이다. 강호의 겨울 풍경을 산뜻하게 그려냈다고 하겠다.
환해(宦海)에 놀란 물결 임천(林泉)에 미칠쏜가.
값없는 강산(江山)에 말없이 누웠으니
백구(白鷗)도 내 뜻을 아는지 오락가락 하더라.
내 집이 깊고 깊어 뉘라서 찾을쏜가.
사벽(四壁)이 소연(蕭然)하여 일장금(一張琴)뿐이로다.
이따금 청풍명월(淸風明月)만 오락가락하더라.
황교(荒橋)에 입마(立馬)하고 원촌(遠村)을 찾아가니
일군(一群) 홍안(鴻雁)은 벽파(碧波)로 돌아들 제
옷 벗어 주가(酒家)에 보내고 벗 몯기를 기다린다.
청풍(淸風) 북창하(北窓下)에 잠깨어 누웠으니
희황씨(羲皇氏)적 사람인가 갈천씨(葛天氏)적 백성인가.
아마도 태고(太古) 인물(人物)은 나뿐인가 하노라.
추강(秋江)에 달 밝거늘 배를 타고 돌아보니
물 아래 하늘이요 하늘 위에 앉았으니
어즈버 신선(神仙)이 되건지 나도 몰라 하노라.
역시 강호한정의 시를 모았다. 벼슬을 버리고 강호에 노니는 심정을 읊은 것이니 만년에 지은 작품이 많을 것이다. 첫 수는 관직 세계의 놀란 물결이 강호에까지 미칠 리 없다면서 자연 속에서 흰 갈매기와 벗하며 살 뜻을 밝혔다. 강호가도(江湖歌道)의 관습화된 표현을 답습하고 있다. 둘째 수는 자연에 은둔하여 찾는 이 없는 고적함과 그 속에서 오직 거문고와 청풍명월을 벗하며 사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깊고 깊어 찾을 수 없다든가 사방 벽이 쓸쓸하다는 말에서 세속을 멀리하고 홀로 자연 속에 묻힌 서정적 자아의 단절감을 느낄 수 있다. 세속적 활동을 접고 자연에 가까워지는 은둔적 삶이다. 셋째 수는 친구를 찾아 마을을 방문한 광경을 그린 것이다. 황폐한 다리에 말을 세우고 먼 마을로 친구를 찾아갈 때 떼 지어 나는 기러기들은 푸른 파도 위로 날아간다.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술집에 보내어 술을 마련해 오라고 보내고 친구들이 모이기를 기다리고 있다. 마치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한 풍경이다. 사물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거기에 감춰진 뜻을 담는 경향은 ‘참다운 시(眞詩)’를 표방했던 숙종 때 김창협, 김창흡 형제에서 비롯되어 이 때에는 시조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런 작품이 그 예가 된다. 넷째 수는 여름날 북쪽 창 아래서 낮잠을 깨어 맑은 바람을 쐬고 누웠으니 마치 중국 고대의 전설상 임금인 복희씨나 갈천씨 때의 백성인 듯이 평화롭다는 내용이다. 강호자연 속에서 누리는 최대의 행복은 바로 마음의 평화일진대 여기서는 그러한 경지를 읊은 것이라 하겠다. 마지막 수에서는 재미있는 관찰을 보여주고 있다. 달 밝은 가을 강에 배를 타고 물을 내려다본다. 물에는 하늘이 비쳐 있고 나는 배 위에 있으니 마치 하늘 위에 앉은 듯하다. 그래서 하늘 위의 신선이라면 아마 이런 경지일 것이라고 흡족해 하였다. 자연에 동화되어 신선과 같은 경지에 들었음을 표현하였다.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동풍(三月東風) 다 보내고
낙목한천(落木寒天)에 네 홀로 피었는가.
아마도 오상고절(傲霜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강호(江湖)에 노는 고기 즐긴다 부러마라.
어부 돌아간 후 엿나니 백로(白鷺)로다.
종일을 뜨락 잠기락 한가한 때 없어라.
검은 것은 까마귀요 흰 것은 해오라기
신 것은 매실(梅實)이요 짠 것은 소금이라.
물성(物性)이 다 각각 다르니 물각부물(物各付物) 하리라.
