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양주익의 시

김영도 2018. 6. 4. 13:18

양주익(梁周翊, 1722-1802)은 영조정조순조 때의 문신이다. 실록과 <무극집(無極集)>에 의하면, 그의 자는 군한(君翰)이고 호는 무극(無極)이며 본관은 남원이다. 32(1753, 영조29)에 사마시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춘추관 기주관, 칠원현감 등을 역임했다. 45(1766, 영조42)에 병조좌랑을 지냈고, 53살에 대책문에 공경하는 뜻이 없다하여 귀양 갔다. 그 후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74(1975, 정조19)에 국가 대계로서 통일해야 할 열두 조목을 상소하여 병조참의가 되었고, 조사위장(曹司衛將),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했다. 관직에 있을 때는 서정(庶政)의 개혁에 관한 상소를 여러 번 올렸으며 특히 78(1799, 정조23)에 만기일요소(萬機一要疏)를 올렸을 때는 가장(嘉獎)을 받았다. 학문에 조예가 있었고 시문과 글씨에 능했으며 천문 지리 음양 병법에도 능통했다. 시조 10수가 전한다.




천지(天地)도 좁고 좁고 하해(河海)라도 옅고 옅다.

문무겸함(文武兼啣) 육십자(六十字)는 사백년래(四百年來) 처음이라.

충장공(忠壯公) 감읍(感泣)하는 눈물이 구천하(九泉下)의 또 한 샘이 솟는가 하노라.




호남(湖南) 제일한문(第一寒門)에 과분(過分)한 은택(恩澤)이 띠는 듯하니

숙야동촉(夙夜洞屬)하여 이내 마음이 연빙(淵氷)이로다.

종고(終古) 우주간(宇宙間) 대영웅(大英雄) 다 전전긍긍(戰戰兢兢)으로 왔나니.




교룡산(蛟龍山) 상상봉(上上峰)에 깃들여 있는 저 백운(白雲).

노신(老臣)의 불인결(不忍訣)하는 눈물을 비삼아 가득 실어다가

낙양궁궐(洛陽宮闕) 운한(雲漢) 볼 때에 패연(沛然)히 내려드릴까 하네.




나아가도 성은(聖恩)이요 물러가도 성은(聖恩)이라.

낭묘(廊廟)나 강호(江湖)나 간 곳마다 성은(聖恩)이라.

이 몸이 일백번(一百番) 죽어도 마음은 천천만만춘(千千萬萬春)인가 하노라.




앞의 세 수는 감은곡(感恩曲)’ 5수 중 첫째, 둘째, 셋째 수이고, 마지막 수는 감군은가(感君恩歌)’ 5수 중 다섯째 수다. 정조 임금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읊었는데, 감정이 격하여 율조가 조금씩 늘어났다. 첫 수는 정조 9년에 김덕령(金德齡)에게 충장(忠壯)이란 시호를 내리자 임금의 은혜에 감격하여, 천지가 좁고 하해가 옅을 만큼 임금의 은혜가 크다고 과장했다. 그리고 김덕령의 문무겸전을 드러낸 시호의 예순 글자는 조선 4백 년래에 처음이라면서 구천지하의 김덕령도 감읍하는 눈물이 샘솟듯 할 것이라고 했다. 왜 이렇게 감격했는가. 김덕령은 앞에서도 나왔지만, 임진란이 일어나자 형 김덕홍(金德弘)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가, 형이 모친은 늙고 막내가 어리다며 그에게 모친을 모시라고 돌려보내고 자신은 고경명과 함께 싸움터에서 죽었다. 그는 모친상을 당했으나, 이귀(李貴)의 천거로 권율 휘하의 장수가 되어 곽재우(郭再祐)와 협력해서 왜적을 무찔렀고 공을 세웠다. 이 때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이 일어나자 머뭇거리고 관망했다는 무고를 당해 체포되고, 이몽학과 결탁했다는 혐의를 받아 옥사했다. 이렇게 억울하게 죽은 용감한 장수의 원한을 풀어주었으니 동향인으로서 감격한 것이다. 둘째 수는 자신은 시골의 한미한 가문 출신인데, 임금이 과분하게 은택을 내리니 밤새 임금에 대한 공경의 마음으로 마치 깊은 못가에 선 듯 얇은 얼음을 밟은 듯 조심스럽다고 했다. 예부터 위대한 영웅이라 할지라도 다들 전전긍긍 조심하지 않으면 망했으니 자신도 임금의 은혜에 감격하며 공경하겠다는 다짐이다. 영조 39년과 42년에 그의 가문이 한미하다고 하여 파직 당한 일이 있었으니 정조가 그의 상소를 가납해서 벼슬을 내린 일에 감격하고 공경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셋째 수는 남원 교룡산 꼭대기에 걸친 흰 구름을 불러서 늙은 신하가 임금의 은혜를 입고 차마 이별하기 어려웠던 정을 비삼아 실어다가, 임금이 하늘의 은하수를 볼 때 자신의 눈물을 붓듯이 뿌려달라고 했다.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쏟아지는 비에다 투사하여 표현했다. 이런 상상력은 이미 이항복의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 고신원루를 비삼아 띄어다가 / 님 계신 구중심처에 뿌려본들 어떠리.”에서 사용된 바 있다. 마지막 수는 임금의 은혜를 찬양하여 조정에 나아가도 임금의 은혜이고,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도 임금의 은혜라고 반복적으로 부연했다. 이렇게 은혜에 감격하다보니 백번 죽어도 마음이 기쁘기가 봄날 같다고 과장되게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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