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성(金玄成, 1542-1621)은 명종, 선조, 광해군 때의 문신이다. <선조실록>과 <광해군일기>, <국조인물고>에 의하면, 자는 여경(餘慶)이고 호는 남창(南窓)이며 본관은 김해다. 23살(1564,명종19)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 공조좌랑을 지냈고, 33살에 문무관 시험에 2등을 했다. 가산 군수를 거쳐 형조정랑이 되었고, 임진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여 예빈시정이 되었다. 인천부사를 거쳐 내첨시정, 사재감정 등을 역임하고 61살에 양주목사가 되었다. 65살에 원접사 제술관이 되어 ‘동시집(東詩集)’을 편찬했다. 삭녕군수, 여주목사를 거쳐 67살에 선조의 묘지를 쓴 공으로 동지돈녕부사가 되었다. 74살(1617, 광해9)에 평양의 기자묘비문을 베껴 돌아와 마침 벌어진 대비(大妃) 삭호(削號)의 논의에 참여치 않아서 파직되고 가난하게 여생을 마쳤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단정하였으며 효성스러웠으나 정사에 우활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시에 능했고 글씨는 송설체를 잘 썼다.
낙지(樂只)자 오늘이여 즐겁도다 금일(今日)이야
즐거운 오늘이 행여 아니 저물세라
매일에 오늘 같으면 무슨 시름 있으랴.
그가 젊어서 자신의 문장 재주를 뽐내던 시절에 지은 시조인 듯하다. 젊음의 열정과 의기가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임란 이후에는 외직으로 돌았고 나라 형편이 어려웠으며, 광해군 즉위 후에는 나이가 많아서 정사에서 물러나 있었고 그 시대의 흐름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시가 표현하는 바는 젊은 날의 들뜬 분위기이지 장년기 이후의 차분하고 우울한 기분이 아니다. 만일 장년기 이후의 작품이라면 아첨이거나 허세로 그 내용이 자신의 정체와 맞지 않는 허위라고 할 것이다. 초장은 술잔이라도 추켜들고 ‘즐깁시다 오늘이여 즐겁구나 금일이야’라고 외치는 듯한 분위기다. 기쁜 날의 연회에서 분위기를 띄우는 추임새 같은 탄성이다. 중장은 아무리 즐거운 오늘이라도 저물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다시 즐거운 내일이 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매일 즐거운 날이 계속되어야 태평성세가 되는 것이다. 종장에서 매일 오늘 같은 날이 계속된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고 토로했다. 즐거운 일이 있어 모처럼 번성한 연회가 열리고 거기에서 분위를 띄우기 위해 이런 시를 짓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나 즉흥적 기분에 따른 것이므로 말이 겹치고 직설적이어서 여운이 거의 없다.