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성(金箕性, ?-1811)은 정조․순조 때의 문신이며, 사도세자의 첫째 사위이다. <정조․순조실록>에 의하면, 그의 자는 성여(成汝)이고 호는 이길헌(頤吉軒)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사도세자의 서녀 청연옹주와 결혼하여 광은부위(光恩副尉)가 되고, 1790년(정조14)에 동지 겸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95년(정조19)에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맞아 사도세자에게 호를 올릴 때 상호도감의 금인 서사관으로 공이 있어 가자되었다. 1800년(정조24)에 왕세자의 책봉의례에 공로가 있었으며, 1802년(순조2)에 왕비책봉 때 전문(篆文) 서사관으로 공이 있어 상을 받았다. 그 뒤 의령현감으로 나갔으며, 1805년(순조5)에 호조참판에 올랐다.
추월(秋月)이 만정(滿庭)한데 슬피 우는 저 기러기
상풍(霜風)이 일고(一高)하면 돌아가기 어려우리
밤중만 중천(中天)에 떠 있어 잠든 나를 깨우는고.
한벽당(寒碧堂) 좋단 말 듣고 망혜죽장(芒鞋竹杖) 찾아가니
십리풍림(十里楓林)에 들리나니 물소리로다.
아마도 남중풍경(南中風景)은 예뿐인가 하노라.
그는 사도세자의 사위였던 만큼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에 대하여 남다른 감회를 지닐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인용된 첫 수도 그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가을 달빛은 뜰에 가득하고 기러기는 하늘을 날며 슬피 운다. 서릿바람이 한번 높아지면 고향으로 돌아가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그래서 한밤중 중천에서 슬피 울어 잠든 나를 깨우느냐. 이렇게 풀어 읽을 수 있다. 가을밤에 기러기 울음소리를 듣고 홀로 방황하는 어떤 대상을 생각한 것이다. 그 대상은 참혹하게 죽은 장인의 영혼을 말하는 것인지 모른다. 둘째 수는 청풍의 한벽루(寒碧樓)를 찾아간 기행시조다. 부마였으니 생활은 유족하고 한가했을 것이다. 그래서 충청도 청풍의 한벽당이 경치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짚신에 대지팡이 짚고 찾아갔다는 것이다. 망혜죽장은 상투어로 조촐하고 가벼운 차림새라는 말이다. 한벽당 가는 길은 십리나 이어지는 단풍 숲이고, 남한강의 물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시각적 이미지에다 청각 이미지를 첨가했다. 그리하여 남도의 풍경은 여기뿐이라면서 청풍 한벽루의 경치를 제일로 쳤다. 담담하게 여정을 서술한 듯하지만, 풍광에 취한 자신의 감회를 이미지의 조응으로 잘 드러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