광풍(狂風)에 떨린 이화(梨花) 가며오며 날리다가
가지에 못 오르고 걸리었다 거미줄에
저 거미 낙화(落花)인 줄 모르고 나비 잡듯 하도다.
있노라 즐겨 말고 못 얻노라 슬퍼 마소.
얻은 이 우환(憂患)인 줄 못 얻은 이 제 알쏜가.
세상에 얻을 이 하 분분(紛紛)하니 그를 우어 하노라.
묻노라 부나비야 네 뜻을 내 몰라라.
한 나비 죽은 후에 또 한 나비 따라 오니
아무리 푸새엣 짐승인들 너 죽을 줄 모르는가.
여기서는 사물을 관찰하고 거기에서 인생의 교훈을 발견한 작품들을 골랐다. 그런 만큼 대상에 대한 진지성이나 풍자성이 배어 있다. 첫 수는 국화가 상징하는 의미를 밝힌 것이다. 국화는 삼월의 봄바람을 다 보내 버리고 낙엽지고 차가운 가을에 홀로 피는 꽃이다. 그러니 서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고고(孤高)한 절개를 지닌 꽃이라고 의미부여를 하였다. 물론 이러한 상징화는 도연명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사용했던 의미의 답습이긴 하지만, 이 작품은 국화를 이런 의미로 읊은 아주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것이다. 둘째 수는 흔히 자연을 상징하는 백로를 다른 의미로 재해석하고 있다. 멋모르는 사람들은 고기가 자연 속에 노닌다고 하겠지만, 고기를 엿보는 것은 어부뿐만 아니라 백로도 있다. 이 백로도 하루 종일 고기를 잡으려고 날고 내리고 하면서 쉴 새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백로는 한가롭게 자연 속에 노니는 것이 아니라 먹이를 구하기 위해 여념이 없는 세속적 의미의 날짐승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거시적 의미는 자연의 일부였지만, 미시적 의미에서는 세상살이에 골몰하는 사람과 다를 게 없다는 깨우침이다. 셋째 수는 사물의 다양성을 말하는 것이다. 까마귀와 해오라기는 검고 희다는 시각적 차원에서 상대적이고, 매실과 소금은 시고 짜다는 미각적 차원에서 상대적이다. 이렇게 사물의 성질은 서로 다르며 독자적 가치를 지닌다. 그래서 사물은 각각의 독자적 존재 이유에 맡겨두라고 하여 만물의 다양성과 가치를 두루 존중하였다. 넷째 수는 거미줄에 떨어진 꽃잎을 나비인 줄 알고 잡는 거미를 읊은 것인데, 당쟁에서 상대편을 공격하는 것을 풍자한 듯하다. 바람에 떨어진 배꽃은 궁지에 몰린 상대편을 도치법으로 절박하게 암시한 것이고, 거미줄에 걸린 낙화를 나비 잡듯 하는 것은 이들을 공격하는 이편을 암유하는 것이다. 그는 철저한 노론이었지만 명목상의 탕평책보다는 국가와 백성을 위한 현량의 발탁을 주장했던 만큼, 맹목적인 당쟁도 이렇게 객관화하여 풍자할 수 있는 도량이 있었던 것이다. 다섯째 수는 벼슬길에 있으면서 벼슬길에도 우환이 많음을 깨우치는 내용이다. 벼슬이 있다고 즐기지 말고 벼슬이 없다고 슬퍼하지 말라면서 벼슬길의 근심을 벼슬 없는 사람은 모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벼슬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정도 모르고 시끄럽게 덤비니 그것이 우습다는 것이다. 이미 벼슬을 얻은 자의 여유로움이라고 하겠으나 벼슬길에도 근심이 많은데 무엇 하려고 그걸 얻으려고 야단법석을 하느냐는 충고다. 마지막 수도 당쟁을 암시한 것이다. 부나비가 불에 타 죽으면서도 끊임없이 불을 향해 모여들 듯이 당쟁의 회오리 속에 계속 희생되면서도 권세를 향해 모여드는 벼슬아치들의 속성을 꼬집는 듯하다. 그는 대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권력에 아첨하는 무리들을 이렇게 풍자한 것이다.
벗 따라 벚 따러 가니 익은 벚에 선 벚 있다.
이 벗 저 벚 하니 어느 벗이 벚 아니리.
내 좋고 맛 좋은 벚은 내 벚인가 하노라.
