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헌(蔡瀗, 1715-1795)은 영조․정조 때의 선비다. <인천채씨족보(仁川蔡氏族譜)>와 <근품재유고(近品齋遺稿)> 등에 의하면, 그의 자는 계징(季澄)이고 호는 근품재(近品齋)이며 본관은 인천이다. 39살(1753, 영조29)에 생원이 되었으나 더 이상 과거에 나아가지 않았다. 뒤에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73살(1787, 정조11)에 아들 채시옥(蔡蓍玉)이 문경 이화리(梨花里)에 석문정(石門亭)을 지으니 그곳에서 한적하게 지냈다. 시조 8수가 전한다.
석문(石門)이 석문 아녀 상산(商山)이 이곳이다.
자지가(紫芝歌) 한 곡조에 세사(世事)를 다 잊으니
이 밖에 부귀공명(富貴功名)은 부운(浮雲)인가 하노라.
청산(靑山)이 둘러 있고 벽수(碧水)도 흘러간다.
풍월(風月)이 벗이 되어 백운(白雲)에 누웠으니
백구(白鷗)야 백년(百年)을 함께 놀자 하노라.
석양(夕陽)에 낚대 들고 조대(釣臺)로 올라가니
진실로 저 취옹(醉翁)이 고기잡이 마음인가.
녹양(綠楊) 방주(芳洲)에 취적(取適)인가 하노라.
석양(夕陽)은 재를 넘고 오동(梧桐)에 비 올 적에
석강(石矼)에 가는 사람 걸음도 급할시고.
아무리 급히 간들 풍우(風雨)를 피할쏘냐.
처음 두 수는 ‘석문정가(石門亭歌)’인데, 아들이 지어준 석문정에서 강호자연을 즐기는 은자의 생활을 읊은 것이다. 첫 수에서 석문정은 단순한 돌문이 아니라 상산사호(商山四皓)가 숨어산 상산과 같다고 했다. 상산사호는 진시황의 폭정을 피해 상산에 숨어살았는데, 한나라 고조가 태자를 폐하려 하자 장양의 조언을 들은 여후가 상산사호를 모셔다가 태자와 함께 고조를 뵙게 하니 고조가 태자를 폐하려는 마음을 거두었다고 한다. 석문정이 상산이란 말은 자신이 상산사호 같은 은자란 뜻이다. ‘자지가(紫芝歌)’는 상산사호가 불렀다는 노래인데, “높은 산은 아득하고 깊은 골은 구불구불, 지치[紫芝]는 탐스러워 먹을 만하구나. 요순시절은 멀어서 내 장차 어디로 가나. 높은 벼슬은 근심이 많고 부귀는 두려우니 가난하고 천하지만 멋대로 사는 것만 못하네.(莫莫高山 深谷逶迤 曄曄紫芝 可以療飢 唐虞世遠 吾將安歸 駟馬高蓋 其憂甚大 富貴之畏 人不如貧 賤之肆矣)”라는 내용이다. 석문정에서 이 노래를 부르며 부귀공명이 뜬 구름 같다는 것을 알고 세상사를 잊는다고 했다. 둘째 수에서 푸른 산과 맑은 물을 배경으로 바람과 달을 벗하여 흰 구름에 누웠다고 했다. 흰 구름은 벼슬에 뜻이 없다는 의미도 있다. 그래서 평생토록 자연 속에서 즐기겠다는 강호한정의 뜻을 말했다. 셋째 수는 ‘조대가(釣臺歌)’다. 저물녘에 낚시터를 찾아가지만 고기잡이에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버드나무 우거진 모래톱에 노니는 것에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고기잡이보다는 강호한정의 흥취를 즐긴다는 말이다. 마지막 수는 돌 징검다리를 노래한 ‘석강가(石矼歌)’다. 저녁 해는 서산에 기울고 오동잎에 비 듣는 소리가 요란하다고 하여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설정한 뒤, 급히 돌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사람을 등장시켰다. 그리고는 비바람 칠 때 급히 간다고 그것을 피하겠느냐고 묻는다. 위험하고 다급한 상황일수록 서두르지 말라는 충고 같기도 하고, 어두워 오는 세상길에서 공명을 얻고자 서두는 사람들을 풍자한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