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봉한(洪鳳漢, 1713-1778)은 영조․정조 때의 문신이다. <영조․정조실록>과 <은파산고(恩坡散稿)>에 의하면, 그의 자는 익여(翼汝)이고 호는 익익재(翼翼齋)이며 본관은 풍산으로 사도세자의 장인이다. 23살(1735, 영조11)에 진사가 되어 음보로 참봉, 세자익위사 세마 등을 지내고, 32살(1743, 영조20)에 딸(혜경궁 홍씨)이 세자빈으로 뽑힌 뒤, 문과에 급제하여 문학이 되었다. 다음해 광주(廣州)부윤에 특진, 승지, 경기감사를 거쳐, 38살에 세자의 대리청정으로 누진하여 어영대장에 오르고, 이어 예조참판으로 연접도감(延接都監) 제조를 지낸 후, 41살(1753, 영조29)에 예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비변사 당상으로 <임진절목(臨津節目)>을 지었다. 43살에 병조판서를 거쳐 평안감사, 좌참찬이 되고, 47살에 세손사, 호조판서를 거쳐, 49살에 세자의 평양 원유(遠遊) 사건에 인책한 이천보(李天輔), 민백상(閔百祥)이 죽자 우의정에 오르고, 좌의정을 거쳐 판돈령부사를 지낸 뒤, 영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세자가 뒤주에 갇히자 대세를 알고 방관하여 세자가 죽던 날 한강에서 대신들과 선유(船遊)를 즐겼다. 왕이 뉘우치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자 태도를 바꾸어 세자를 죽게 한 김귀주(金龜柱) 일당을 탄핵하였고, <수의편(垂義篇)>을 지어 세자의 죽음을 자세히 적어 벽파(僻派)탄압의 구실로 이용했다. 51살에 주청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그 후 영조의 정책에 순응하여 많은 업적을 이룩했다. 59살에 벽파가 세손을 해치려 하자 이를 막다가 청주에 유배 되었으나, 홍국영(洪國榮)의 기민한 수습과 시파(時派)의 승리로 풀려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금야월(今夜月) 작야(昨夜) 같고 금년화(今年花) 거년(去年) 같애.
어인 백발(白髮)은 나날 다르는고.
두어라 화전월하(花前月下)에 백발가(白髮歌)로 놀리라.
그는 딸이 세자빈으로 책봉된 후 계속 승진하여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사도세자의 비극을 둘러싸고 왕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반대파를 제거하고 왕을 도와 경제 안정과 문예부흥에 이바지 했다. 그러므로 그의 나날은 오늘밤의 달이 어제와 같고, 올해의 꽃이 지난해와 같다고 할 정도로 태평스런 득의의 세월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의 흐름은 그에게 해가 다르게 백발을 더해 주었다. 중장은 그것을 자탄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상심하지 않았다. 백발이면 어떠냐. 작년과 같은 달 아래에서, 지난해와 같은 꽃 앞에서 백발가를 부르면서 인생을 즐길 것이라고 오히려 의기양양해 하였다. 권력을 쥔 득의에 찬 상황에서도 어김없이 늙음은 찾아온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굴하지 않고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