가을 타작 다한 후에 동네 모아 강신(講信)할 제
김풍헌(金風憲)의 메더지에 박권롱(朴勸農)의 되롱춤이로다.
좌상(座上)의 이존위(李尊位)는 박장대소(拍掌大笑) 하더라.
물 위에 사공과 물 아래 사공 놈들이 삼사월(三四月) 전세대동(田稅大同) 실러 갈 제
일천석(一千石) 싣는 대중선(大中船)을 자귀 다혀 꾸며내어 삼색실과(三色實果) 머리 갖은 것 갖추어 피리 무고(巫鼓)를 둥둥 치며 오강성황지신(五江城隍之神)과 남해용왕지신(南海 龍王之神)께 손 고초와 고사(告祀)할 제 전라도(全羅道) 경상도(慶尙道)라 울산(蔚山)바다 나주(羅州)바다 칠산(七山)바다 휘돌아서 안흥(安興)목 손돌(孫乭)목 강화(江華)목 감돌아들 제 평반(平盤)에 물 담듯이 만경창파(萬頃蒼波)를 가는 듯 돌아오게 고스레고스레 소망(所 望)일게 하오소서.
이어라 저어라 배 띄어라 지국총 나무아미타불.
일신(一身)이 살자 하니 물 것 겨워 못 살리로다.
피겨 같은 가랑니 보리알 같은 수퉁니 주린 이 갓 깬 이 잔 벼룩 굵은 벼룩 강 벼룩 왜 벼 룩 기는 놈 뛰는 놈에 비파(琵琶) 같은 빈대 새끼 사령(使令) 같은 등에아비 갈따귀 사마 귀 센 바퀴 누른 바퀴 바구미 거저리 부리 뾰족한 모기 다리 기다란 모기 살찐 모기 야윈 모기 그리마 뾰록이 주야로 빈틈없이 물거니 쏘거니 빨거니 뜯거니 심한 당(唐)비루에 어 려워라.
그 중에 차마 못 견딜손 오뉴월 복더위에 쉬파린가 하노라.
대상을 놀이하는 심정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들을 골랐다. 대상에 대한 진지성이 덜할 수 있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대상에 대한 또 다른 하나의 태도이므로 가치와 의의를 지닌다. 첫 수는 재치 있는 말장난이다. 벗과 벚이 음이 같은 것을 이용했다. 친구를 따라서 버찌를 따러 가니 익은 버찌와 선 버찌가 있다. 친구도 벗이고 버찌도 벚이니 어느 것인들 벗으로 소리 나지 않느냐. 냄새 좋고 맛도 좋은 버찌는 내가 딴 버찌이다. 이런 뜻이라 하겠다. 둘째 수는 향약에서 계를 모으며 노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가을 타작이 끝나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 강신(講信) 곧 향약의 계모임을 벌였다. 김풍헌은 메더지라는 옛 노래를 부르고 박권롱은 도롱이 춤을 어깨를 으쓱거리며 춘다. 이 모양을 보고 높은 자리에 앉은 이씨 어른은 손뼉을 치면서 웃더라는 것이다. 마을의 놀이마당을 있는 대로 그린 것이긴 하지만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고 모두 신분을 파탈(擺脫)하고 즐기는 현장을 그려놓았다. 셋째 수는 대동세를 실어 나르는 조운선(漕運船)에서 사공들이 무사함을 비는 고사를 지내는 모습을 그린 사설시조다. 조운선 사공들이 삼사월 대동세를 실으러 갈 적에 큰 배에다 제물을 차려놓고 무당을 불러 성황신과 용왕신에게 고사를 지내는데, 험한 바다와 좁고 물살이 빠른 물목을 지날 때 만경창파를 쟁반 물 같이 잔잔하게 지나게 해달라고 소망을 비는 광경을 그대로 옮겨놓고 끝에다가 어부사의 여음과 염불을 덧붙여 놓았다. 민중의 실상을 익살스런 시선으로 바라보고 기록했다고 하겠다. 마지막 수는 각종 물것들을 나열한 사설시조다. 해충에 시달려 못 살겠다고 엄살을 피운 다음 이, 벼룩, 빈대, 등에, 각다귀, 사마귀, 바퀴, 바구미, 거저리, 모기, 그리마, 뾰록이, 쉬파리 등을 나열했는데, 그중에서도 오뉴월 복더위에 귀찮은 쉬파리가 제일 견디기 어려운 것이라 했다. 이 물것들은 백성을 괴롭히는 못된 관리를 풍자한 것일 듯하다. 비록 우스갯소리처럼 늘어놓았으나 그 뒤에 매섭고 비판적인 뜻을 숨긴 것이다.
