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2

인천광역시 강화도 탐방기(강화나들길 제15구간 고려궁성곽길11Km 남문~동문)

김영도 2014. 6. 9. 09:52

1.위치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남산리와 관청리 일대

 

2.교통

(갈때)구래리에서 90번 버스로 강화터미널~도보로 남문 도착

(올때)강화터미널에서 90번 버스로 부평역

 

3.코스

 

3.상세설명

사적 제32호인 강화산성은 1232년에 축성되어 39년간 몽골의 침략에 대항한 강화의 도성이다. 당초에 성은 내성·중성·외성으로 쌓았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돌로 쌓은 내성뿐이다. 성의 둘레는 약 1.2㎞.

 

중성은 둘레가 약 9㎞인 토성이었고, 선인문·선기문 등 8개의 문이 사방에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외성은 강화의 동쪽 해협을 따라 3만 77척에 달하는 거대한 토성이었으며, 도읍을 옮긴 정부가 육지로부터 물자를 공급받은 중요한 기지였고, 몽골이 강화를 함락시키지 못한 물샐틈없는 요새였다. 하나 1259년 몽골이 화친의 조건으로 내·외성을 모두 헐어야 한다는 단서를 내걸어 강화산성은 헐리고 만다.

조선 초에 다시 축성한 외성은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몇 군데 석축으로 복원한 곳말고는 현재 외성의 흔적은 거의 없다. 내성 또한 1677년 강화유수 허질이 개축한 것을 지난 1977년까지 여러 번의 보수공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으나 동쪽 성은 복원하지 못했다. 성의 남문을 안파루(晏波樓), 서문을 첨화루(瞻華樓), 동문을 망한루(望漢樓), 북문을 진송루(鎭松樓)라 불렀으나 동문은 아예 없어졌다.

현재 서문에는 역사적 현장의 증언으로 옛 연무당터 기념비가 서 있고, 남문에 있던 김상용 선생 순의비는 관청리의 고려궁터 들목으로 옮겨졌다.

성곽(城郭)을 보통 성(城)이라 한다. 성은 본래 외적의 침입이나 자연재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만든 인위적인 시설을 통틀어 말한다. 처음에는 토성에서 목책(木柵), 석축(石築), 전축(塼築)으로 발전했다. 성곽의 전형적인 모습은 안과 밖으로 이중의 벽을 갖추고 있다. 네모꼴로 안에 쌓은 것을 성(城) 또는 내성(內城), 내성 밖으로 쌓은 것을 곽(廓) 또는 외성(外城)이라 하며, 삼중의 벽을 갖추고 있는 성은 가운데 벽을 중성(中城)이라 한다. 도성(都城)인 경우는 왕성·궁성·황성이라 부르고, 그 바깥성을 나성(羅城)이라 한다. 우리나라는 산지가 많아 특히 산성(山城)이 발달하였고, 자연적인 포곡선(包谷線)을 형성한 원형의 성이 많다.

교통, 숙식 등 여행에 필요한 기초 정보

강화군 강화읍 신문리(남문)·관청리(북문)·국화리(서문)에 있다. 강화역사관 앞에서 48번 국도를 따라 읍내로 들어서면 첫번째 삼거리가 나온다. 왼쪽 길은 버스터미널을 거쳐 전등사 일대로 가는 301번 지방도로이다. 오른쪽 길을 따라 조금 가면 길 오른쪽으로는 강화우체국이 있고 왼쪽에 앞의 삼거리에서 갈라진 301번 지방도로와 다시 만나는 길이 나온다. 길을 따라 들어서면 곧바로 길 왼쪽에 강화군 수협이 있고 오른쪽에는 남문으로 들어서는 길이 나 있다. 남문에서 다시 강화우체국 앞으로 나와 국도를 따라 읍내로 0.4㎞쯤 가면 길 오른쪽에 고려궁터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0.4㎞ 가면 고려궁터가 나오고(고려궁터 가는 길 오른쪽에는 남문에서 옮겨온 김상용 선생 순의비가 있다) 궁터를 지나 산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0.7㎞ 가면 북문이 나온다. 서문은 고려궁터로 들어서는 길 입구에서 48번 국도를 따라 하점면 쪽으로 0.6㎞ 가면 길 오른쪽에 서문이 나오고 왼쪽에는 연무당터와 석수문이 있다. 남문·북문·서문 모두에는 주차할 곳이 있다. 읍내에는 숙식할 곳이 여럿 있다.

 

남문

강화읍 신문리에 있는 남문은 강화산성의 내성에 연결되었던 4대문 중 하나다. 조선 숙종 37년(1711)에 건립했는데, 2층 누각 앞쪽에는 강화남문, 뒤쪽에는 안파루(晏波樓)라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겹처마 팔작지붕의 아담하고 시원스런 누각이다.

 

남문 겹처마 팔작지붕의 아담한 누각으로 누각 2층 정면에는 강화성 남문, 뒤쪽에는 안파루라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남문에는 병자호란의 절개의 상징물인 병조·예조·이조 판서를 지낸 김상용의 순의비가 서 있었다. 김상용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묘사를 모시고 강화에 내려와 있었다. 이듬해 1월 강화성이 청군에게 함락되자 강화성 남문에서 화약에 불을 지르고 자결하였다. 청군에게 투항하느니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킨 김상용의 순의비는 현재 관청리로 옮겨져 있다.

