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한호의 시

김영도 2020. 8. 19. 22:40

한호(韓濩, 1543-1605)는 선조 때의 서예가다. <선조실록>과 <연려실기술>, <국조인물고> 등에 따르면, 자는 경홍(景洪)이고 호는 석봉(石峰)이며 본관은 청주로 개성 사람이다. 태어났을 때 점치는 이가 말하길 “옥토끼가 동방에 나니 낙양(洛陽)에 종이 값이 높아지리라.”고 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격려로 서예에 정진하여 왕희지(王羲之) 안진경(顔眞卿)의 필법을 익혀 각체에 뛰어났다. 종래의 중국 서체를 모방하던 데서 벗어나 독창적이고 호쾌한 석봉체(石峰體)를 확립했다. 25살에 진사가 되어, 30살 이후 명필로 사신들을 수행하였고, 또 명나라 사신을 맞이할 때 뛰어난 필치로 이름을 떨쳤다. 41살에 와서(瓦署) 별제가 되고 인의(引儀), 사포(司圃), 주부 등 여러 벼슬을 거쳐 51살에 사헌부 감찰, 한성판관을 지냈다. 호조,형조,공조정랑을 역임하고, 57살에 사어(司禦)를 거쳐 가평군수가 되었으나 직무에 소홀하다고 사헌부에서 탄핵하여 임금이 추고(推考)만 명했다. 62살에 흡곡(歙谷)현령이 되었다. 중국의 이여송(李如松)이 글씨를 얻어가서 왕세정(王世貞)이 ‘성난 사자와 천리마 같다’고 평했다고 한다. 그의 글씨는 조선 후기 김정희(金正喜)의 추사체와 쌍벽을 이룬다.

 

 짚방석 내지 마라 낙엽엔들 못 앉으랴.

 솔불 켜지 마라 어제 진 달 돋아온다.

 아이야 박주산채(薄酒山菜)ㄹ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그는 서예에 몰입하여 다른 것을 돌아보지 않은 인물 같은데, 이 시조에서도 소탈하게 격식을 따지지 않고 소박함과 자연스러움을 즐기려는 풍모가 풍겨 나온다. 초장에는 비록 가난한 산골이지만 짚방석이라도 내놓으려는 모양인데, 그것을 마다하고 낙엽 위에 앉겠다는 소박하지만 운치 있는 예술인의 정취가 배어난다. 격식보다는 자연스러움이 좋다는 말이다. 중장에는 어둡다고 관솔불을 밝히려는 것을 그마저 못하게 하고 돋아오는 달빛을 기다리잔다. 한걸음 더 자연 쪽으로 다가간 파탈(擺脫)이다. 낙엽 위에 앉은 사람이 돋아오는 달빛 아래 있어야 자연 친화의 제격을 갖추는 셈이다. 종장에서 이렇게 진행되어온 자연 친화에 어울리는 절정으로 박주(薄酒)와 산채(山菜)를 들었다. 산골에서 잡곡으로 빚은 막걸리와 산에서 캐온 산나물이야말로 격식 없이 자연을 즐기려고 하는 시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이다. 이렇게 소박한 소재들을 사용하면서도 짚방석과 낙엽, 솔불과 달 등으로 대조법을 통하여 좀더 자연스러운 운치를 끌어내는 수법은 그가 서예의 대가임을 새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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