꽃 피면 달 생각하고 달 밝으면 술 생각하고
꽃 피자 달 밝자 술 얻으면 벗 생각하네.
언제면 꽃 아래 벗 데리고 완월장취(翫月長醉) 하리오.
강산(江山)도 좋을시고 봉황대(鳳凰臺)가 떠왔는가.
삼산(三山)은 반락청천외(半落靑天外)요 이수(二水)는 중분백로주(中分白鷺洲)로다.
이백(李白)이 이제 있어도 이 경(景)밖에 못 쓰리라.
남아(男兒)의 쾌(快)한 일은 그 무엇이 제일인고.
협태산이초북해(挾泰山以超北海)와 승장풍만리파랑(乘長風萬里波浪)과 주일두시백편(酒一斗 詩百篇)이라.
세상에 초개공명(草芥功名)은 부족도(不足道)인가 하노라.
대장부(大丈夫) 공성신퇴후(功成身退後)에 임천(林泉)에 집을 짓고 만권서(萬卷書)를 쌓아 두고
종하여 밭 갈리며 보라매 길들이고 천금준마(千金駿馬) 세워두고 절대가인(絶代佳人) 곁에 두고 금준(金樽)에 술을 놓고 벽오동(碧梧桐) 거문고에 남풍시(南風詩) 노래하며 태평연월 (太平烟月)에 취하여 누웠으니
아마도 남아(男兒)의 하올 일은 이뿐인가 하노라.
은한(銀漢)이 높아지고 기러기 우닐 적에
하룻밤 서릿김에 두 귀밑이 다 세거다.
경리(鏡裡)에 백발쇠용(白髮衰容)을 혼자 슬퍼하노라.
넘쳐나는 낭만적 흥취와 탄식을 읊은 작품이다. 고조되거나 위축된 감정이 드러난다. 첫 수는 취흥을 읊은 것이다. 꽃 피고 달 밝은 밤에 벗과 함께 달을 바라보며 술에 취하고 싶은 소망을 연쇄적으로 펼쳐놓았다. 흥취를 풀고자 하는 취락적 태도라 하겠다. 둘째 수는 강산 풍경을 바라보고 일어나는 시흥을 이백(李白)의 시를 빌려서 표현했다. 강과 산의 경치를 바라보니 마치 이백의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臺)’에 나오는 봉황대의 경치같이 아름답다. 그래서 그 시의 셋째 연(頸聯)을 인용하여 “세 산은 푸른 하늘 밖으로 반쯤 떨어지고, 두 물은 해오라기가 앉은 섬에서 가운데가 나뉘었구나.”라고 했다. 이렇게 빼어난 경치를 이백이라도 이렇게 밖에는 표현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여, 자신의 시적 흥취를 남의 시로 대신하고 말았다. 한시를 시조에 수용한 예이기도 하다. 셋째 수는 자신의 호쾌한 기상을 자랑삼아 펼쳐놓은 엇시조인데, 한문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태산을 끼고 북해를 넘는다.”는 <맹자(孟子)> 양혜왕상(梁惠王上)에 나오는 말이고, “큰 바람을 타고 만 리의 물결을 헤친다.”는 <남사(南史)> 종각전(宗慤傳)에 나오는 말이다. “술 한 말을 마시고 시 백 편을 짓는다.”는 두보(杜甫)의 시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 나온다. 그러니까 자신의 유쾌한 일이란 태산을 끼고 북해를 넘으며, 큰 바람을 타고 만 리의 물결을 헤칠 뿐 아니라, 술 한 말을 마시고 시 백 편을 짓는 것이라는 말이다. 요컨대 영웅호걸이 되어 세상에서 말하는 공명 따위는 초개같아서 말할 거리도 못 된다고 큰 소리를 쳤다. 넷째 수는 자신이 바라는 바를 드러낸 사설시조다. 대장부가 할 일은, 공을 이루고 물러나 전원에 집을 짓고 만 권의 책을 쌓아놓고, 종을 시켜 밭 갈고 보라매 길들여 준마 타고 사냥하며, 절세미인을 옆에 두고 금 항아리의 술을 따르며, 벽오동으로 만든 거문고 소리에 맞추어 순임금이 지은 남풍시를 노래하면서 평화로운 세월을 즐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부귀공명을 누리며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의 토로다. 마지막 수는 늙음을 탄식한 것이다. 가을밤을 배경으로 하여 은하수와 기러기 울음으로 한층 쓸쓸하고 처절한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노화현상은 서서히 진행되는 것이지만 시인은 어느 날 갑자기 하룻밤 서리가 온 사이에 이를 실감했다. 서리와 귀밑의 센 머리를 절묘하게 연결시켰지만 이것은 관습적 표현일 뿐이다. 그리하여 거울 속에서 머리가 하얀 늙은 자신을 발견하고 혼자 슬퍼한다는 것이다. 늙음을 서글퍼하는 감상적 탄식이다.