서문

서문의 누각은 첨화루(瞻華樓)이다. 숙종 37년(1711) 강화유수 민진원이 남문과 함께 건립하고 현판도 직접 썼다. 겹처마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 14평 규모의 누각이다. 누상에 오르면 강화 시내 전부를 조망할 수 있을 만큼 시야가 훤히 트였다. 적을 살피기에 그만이었을 것이다. 야산으로 이어지는 성곽이 복원되어 있고, 다소 수선스런 남문에 비해 잘 정돈된 주변이 퍽 한가롭다.

 

서문 누상에 오르면 강화 읍내를 조망할 수 있을 만큼 시야가 시원스레 트여 있다.

민족의 아픈 사연은 서문이 더 짙다.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연무당터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연무당(鍊武堂)은 원래 강화진무영 군사들이 훈련하던 곳으로 열무당(閱武堂)이라 했다. 현재 농협 강화군 지부가 들어서 있는 자리에서 이곳 서문의 너른 터로 연무당을 옮겨 온 것은 고종 7년(1870). 그로부터 6년 후인 1876년 2월 국방 강화 의지가 한껏 고조되었을 이곳 군사 훈련장에서 일본의 강압에 못 이겨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우리나라는 인천·부산·원산의 항구를 열되, 일본인에게 치외법권을 적용한다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불평등조약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우리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36년의 압제를 받았으니, 서문의 연무당은 그 설움의 역사가 시작된 징표로 남아 있다. 사각형의 흰 대리석 앞면에는 '연무당 옛터'라 음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사연이 기록되어 있다.

 

석수문 강화 내성을 쌓을 때 강화읍 중심을 흐르는 동락천 위에 남문 옆의 성곽과 연결해 설치된 홍예수문이다. 1977년 서문 옆으로 옮겨왔다.

 

연무당터 뒤쪽 개천에는 당초에 쌓았던 돌은 별로 없고 새로 다듬은 화강석이 더 많이 섞여 복원된, 세 개의 홍예로 이루어진 석수문이 있다. 석수문은 숙종 35년(1709) 강화 내성을 쌓을 때 강화읍의 중심으로 흐르는 동락천 위에 남문 옆 성곽과 연결해 설치했었다. 1900년 갑곶나루의 통로로 삼기 위해 나루 가까운 개천에 옮겼다가, 1977년 지금의 강화읍 관청리로 옮겨 복원했다. 길이 10m, 높이 3.8m, 너비 4m.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7호이다.

알찬 답사, 즐거운 여행을 도와주는 유익한 정보

강화읍의 토산품 판매점과 인삼센터에서는 강화의 자랑인 화문석과 인삼을 전시해놓고 저렴하게 판매하고 있다. 또한 토산품 판매점과 인삼센터 사이에 있는 풍물시장에서는 강화에서만 나는 순무와 씨 없는 감을 팔고 있다. 강화 순무는 팽이처럼 생겼는데 달고 고소하며 비타민 함량이 아주 많아서 김치를 담그면 시원하고 달다.

북문

문루의 이름 진송(鎭松)처럼 소나무숲 우거진 북문에 오르면 정녕 가슴 설레는 볼 거리가 있다. 저 건너 휴전선 너머 북녘의 개성땅이 지척인 듯 다가서는 것이다. 이쪽을 향한 대남방송이 낡은 유성기가 토해 내는 슬픈 변사의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해방된 지 반세기, 그 50년을 헤어져 살고도 분단의 벽은 여전히 가로막혀 있다. 특히 북문에서 망향제를 지내는 실향민을 많이 보는데, 두고 온 부모 형제, 달려가고 싶은 고향이 바로 저 건너 보이는 마을에 있기 때문이리라.

 

북문 정조 7년 강화유수 김노진이 누각을 세우면서 진송루라 이름하였다. 1976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단장했다.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북문은 본디 바로 아래 고려궁터의 든든한 보호막으로 버티고 있었다. 이로써 강화로 천도(1232)한 고려가 대몽항쟁을 위해 축조한 내성에 연결되었된 문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토성이었던 당시의 성은 개경 환도 때 헐리고 조선 초에 개축하였다. 그 뒤 병자호란 때 대부분 파괴된 것을 숙종 37년(1711)에 석축으로 완성했다.
이때까지도 문루는 없었다. 정조 7년(1783)에 강화유수 김노진(金魯鎭)이 누각을 세우고 진송루라 했으며, 1976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단장했다. 

북문에서 바라본 북녘땅 휴전선 너머 북녘땅이 지척인 이곳에서는 망향제를 지내는 실향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알찬 답사, 즐거운 여행을 도와주는 유익한 정보

2일·7일에 서는 강화 5일장은 인삼과 화문석을 비롯하여 강화의 다양한 특산물이 나와 매우 풍요롭다. 요즘은 전날장이라 하여 장날 전날 점심때 전후로 장이 서는데 5일장보다 더 사람들이 붐비고 물건들도 많이 나와 시골장의 독특한 맛을 느낄 수 있다.

 

4.탐방일자

2014.06.07(토)

 

5.글쓴이

김영도(010-2888-8041)

 

6.생생한 장면

 

 

 

 

 

 

 

 

 

 

 

 

 

 

 

 

 

 

 

 

 

 

 

 

 

(남문)

 

 

 

 

 

 

 

 

 

 

(남장대)

(남산 정상)

 

 

 

 

 

 

 

(국화저수지)

 

 

 

(서문~첨화루)

 

 

 

 

 

 

 

(강화향교)

 

 

 

 

(북문~진송루)

 

 

(북산)

 

 

(동문~망한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