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2

경기도 고양시 제3구간 고양서삼릉누리길8.28k(원당역~삼송역)

김영도 2014. 12. 18. 11:55

1.위치

원당역/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성사1동 410-7

삼송역/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삼송동 20-14

 

2.교통

(갈때)부개역에서 종로3가역 환승후 원당역에서 하차한다

(올때)삼송역에서 종로3가역 환승후 부개역에서 하차한다

 

3.코스

원당역~배다리술박물관~수역이마을 먹거리촌~한국스카우트연맹~허브랜드~서삼릉~ 농협대학~천일약수터~삼송역

 

 

 

4.상세설명

<배다리술박물관>

 

 

<한국스카우트연맹>

 연원 및 변천

 

보이스카우트운동은 영국의 포웰(Powell, B.)에 의하여 창설되었다. 1907년 7월 포웰은 자신이 군인시절에 착안하고 경험하였던 여러 가지 훈련법을 실천에 옮겨보기 위해 여러 계층의 소년 21명을 대상으로 브라운시섬(Brown Sea Island)에서 실험야영을 실시하였는데, 그 결과 이 훈련법이 소년들에게 유익하다는 확증을 얻게 되었다.

다음해인 1908년 『소년을 위한 스카우트활동(Scouting for Boy’s)』이라는 책을 펴내는 것을 계기로, 영국 내에 보이스카우트가 조직되었다. 이때부터 스카우트운동은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가 전 세계적으로 이 운동을 거쳐 간 사람만도 2억 5,000만 명에 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22년에 창설되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식민지교육과 탄압에 눌려 분쇄되는 운명에 놓였던 소년운동은 민족지도자들에 의하여 재조직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활동 속에는 나라의 독립을 위한 원대한 계획도 은밀히 내포되어 있었는데, 당시 국제적인 친선과 우애를 표방하였던 보이스카우트운동은 이러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소년들에게 야영·모험·개척·활동 등을 통한 다양한 훈련을 받게 함으로써 심신을 단련시킴은 물론 나라를 위한 일에 큰 몫을 해내도록 하였다.

1922년 10월 이러한 스카우트운동에 뜻을 둔 조철호()는 중앙고등보통학교 후원에서 8명의 소년으로 조선소년군()의 창립과 함께 경성제1호대()의 발대식을 거행하였고, 같은 무렵 정성채()는 중앙기독교청년회(YMCA)내에 조선소년척후대()를 발족시켰다.

조선소년군과 조선소년척후단은 조직의 기반이나 지도방법 등에서 다소 차이는 있었으나, 스카우트정신을 근간으로 지()·덕()·체()를 겸비한 훌륭한 시민을 양성하는 전인교육에 목표를 두고 있었다.

이 두 단체는 3·1운동 5주년을 맞이한 1924년 3월 1일을 택하여 통합, 민족지도자인 이상재()를 총재로 추대하고 소년척후단조선총연맹을 결성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는 스카우트운동이 민족의식을 앙양시키는 등 자국에 이롭지 않다는 점을 간파하고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1937년 7월 31일 파고다공원에서 시국강연회가 개최되었을 때, 장내정리를 맡은 보이스카우트단원들이 맨 행건에 태극마크와 무궁화꽃, 그리고 ‘ㅈㅜㄴㅂㅣ’라는 한글 낱자가 도안되어 있는 것을 빌미로, 일본경찰은 문제의 행건을 압수하고 지도자들을 수배하여 구금하는 한편, 같은 해 9월 3일 단체를 강제 해산시키고 말았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스카우트운동을 재건하려는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1946년 3월 1일 사단법인 대한보이스카우트 중앙연합회라는 명칭으로 재건되었으며, 1947년 8월 조선소년단으로, 1948년 국호변경에 따라 대한소년단으로, 1966년 2월 보이스카우트한국연맹 등으로 여러 차례 바뀌어오다가 1968년부터 현재의 사단법인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으로 명명되었다.

우리나라의 보이스카우트운동은 6·25전쟁 중에도 계속되었다. 1951년 1월 부산에 임시중앙본부가 설치되어 스카우트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52년 8월 피난지 부산 일광해변에서 제1회 한국잼버리를 개최하였다. 특히, 전시 피난지에서는 치안유지를 돕고 구호활동을 벌이며, 소년들에게 나라를 위한 충성에 이바지하도록 하였다.

1953년 1월 31일 세계연맹 회원국으로 정식 가입하여 국제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 1969년 7월 「스카우트활동 육성에 관한 법률」이 국회에서 제정, 공포됨으로써 사회적 보호와 국가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1983년에는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세계연맹 이사국으로 피선되었으며, 국회 내에 스카우트의원동우회(현재의 스카우트의원연맹)가 발족되었다. 또한, 보이스카우트활동의 지원·육성을 목적으로 한국보이스카우트지원재단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서삼릉>

한때 이곳에 있었던 중종()의 정릉()을 중심으로 희릉()·효릉()이 있는데, 그 근처에 왕실 묘지가 이루어져 명종()·숙종() 이후 한말까지 역대의 후궁·대군·군·공주·옹주의 묘가 만들어졌고, 고종() 원년에 예릉()이 들어서면서, 효릉·희릉·예릉의 3능을 일컬어서 서삼릉이라 하였다.

⑴ 효릉:중종의 아들 인종()과 그 비() 인성왕후 박씨()의 능이다. 효릉은 왕릉과 왕비릉을 난간()으로 연결한 쌍릉()의 제도로 썼으며, 왕릉에는 양우석()에 운채()와 면석()에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병석()을 돌리었다. 당초 시대적인 상황으로 상례절차를 감쇄()하여 산릉()공사에 소홀한 점이 많았던 모양으로 선조() 10년에 효릉의 개수를 명하여 병석 등 석물()을 다시 고쳐 넣었다.

⑵ 희릉: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능이다. 왕후가 승하하자 처음에는 능터를 광주() 헌릉() 구역 내에 택정하였으나, 이를 둘러싼 권력다툼의 결과로서 새로이 길지()를 찾아 현재의 위치에 모시게 하였다. 그 후 중종의 정릉이 희릉 곁에 정해지면서 정자각()을 양릉 사이에 옮겨 세우고 동원이강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능제도는 병석 없이 난간만 두른 단릉()으로 석물의 배치며 장명등()·석망주() 등의 수법이 전기 능석물() 양식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⑶ 예릉:국말()의 철종()과 철인왕후 안동김씨()의 능이다. 능제도는 양릉을 나란히 놓아 난간으로 연결된 쌍릉제도를 취하고 있으며 능석물 양식상 융건릉()의 영향이 보인다. 즉, 융릉()에서 8각 장명등과 4각 장명등의 운족양식()을 합하여 새로운 양식을 이루고 있다. 능전 3계()는 이미 2계로 줄어들었고 장명등이 전방으로 나와 있는 것이 특이하다. 사적 제200호로 지정되어 있다.

 

5.탐방일자

2014.12.17(수)

 

6.글쓴이

김영도(010-8121-8041)

 

7.생생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