동풍(東風) 어제 비에 행화(杏花)꽃 다 피었다.
만원(滿園) 홍록(紅綠)이 금수(錦繡)가 이뤘어라.
두어라 산가(山家) 부귀(富貴)를 사람 알까 하노라.
산가(山家)에 봄이 오니 자연(自然)히 일이 하다.
앞내에 살도 매고 울 밑에 외씨도 삫고
내일은 구름 걷거든 약을 캐러 가리라.
오려 논 물 실어 놓고 면화(綿花) 밭 매오리라.
울밑에 외를 따고 보리 능거 점심하소.
뒷집에 빚은 술 익었거든 차자나마 가져오세.
삼복(三伏) 끓는 날에 땀 흘리며 기음맬 제
신고(辛苦)한 이 거동을 그 뉘라서 그려다가
님 계신 구중궁궐(九重宮闕)에 드려 뵐까 하노라.
농촌의 실상을 표현한 작품을 골랐다. 농촌의 아름다움과 농사의 분주함, 그리고 농민의 고달픔을 보여준다. 첫 수는 농촌 풍경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다. 봄날 샛바람 불고 비온 뒤에 살구꽃이 피었다고 서술하고, 동산 가득히 붉은 꽃 푸른 잎은 비단에 수놓은 듯 아름답다고 은유로 비유했다. 이 아름다운 경치야말로 남이 알까 두려운, 농촌의 소중한 재산 곧 부귀라고 했다. 전원 풍경이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보물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둘째 수는 농촌의 분주한 일상이다. 봄이 오면 농가에는 일이 많아진다. 앞내에는 고기를 잡는 나무 울인 어살도 매고, 울밑에는 외씨도 뿌리고, 구름이 걷히면 내일은 약초를 캐러 산에 가야 한다고 농가의 일들을 늘어놓았다. 농촌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셋째 수는 초여름의 농촌 사정을 농민의 입을 빌어 표현한 것이다. 일찍 심은 올벼 논에 물을 대 놓고 봉오리가 맺힌 면화 밭은 자신이 매겠다고 하고, 울밑에 연 외를 따서 반찬하고 보리를 찧어 점심을 하라고 아내에게 이른다. 그리고 뒷집에 빚은 술이 익었으면 외상으로라도 가져와서 점심에 반주로 하자고 한다. 농사꾼의 일상을 숨김없이 진솔하게 드러냈다. 마지막 수는 농민의 수고로움을 관찰자적 입장에서 그려낸 것이다. 삼복더위가 끓는 것 같은 때에 농민은 쉬지도 못하고 땀 흘리며 김을 맨다. 이런 노동의 고달픔을 누구라도 실상 그대로 임금에게 알려서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는 정치를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농촌의 풍경 뒤에 가려진 농민의 수고로움을 알고, 선정을 펴라는 시인의 소망이 깃들어 있다고 하겠다.
꿈에 님을 보려 베개에 의지하니
반벽잔등(半壁殘燈)에 앙금(鴦衾)도 차도찰사
밤중만 외기러기 소리에 잠 못 이뤄 하노라.
님이 가오시며 소매 잡고 이별할 제
창밖에 앵화(櫻花)꽃이 피지 아녀 오마터니
지금에 꽃 지고 잎 나도록 소식 몰라 하노라.
각시네 꽃을 보소 피는 듯 이우느니
옥 같은 얼굴인들 청춘을 매었을까.
늙은 후 문전(門前)이 냉락(冷落)하면 뉘우칠까 하노라.
간밤에 자고 간 그놈 아마도 못 잊어라.
와얏(瓦冶)놈의 아들인지 진흙에 뽐내듯이 사공놈의 성냥인지 삿대로 지르듯이 두더지 영 식(令息)인지 곳곳이 뒤지듯이 평생에 처음이요 흉증(凶症)이도 야릇해라.
전후(前後)에 나도 무던히 겪었으되 참 맹서하지 간밤 그놈은 차마 못 잊어 하노라.
님을랑 회양금성(淮陽金城) 오리나무 되고 나는 삼사월(三四月) 칡넝쿨이 되어
그 나무에 그 칡이 납거미 나비 감듯 이리로 칭칭 저리로 칭칭 외오 풀어 올이 감아 얽어 져 틀어져 밑부터 끝까지 조금도 빈틈없이 찬찬 굽이나게 휘휘 감겨 주야장상(晝夜長常)에 뒤틀어져 감겨 있어
동(冬) 섣달 바람비 눈서리를 아무리 맞은들 풀릴 줄이 있으랴.
남녀애정을 표현한 작품을 고른 것이다. 님은 임금을 상징하거나 그리운 대상을 함축하기도 한다. 첫 수는 그리운 님을 꿈에서나 만나려 하지만 등불 아래 홀로 자는 원앙금침은 차갑고 한밤중의 짝 잃은 기러기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말로 연군의 정을 함축하고 있다. 이 작품은 정철의 ‘사미인곡(思美人曲)’ 중 “청등(靑燈) 걸은 곁에 전공후(鈿箜篌) 놓아두고 꿈에나 님을 보려 턱 받고 비겼으니 앙금도 차도 찰샤 이 밤은 언제 샐꼬.”라는 구절에서 영향 받은 듯하고, 군신지정을 남녀애정으로 유추한 것도 유사하다. 둘째 수는 님과 이별하고 그를 기다리는 심정을 표현한 것으로 이것도 연군지정에 유추할 수 있다. 님이 떠나며 앵두꽃이 피기 전에 온다고 약속하더니 꽃이 지고 잎이 나도 소식조차 없다고 원망한다. 님을 기다리는 여인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셋째 수는 늙은 남자가 젊은 여인에게 하는 질투심 섞인 충고다. 젊은 여인에게 꽃을 보라면서 꽃이 피었다가 곧 시들 듯이 예쁜 얼굴도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니 늙은 후에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것이다. 청춘이 가면 문전이 한산해질 것이라는 말로 보아 이 여인은 아마도 화류계의 여인인 듯하다. 그렇다면 이 여인에게 자신을 외면하지 말라는 늙은 남자의 애원이 아닐까 싶다. 넷째 수는 화류계 여인의 노골적인 애정을 드러낸 것인 듯하다. 간밤에 자고 간 사내를 묘사하는데, 기와를 굽는 사람의 아들인지 진흙 속에 뛰놀듯이, 사공의 솜씨인지 삿대로 내지르듯이, 두더지의 아들인지 곳곳을 뒤지듯이, 평생에 처음으로 흉측하고 야릇하더라고 하면서 무던히 많이 겪은 중에 그 놈은 잊지 못하겠다고 했다. 대제학을 지낸 사람이 지은 작품치고는 너무 노골적인 성묘사가 아니냐는 비난이 있음직하지만, 성에 대한 것도 감출 것이 없다는 넉넉한 마음가짐을 드러낸 것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마지막 수도 남녀간의 성애를 다룬 것이다. 님은 회양성의 오리나무가 되고 나는 삼사월에 한창 자라는 칡넝쿨이 되자는 비유부터 외설스럽다. 그 나무에 칡이 거미가 나비를 감듯이 칭칭 감고, 잘못 풀고 옳게 감아 얽어지고 틀어져 빈틈없이 굽이지게 휘휘 감아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항상 감고서 동지섣달 눈서리에도 풀리지 말자고 했다. 인간실상의 전모를 남김없이 그리고 거리낌 없이 시조로 표현해 보려는 대담하고도 굳센 의지가 이런 작품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